▣ 180화
<프랑스 ― 파리>
파리에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다만 그 편지는 본연의 무게에 비해 그 안에 든 내용은 절대 가볍게 넘길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전하. 이제 슬슬 결정을 하셔야 합니다.”
“으음, 뭘 그렇게 서두르는 것이오? 무릇 말이라 함은 양쪽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는 것 아니오? 일단 용담공에게도 추가로 편지를 더 보내봅시다.”
“이미 상황이 명백하게 드러났는데 그들에게 물을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거기에 저들은 명백히 아국에 대한 침략행위를 저질렀습니다!”
열변을 토하는 노귀족의 모습에 필리프 2세는 입술을 깨물었다. 최근 머리 아픈 일들이 여기저기서 벌어지고 있었다.
개중에 단연코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건 사자공과 하랄 블로탄의 잉글랜드 침공이었다.
이 미친놈들이 뜬금없이 잉글랜드를 조지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중요한 건 잉글랜드가 실시간으로 두들겨 맞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존 왕이 보낸 편지를 통해 대략적이나마 그 이유를 파악할 수 있었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는 웨식스 왕조의 적통이자 왕위 계승자를 데리고 나타났고 왕위를 되돌려받기 위해서 잉글랜드를 공격하고 있다고 했다.
웨식스 왕조가 멸망하고 노르만 왕조가 들어선 건 이미 50년도 훨씬 지난, 거의 백 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였다.
뜬금없이 그걸 명분으로 들고나오는 게 과연 뭘 의미하겠는가? 그가 진짜로 웨식스 왕조의 후계자를 왕으로 만들 거라 보는가?
뭐, 왕으로 만들 수야 있겠지. 하지만 그 왕은 허수아비 왕이 될 테고 결국 이러니저러니 해도 결과적으로 본인이 잉글랜드를 먹고 싶다는 말 아니겠나?
사실 딱히 놀랄 일도 아니다. 원래 그는 태생이 바이킹이고 바이킹들이 주변 국가를 조지는 건 해가 동쪽에서 뜨는 것과 같은 진리였으니까.
당장 프랑스 내의 노르망디와 아키텐, 그리고 해안가와 인접한 몇몇 지역 역시 선대 왕들이 바이킹들의 등쌀에 견디다 못해 내어준 게 아니었던가.
해안가를 계속 공격당하느니 차라리 그놈들에게 줘버리자는 의견이 나왔고 그 때문에 그 야만인 놈들에게 귀족 작위를 내려준 것이다.
문제는 그놈들이 그것도 모자라 잉글랜드까지 점령했다는 거지만.
아무튼, 라그나르가 잉글랜드를 공격할 명분은 충분했고 실질적인 이유도 이해했다. 하지만 그 모든 걸 다 알고 있음에도 필리프는 일부러 결단을 내리지 않고 질질 끌었다.
사실 아쉬울 건 없었다. 프랑스의 왕들에게 노르만 왕조가 영향력을 행사하는 프랑스령의 영토는 언제나 눈엣가시였으니까.
그걸 신성 로마 제국이 알아서 치워주겠다는데 오히려 박수 쳐 줘야 할 일이 아니던가. 하지만 다른 영주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들에게는 라그나르가 제2의 윌리엄처럼 보인 모양이다. 실제로 조금 강압적으로… 아니, 거의 통보나 다름없는 형식으로 노르망디를 무단 점거했으니까.
아무리 노르망디가 잉글랜드의 영지이고 잉글랜드로 가기 위한 교두보라고 해도 결국 그곳은 프랑스의 영토였다.
그곳을 사전에 그 어떤 협의도 없이 공격한 뒤에 ‘우리가 쓰고 돌려줄게.’라고 통보하는 건 선전포고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 때문에 전쟁의 개입 여부와 프랑스의 외교정책의 방향성에 대한 회의는 며칠이나 지루하게 이어졌지만, 그것도 결국 오늘 끝을 봐야 할 듯했다.
답장이 오지 않자 초조해졌는지 존 왕이 휘하의 궁정백을 전령으로 보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존 왕이 우리와 동맹을 맺고 싶다는 거군.”
필리프 2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궁정백을 바라보았다. 궁정백은 굉장히 애절한 표정으로 간청하듯 이야기했다.
“그렇습니다. 전하께서는 과거의 묵은 감정과 은원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함께 힘을 합쳐 새롭게 나타난 위협을 헤쳐나가자고 하셨습니다.”
“위협이라 함은 뭘 말하는 것인가?”
물론 굳이 물어볼 것도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리프는 전령에게 물었다. 저들이 생각하고 있는 적이 어디까지인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밑도 끝도 없이 신성 로마 제국과 전쟁을 하겠다고 한다면 들을 것도 없이 거절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프랑스가 지금 잘나가고 있다지만 신성 제국과의 전쟁은 필리프 입장에서도 부담이었다.
이전의 신성 로마 제국이라면 몰라도 오토가 황제가 된 뒤로 지금의 제국은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단연코 제국의 공작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때문이었다.
물론 여전히 여러 대귀족들과 선제후들이 제국의 권력을 나눠 가지고 있지만 당장 잉글랜드를 침공하고 있는 사자공은 황제인 오토의 아버지이며 용담공 라그나르는 선제후인 칼리나의 남편이었다.
거기에 라그나르는 제노바, 폴란드, 덴마크와도 친분을 가지고 있었으며 발트해 인근의 여러 국가들 사이에서 무역 공동체를 만들어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잘못 도발하면 시선이 이쪽으로 쏠릴 위험도 있었다. 그렇기에 필리프는 사자공이 별다른 협상도 없이 거의 통보하듯 노르망디를 공격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 조금 기분 나쁘다고 발작하면서 개길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던가. 지금은 화가 나더라도 참을 시기였다. 자존심을 조금만 굽히면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지 않던가.
“오직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영토에 침공한 이들만을 말하는 겁니다.”
“존 왕도 확전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말이군.”
그제야 필리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사실 말은 안 했지만 프랑스 국내의 사정도 굉장히 복잡했다.
합리적으로. 정말 합리적으로만 생각하면 존 왕의 제안은 생각할 가치도 없었다. 무례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사자공은 노르망디를 잠시 조차한다고 했고 일이 끝나면 돌려준다고 했었다.
그동안 자신은 느긋하게 존 왕의 영지인 아키텐을 공격해서 자신의 영향력 아래 두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왕 혼자서 다스리는 국가가 아니었고 현재 상황이 조금 애매했다.
우선, 신성 로마 제국의 군대가 노르망디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마찰이 있었다. 제국군은 곧장 노르망디에 상륙한 게 아니라 브르타뉴에 상륙한 뒤 앙주로 우회해서 노르망디를 공격했다.
문제는 신성 로마 제국이 대규모 병력을 상륙시킨 걸 보고 눈이 뒤집힌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주가 따지기 위해 갔다가 제대로 된 대답도 듣지 못하고 쫓겨났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에 대해 자신이 따지자 사자공은 노르망디를 빠르게 공격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며 이해해 달라고만 했을 뿐이다.
거기에 더 웃긴 건 적반하장으로 오히려 존 왕의 손에 들어가 있던 노르망디를 자신들이 탈환해서 다시 프랑스에 되돌려주는데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나왔다는 점이었다.
당연히 앙주와 브르타뉴의 영주들은 피가 거꾸로 솟아서 자신에게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선 안 된다고 실시간으로 따지고 있는 게 현 상황이었다.
하나 궁금한 건, 이쪽에다 미리 얘기를 했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해줬을 텐데 왜 저렇게 거친 방법을 썼느냐는 점이었다.
애초에 야만인이었던 용담공이라면 몰라도 산전수전 다 겪고 죽을 위기까지 넘긴 노회한 사자공이 브르타뉴와 앙주의 영지를 밟으면 마찰이 생긴다는 걸 모를 리가 없잖은가.
어쩌면, 사자공과 라그나르는 자신들을 떠볼 속셈인지도 몰랐다. 본인들이 잉글랜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가 뒤를 치면 완전히 고립되는 게 아니던가.
그러니, 일부러 무례한 짓을 해서 이쪽의 반응을 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그 과정에서 건수가 하나 걸리면 그걸 명분 삼아 쳐들어올지도 모를 일이었고.
헛된 망상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뜬금없이 웨식스 왕조의 후계자까지 찾아 잉글랜드를 조지는 놈이, 이런 먹음직스러운 명분을 두고 그냥 넘어가겠는가.
“그렇습니다. 저희는 어디까지나 왕국을 침범한 침략자들을 몰아내기만을 원할 뿐입니다. 그를 위해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손을 잡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 프랑스가 굳이 전쟁에 뛰어들 만한 연유가 없지 않은가. 전쟁을 해서 잃을 건 많지만 얻을 건 없다네.”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잉글랜드의 변경백은 숨도 쉬지 않고 따박따박 대꾸했다.
“필리프 전하. 저희 전하께서는 참전에 대한 대가로 노르망디와 아키텐을 포기하고 다시 프랑스에 돌려주기로 하셨습니다.”
얼핏 들으면 통 큰 제안처럼 보이는 그 말에 필리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아키텐과 노르망디의 반환이 뜻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명분의 상실.
지금껏 필리프가 사자공이 깽판 치는 걸 바라만 보고 있던 건 이랬거나 저랬거나 노르망디가 존 왕의 영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존 왕은 그 노르망디를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군이 내세운 노르망디의 탈환이라는 명분을 퇴색시키기에 충분했다. 애초에 저들은 강제로 노르망디를 점거하고 있는 게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 와서 저들에게 노르망디에서 물러나라고 하면 저들이 얌전히 물러나겠는가? 결국 저들이 노르망디를 점거한 건 그곳이 영국으로 건너가기에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북해를 곧장 가로지를 수도 있지만… 머리가 있다면 그러진 않을 것이다. 편안하고 안락한 길을 내버려 두고 험지를 갈 이유가 없잖은가.
아무튼, 존 왕은 승부수를 띄운 것이다. 노르망디와 아키텐을 포기하면서까지 프랑스를 끌어들이기 위해 발악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영지 포기 선언을 들은 이상 자신은 무언가 액션을 취해야 했다. 이대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고 계속 방관만 한다면 다른 귀족들에게서 좋은 소리를 듣기는 힘들 것이다.
결정적으로 앙주와 브르타뉴의 영주들은 존 왕의 편에 서 있다가 자신의 편으로 돌아선 지 얼마 안 되는 영주들이었다.
아직 왕권이 약한 자신이 그들의 요청을 마냥 무시하는 것도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존이 큰 결단을 했군.”
“그렇습니다. 허니 필리프 전하께서도 부디 심사숙고하셔서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알겠네. 일단은 말로 권고해보도록 하겠네.”
“전하. 저들은 말로 해서 들을 이들이 아닙니다! 저 짐승 같은 놈들에게는 몽둥이가 약입니다.”
“진정하게. 애초에 전쟁을 하고 싶어도 이쪽이 준비할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나? 설마 시간도 주지 않고 지금 당장 전쟁을 해 달라는 건 아니겠지?”
“으음, 그건 아닙니다만… 지난번처럼 전하께서 저울질을 하는 일이 없기를 빕니다.”
허나 자신의 말이 미덥지 못했는지 궁정백은 브르타뉴 공작이었던 아서와 존을 저울질했던 일까지 언급했다.
“물론일세. 상식적으로 내가 왜 침략자의 편을 들겠나? 그리고 애초에 명분도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그건 그렇습니다만 언제는 바이킹들이 명분이 있어서 노략질을 해댔습니까?”
그걸 같은 바이킹이 할 말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어쨌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땐 힘을 보여줘야 하지 않겠나? 다만 나는 어디까지나 자위권에 한정해서만 병력을 일으킬 걸세. 이 점은 확실히 해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허면 존 왕 전하께는 전하께서 제안을 수락하셨다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그에게 너무 늦게 답을 해줘서 미안하다고 전해주게.”
그렇게 궁정백이 떠나가자 필리프는 피곤한 얼굴로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사실 필리프는 적당히 노르망디로 병력을 끌고 가서 농성만 하고 올 생각이었다.
몇 번이나 얘기했듯 저들을 공격해봤자 이득 볼 게 하나도 없었다. 다만 프랑스의 전 영토가 다시 자신의 손 아래 들어온 이상 어느 정도 액션은 취해줘야 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필리프는 사자공과 라그나르에게 특사를 보낼 생각이었다. 이쪽의 사정을 상세히 적어서 보낸다면 그들도 작금의 사태를 이해해 주지 않겠는가.
* * *
<잉글랜드 – 맨섬>
“주요 거점치고는 방비가 너무 허술한데?”
라그나르는 아일랜드와 잉글랜드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을 공격하며 중얼거렸다. 서울특별시만 한 굉장히 크면서도 중요한 거점이었지만 이곳의 방비는 형편없었다.
“여기에까지 병력을 주둔시킬 여력이 없다는 말이겠지요.”
힐데가 지극히 당연한 정론을 얘기하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저쪽이 안 쓰면 우리가 써줘야지.”
맨섬은 부산과 후쿠오카 사이에 있는 대마도와 비슷한 섬이었다. 즉, 지리적으로 엄청나게 중요한 요충지라는 얘기였다.
그 때문에 이곳을 전진기지 삼는다면 웨일즈 지역의 북부를 침공할 수 있었다. 아니면 노섬브리아를 타격해 하랄의 군대와 합류할 수도 있었고.
“그런데 라그나르.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왜 굳이 사자공 전하께 강압적으로 노르망디를 공격해달라고 주문했습니까? 필리프가 처한 상황을 봤을 때 적당히 꼬드기면 좋다고 노르망디를 조차해줬을 텐데요.”
날카로운 힐데의 말에 라그나르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일부러 프랑스에게 시비를 걸기 위해서 그런 거라고 어떻게 얘기하겠는가?
예로부터 영국과 프랑스는 오랜 앙숙이었고 영국의 힘이 약해지면 프랑스의 힘이 강해지는 건 진리와도 같았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고.
그러니 자기가 영국을 조지면 프랑스가 강대해질 건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필리프 2세는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명군이었다.
그 둘의 시너지가 합쳐지면 어떻겠는가? 나폴레옹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 프랑스는 저력이 있는 국가였기에 미리 밟아둘 생각이었다.
자신이 힘들게 이룬 것들이 타인에 의해 무너지는 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잖은가?
다만, 그녀에게 진실을 곧이곧대로 얘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라그나르는 신의 이름을 팔아먹기로 했다.
“그게 오딘의 뜻이었거든(DEUS VUL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