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9화
아르단은 혼자서 적의 전열을 붕괴시키고 박살 내다 못해 기병들까지 무력화시키고, 그것도 모자라 에르윈까지 사살하는 라그나르의 모습에 침을 삼켰다.
솔직히 전투의 승패가 기울어지면서 이곳이 자신이 무덤이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참전으로 패전은 승전이 되었고 자신은 살아남았다.
그렇게 전투를 승리로 이끈 당사자인 라그나르는 히죽거리는 얼굴로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떤가? 아르단. 이 정도면 날 증명하기에 충분한 것 같은데.”
충분했냐고? 충분하다 못해 바닥으로 넘쳐흐를 정도였다. 대체 어떤 인간이 혼자서 전투의 흐름을 바꾸고 승리로 이끈단 말인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 그게 가능했던 건 오직 잉글랜드의 사자심왕 리처드뿐이었다. 그렇기에 그가 리처드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조소했던 건 사실이다.
거기에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인물에 대해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하나같이 허무맹랑한 것들이었다.
단신으로 하이르 앗 딘을 베었다느니, 홀로 베네치아의 함선에 뛰어들어 적장을 사로잡았다느니, 언제나 전장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느니 등등.
그가 한 일은 목숨이 여러 개라도 하기 어려울 법한 업적들이었고 그렇기에 음유시인들이 적당히 과장을 한 거라 생각했다.
원래 그치들이 하는 건 사람들의 흥미가 동하도록 적당히 이야기를 과장시켜 노래하는 것 아니던가.
하지만 오늘 그가 보여준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왜 그의 별명에 용담공이라는 별명이 붙었는지, 그를 욕하는 이들조차 그의 실력을 폄훼하지 못하는지 알 수 있었다.
“설마 아직도 부족한가?”
자기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부족하다고 생각한 건지 그가 다시 한번 물었고 자신은 곧바로 그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용담공 전하. 그간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상한 일이다. 자신은 왜 대체 저런 사내를 보고 건방을 떨었던 거지? 그는 신성 제국의 공작이었다. 반면 자신은 유럽의 변방에 힘도 없는 얼스터의 허수아비 왕에 불과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봤을 때 누가 아쉬운지는 명확했지만, 본인은 마치 자기가 갑이라도 된 것처럼 행동했다. 그에게 반말을 하고 맞먹으려 했으며 그의 도움을 당연한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힐데가르트 고드윈의 친척이 아니었다면 그에게 선택받을 일이 있었을까? 애초에 자신과 그의 연결고리는 너무 빈약했다.
자신의 조카가 섬기고 있는 주군. 그게 자신과 라그나르의 연결 관계일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남이나 다를 게 없는 관계였다.
비록 힐데가르트 고드윈이 자신의 조카라지만 웨식스의 고드윈 가문이 몰락할 때 자신이 도와준 것도 아니고 그 이후로도 거의 얼굴을 못 보고 살았으니까.
그런데 자신은 대체 뭘 믿고 그에게 그리 오만불손하고 건방지게 굴었단 말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고 주워 담을 수 없으니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관계를 정립해야 했다.
어쨌건 그는 자신이 아르드리가 되기를 원했고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는 한 자신을 버리진 않을 테니까.
* * *
“푸하하하, 갑자기 안 어울리게 웬 존댓말인가?”
뜬금없는 아르단의 존댓말에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안절부절못하면서 내 눈치를 보는 아르단을 보니 왜 제갈량이 맹획을 상대로 칠종칠금을 했는지 알 것 같다.
사실 칠종칠금의 일화는 어렸던 내게 이 이상 없을 고구마였다.
관푸치노가 손제리에게 죽고, 장비가 어이없이 암살당하는 고구마도 참았다. 그리고 믿었던 유비조차 육가 놈의 캠프파이어에 당해서 화병으로 죽는 걸 보고 책을 집어 던지기도 했다.
하지만 제갈공명이 있었기에 다시 책을 집어 들었는데 위나라와의 결전을 앞두고 웬 이름도 못 들어본 떨거지를 일곱 번이나 놓아주는 걸 보고 읽는 내가 화병이 날 정도였다.
그냥 잡아서 목을 자르면 그만인데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제갈량은 사실 마조히스트였단 말인가? 하지만 내가 제갈량과 같은 입장이 돼보니 알 것 같았다.
일단 타국인인, 그것도 바이킹이라 반감이 가득할 터인 내가 주도적으로 아일랜드를 통일시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일제 강점기에 왜 일본은 본인들이 주도적으로 나서지 않고 친일파들을 앞장세웠겠는가? 또, 만주를 점령할 때도 자신들의 깃발을 꽂는 대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겠는가?
거기에 최종적으로 영국의 통일이 목적이라고 해도 이건 한 번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땅에서 살던 여러 민족들을 대상으로 하나의 국가를 만들기 위해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 그때까지는 자치를 주되 속국이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통합해나가야 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중동이랑 아프리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자기들 멋대로 문화도 가치관도, 종교도 다른 놈들을 한군데 모아놓으니까 허구한 날 전쟁과 내전이 터지지 않던가.
요점은 바이킹인 내가 주도해서 뭔가를 하면 상황이 악화된다는 말이었다. 그렇기에 일단 나는 아르단을 얼굴마담으로 쓰기로 했고 이비를 통해 그에게 몰래 작업을 쳤다.
작업을 친다고 해도 두들겨 패서 세뇌를 시키거나 뭐 그런 건 아니었다. 약물을 통해서 이성을 억제시키고 조금 더 감정적으로 변하게 만들고… 뭐 그런 것들이었다.
물론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복용시켰다. 나와 만나고 난 뒤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바뀌면 안 좋은 소문이 나돌지 않겠나.
그리고 지금, 약물의 효과도 떨어져 가고 자신의 두 눈으로 내 실력을 보고 나니 암시가 풀린 모양이었다.
아마 본인은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기억이 희미하겠지. 별다른 부작용도 없으니 잠시 자신이 쓸데없는 자신감에 취했었다고 생각할 거다.
“죄송합니다. 용담공 전하. 제가 잠시 뭔가에 씌었던 것 같습니다. 부디, 그간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딱히 무례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걱정할 필요 없네. 오히려 신선해서 좋았다네. 아무튼, 이후 뒷마무리는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게.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물론입니다.”
솔직히 내가 볼 때 다른 이들에 비하면 많이 부족했지만 아르단은 그래도 나름대로 능력이 있었는지 전장을 빠르게 수습했다.
“후우, 생각보다 빠르게 끝나서 다행이네.”
기지개를 켜며 피곤을 풀고 있자니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힐데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곁에 주저앉았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람 하나 죽었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습니까?”
총대장 에르윈의 죽음. 그것 하나만으로 적들은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고 전투는 지금까지 질질 끌었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는 ‘어? 고작 사람 하나 죽었다고 저러는 게 말이 돼?’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역사를 바라봤을 때 총대장이 죽자 병력을 물린 사례는 생각보다 많았다.
먼저 촉과 위나라 사이에서 벌어졌던 정군산 전투. 황충이 하후연을 때려잡자 위나라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철군해서 밀프헌터가 올 때까지 대기했다.
그리고 3차 십자군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신성로마제국의 십자군은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가 원정을 가다가 강물에 빠져 죽자 그대로 퇴각했다.
임진왜란 때도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은 전부 철군했다.
굳이 전쟁에만 국한할 것도 아니다. 회사에서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수뇌부가 바뀌면 무산되는 경우도 많지 않던가?
그거랑 똑같은 얘기였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아르단의 침공에 맞서 싸우기로 한 건 에르윈이었고 잉글랜드를 끌어들인 것도 에르윈이었다.
근데 그 당사자가 죽어버렸다. 그럼 그 이후에 일어날 일은 누가 책임진단 말인가? 어차피 병사들이야 그냥 높으신 양반들이 싸우라고 하니까 끌려 나온 것에 불과하다.
귀족들도 별반 다를바 없었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섞여 있긴 하지만, 결국 그들도 크게 보면 왕이 싸우자고 하니까 싸운 것이다.
문제는 이렇게 갑작스럽게 왕이 사망하게 되면 상황이 엄청나게 복잡해진다는 점이었다. 우선 에르윈 사후 누가 다음 왕위를 이어받을 것인가?
만약 새롭게 왕위에 오른 사람이 얼스터와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면? 얌전히 아르단을 아르드리로 섬기는 선에서 전쟁을 끝내려 한다면?
전쟁에 대한 적절한 보상으로 전투에서 끝까지 싸웠던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면? 성난 아르단이 공격하는데 도와주지 않고 묵인해버린다면?
이처럼 괜히 끝까지 싸우다가 미운털 박혀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은 바로 무장해제하고 투항해버리는 것이다. 중세 기준으로 이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당장 원역사에서도 앙주 지역의 영주는 존 왕과 필리프 2세 사이에서 존 왕의 편을 들어 싸우다가 존 왕이 자기를 홀대하니 필리프 2세의 편을 들지 않았던가.
거기에 아르단 역시 랜스터에 이들을 다 몰살시키기 위해 온 건 아니었다.
아르드리가 되고 싶다면서 적대국의 영주와 귀족들을 몰살시키는 건 짜장면을 먹고 싶다면서 중국집을 불태우는 것과 마찬가지인 행위였으니까.
아무튼, 각 귀족들은 앞다퉈서 아르단에게 투항했고 아르단은 그들의 투항을 받아들이면서 재빠르게 잉글랜드의 기병과 장궁병들도 포로로 붙잡았다.
물론 포로로 붙잡았다고 해서 치욕을 주거나 하는 행위는 없었다.
병사들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감시를 받으며 일정 시간 노역을 하는 것만 제외하면 크게 터치받지 않았고 귀족들은 포로라기보다는 오히려 귀빈 대접을 받으며 지냈다.
아르단은 아르드리가 되기 위해선 랜스터의 지지가 필수였기에 그들에게 잘 대해주었고 그들 역시 아르드리가 될 아르단과 친하게 지내서 나쁠 게 없었다.
그렇게 서로의 이해관계가 일치하자 이들은 더블린으로 진군하는 동안 친목질을 하면서 친분을 쌓았다. 개중에 몇몇은 내게도 큰 관심을 보였는데 나는 적당히 응대해주었다.
어떻게든 나와 연결고리를 만들어보겠다고 저렇게 애를 쓰는데 냉정하게 내치는 것도 불쌍하지 않은가.
이전에는 내가 귀족들의 비위를 맞춰줬는데 이제는 귀족들이 내 눈치를 보며 살살 비위를 맞춰주는 걸 보니 새삼 감개무량해졌다. 많이 컸구나! 라태식이!
“주군. 그나저나 잉글랜드의 포로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계속 더블린에서 붙잡고 있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이비의 말에 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곧장 아일랜드의 지원을 받아 잉글랜드를 침공하고 싶어도 당분간은 전쟁으로 인한 혼란을 잠재우고 내부 단속에 시간이 걸릴 터였다.
그러니 일단은 주변의 상황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잉글랜드나 다른 7왕국, 그리고 스코틀랜드가 어떻게 나올지도 확인해봐야 할 테고.
“그냥 풀어줘. 배 한 척에 태워서 보내주면 알아서 가겠지.”
“알겠습니다. 무장은 전부 다 해제시킬까요?”
“당연하지. 살아서 돌아가는데 목숨값은 지불해야 되지 않겠어?”
당연한 얘기겠지만 200명을 무장시키는 데 드는 비용은 천문학적이었다. 당장 현대 기준으로 200명의 무기와 장구류를 보급한다고 생각해봐라.
심지어 열댓 명은 장갑차를 잃어버리고 왔다고 하면 얼마나 속이 터지겠는가? 아마 내가 행정보급관이었다면 게거품을 물면서 쓰러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 가는 길에 내가 쓴 편지도 한 통 가져가라고 하고.”
* * *
<잉글랜드 – 웨일즈 리버풀 지역>
존 왕은 지금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아르드리가 될 테니 도와달라던 놈은 죽어서 변사체가 돼버렸고 뜬금없이 제국의 용담공. 라그나르가 아일랜드를 먹어버렸다.
거기에 큰 출혈을 감수하고 보낸 지원병들은 홀딱 벗겨져서 되돌아왔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무기고 방어구고 보급품이고 뭐고 할 것 없이 전부 빼앗긴 채 돌아왔다는 말이었다.
그것도 모자라 그는 웨식스 왕조의 마지막 남은 후계자의 후견인을 자처하며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했다.
“하… 하하… 감히 야만인 따위가!!!”
따지고 보면 그 자신도 야만인의 핏줄이 흐르고 있었지만 반쯤 눈이 돌아간 존 왕에게는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사자공이랑 하랄 블로탄이 뜬금없이 공격해 오는 것도 이것 때문이었군.”
이제야 이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됐다. 하랄 블로탄이야 뭐 근본이 천한 바이킹이니 그렇다 쳐도 사자공이 노르망디를 점령하고 켄트를 공격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내 왕국을 이렇게 만든 것도 그 야만인 자식이 사주한 거겠지.”
내부의 반란으로 잉글랜드 왕국은 쪼개졌고 자신은 살기 위해 웨일즈 지방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잉글랜드가 쪼개진 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실정 때문이었지만 존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실패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것보단 남 탓을 하는 게 더 편했으니까.
“어디 세상일이 네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알게 해주마.”
라그나르를 생각하며 이를 갈던 존 왕은 곧바로 펜을 가져와 글자를 적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