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으흐흐, 오랜만에 피가 끓는군.”
내가 직접 전장에 나서는 건 거진 반년 만이었다. 사실 공작위에 오르고 난 뒤로는 내가 직접 앞장서서 두들겨 패기보단 정치적으로 일을 해결했던 것 같다.
내가 굳이 병력 끌고 가서 두들겨 패는 것보다 상대에게 ‘털리기 싫으면 알아서 잘해’라는 편지 하나를 보내는 게 더 빨랐다.
물론 그렇게 해도 말을 안 들으면 두들겨 패줘야겠지만, 대부분은 말을 들었다. 다들 목 위에 있는 게 장식이 아니라면 내 권력에 대항할 리가 없을 테니까.
날 두고 무식한 야만인이라느니, 야만공이라느니, 바이킹이니 욕할지언정 신성 제국 내에서 내 권력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여기는 외국이었고 제국에 비하면 내 영향력은 그리 크지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담공이라는 이름을 무시할 순 없을 테지만 난 굳이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힘숨찐이나 뭐 그런 게 아니라 아르단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선 한번 박살을 내줄 필요가 있었다. 거기에 오랜만에 전장에 나왔는데 제대로 손맛을 봐야 하지 않겠나?
“오딘이시여. 나를 이끄소서.”
이제는 굳이 긴 기도를 읊을 필요도 없었다. 그저 내 믿음을 보이는 것만으로도 내 몸 안에서는 막대한 신성력이 휘몰아쳤다.
“라그나르. 적의 기병들이 우회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적이 퇴각할 시간을 벌어주려는 것 같습니다.”
최선두에서 후스카를들과 함께 적들을 도륙하고 있자니 힐데가 메이스를 어깨에 걸친 채로 내게 다가와 보고했다.
“흠… 일단은 잉글랜드의 기병들이니 죽이는 것보단 사로잡는 게 낫겠지?”
물론 차후에 잉글랜드도 복속시킬 생각이긴 했지만, 굳이 첫 단추부터 잘못 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아무리 힐데가 웨식스 왕조의 후계자라고 하더라도 노르만 왕조의 입장을 대변할 이는 있어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게 무능하기로 소문난 존이라면 허수아비로 써먹기 딱 좋았다. 위나라의 쓰마이가 촉의 마지막 황제였던 유선을 안락공으로 봉한 뒤 살려뒀던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예. 죽이는 건 언제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20대 초반의 여자가, 그것도 성녀라고 불리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이미 나도 그렇고 그녀도 그렇고 직접 발할라로 보내준 이들이 수백이었다.
심지어 얼마나 상대의 골통을 박살 냈는지 그녀의 메이스는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거기에 갑옷에 흩뿌려진 적의 피는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뭘 그렇게 보고 있습니까? 설마 전쟁 중에 발정이라도 난 겁니까? 적어도 전투를 마무리 지을 때까지는 기다려주십시오.”
대놓고 섹드립을 치는 힐데의 모습에 나는 당황한 얼굴로 대답했다.
“누가 들으면 내 머릿속에 섹스하는 것만 들어있는 줄 알겠네.”
“아닙니까? 며칠 전에도 저와 이비가 엉엉 울면서 제발 그만하라고 빌어도 귀축처럼 저희를 유린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3P라니… 아후라마즈다께서도 통탄을 마지않을….”
나는 그녀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서둘러 말을 돌렸다. 이런 대화가 다른 이들에게 새어 나가면 이게 무슨 개망신이란 말인가.
아무리 내가 얼굴에 철면피를 깔았다지만 내 성적 취향을 다른 이들에게 동네방네 자랑하는 취미는 없었다. 얘기하기 자랑스러운 취향도 아니고.
“…그보다 어디 다친 곳은 없지? 피가 너무 많이 묻은 것 같은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평생을 돌이켜봤을 때 제가 피를 흘리게 만든 건 당신밖에 없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싶었던 나는 이내 히죽 웃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 헛웃음을 지었다. 힐데가 말하는 피가 뭘 뜻하는 건지 떠올렸으니까.
“아무튼, 기병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동안 전 적의 남은 본대를 무너뜨리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내 곁을 떠났다. 물론 나는 떠나가는 힐데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오늘 밤은 제발 그만해달라고 엉엉 울어도 절대 놔주지 않을 거다. 기절할 때까지 혼내줘야지.
* * *
“어찌…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랜스터의 쿠어거, 에르윈은 지금 현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모든 상황은 자신의 통제하에서 옥구슬 구르듯 아주 부드럽게 잘 흘러갔다.
존 왕은 지원병을 보내줬고, 랜스터 내의 영주들도 침입자를 몰아내겠다는 의지로 결속됐으며, 얼스터와 코노트의 뒷공작도 성공했다.
즉, 이번 전투만 승리한다면 얼스터와 코노트는 자치를 대가로 자신에게 복종하기로 미리 얘기가 되어 있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코노트야 당연히 점령군인 얼스터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을 테고 얼스터 역시 왕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아르단이 쿠어거를 칭하며 활개를 치고 나가니 반발하는 이들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전투? 전투도 문제없었다. 드로그헤다에서 저들의 주둔을 묵인한 건 괘씸했지만 자신도 잘못한 부분이 있으니 그를 문제 삼을 순 없었다.
거기에 아르단이 그곳에서 사흘 정도 머물러준 덕에 이쪽에서도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그 결과 제한 시간 내에 델빈강에 방어진을 구축할 수 있었다.
물론 더블린으로 가는 길이 여기만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쪽에서도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상대를 스토킹할 수 있는 데다 빙빙 돌아갈수록 지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저들이었다.
어찌어찌 자신들의 눈을 피해 더블린으로 진군한들 양쪽에서 공격을 받게 될 테니 결국 저들은 이곳에서 자신들과 야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자신은 모든 변수를 통제했고 적에게 원치 않는 선택지를 강요했다. 그리고 고심하던 적은 강을 건너서 전투를 한다는 최악의 선택지를 택했다.
물론 그 선택을 이해는 한다. 이기기만 하면 모든 걸 차지할 수 있으니 도박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강을 건넌 거겠지.
하지만 아르드리는 결코 도박 따위로 딸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그리고 그렇게 가벼운 마음가짐으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오직 준비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게 바로 에린(아일랜드)의 지고왕. 아르드리다.
허나 아르단은 아르드리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고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했다. 잉글랜드의 중기병들과 함께 압박을 가하니 저들은 삽시간에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자신은 적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결코 흥분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깨문다고 하지 않던가. 그 사실을 상기하며 천천히 적들의 군세를 갉아먹었다.
덕분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 이제 기나긴 전투의 마지막을 장식하기 위해 예비대까지 총동원해 돌격을 감행하려 할 때, 후방에서 우렁찬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우우우우우웅!!!
“저게 무슨 소리인가?”
“적… 적인 것 같습니다. 얼스터에서 저희의 후방에 별동대를 보낸 것 같습니다.”
“으음, 아군이 동요하지 않게 서둘러 제압해야겠군.”
상상하지도 못한 곳에서 적이 튀어나오자 당황스러웠지만 그뿐이었다. 아르단은 나름대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별동대를 투입한 모양이었지만 자신이 볼 때는 오히려 악수였다.
일단 그 수도 너무 적었고 이미 본대가 무너지기 직전인데 별동대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오히려 둘로 나뉘어 각개격파를 당할 뿐이었다.
그렇게 죽을 자리인지도 모르고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그들을 보니 동정심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무언가가 이상한 걸 느낀 건 그들에게서 휘날리는 깃발을 보고 난 이후였다.
포효하듯 두 날개를 편 채 울부짖는 모습의 까마귀가 그려진 깃발, 그리고 쌍두 독수리.
일단 저 쌍두 독수리는 누구나 익히 알고 있는 문장이었다. 유럽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거대하며 동로마와 함께 로마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유이한 제국.
그런 제국의 깃발이 왜 변방 중의 변방인 이곳 아일랜드에서 휘날리고 있단 말인가? 설마 아르단이 그들의 지원을 받았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저 아군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아르단이 적당히 거짓말을 친 거겠지.
애초에 신성로마제국이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이곳 아일랜드까지 오겠는가. 과거 로만브리튼 시절에도 아일랜드에는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았다.
그리고 저 까마귀를 가문의 문장으로 쓰는 건 오직 신성로마제국의 용담공밖에 없었다. 상식적으로 공작씩이나 되는 양반이 여기에 올 연유가 없잖은가.
그렇게 생각하자 차올랐던 불안함이 사그라들었지만, 뒷맛이 찝찝했기에 별동대부터 서둘러 치워버리기로 했다.
“부관. 병력을 일부 돌려서 저 별동대부터 치워버리게.”
“알겠습니다.”
그렇게 저들을 치우는 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건만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됐다. 끌고 간 예비대는 강판에 갈리듯 적과 부딪히자마자 살살 녹아내렸다.
병력끼리 부딪히면 서로 진형을 유지한 채 싸우지 않던가? 그게 전술과 전쟁의 기본이었다. 난전이 되더라도 얼마나 빠르게 전열을 정비해서 싸우느냐가 관건이었고.
하지만 저들은 아군의 병력이 허수아비라도 되는 것처럼 종횡무진으로 돌파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죽어 나가는 건 아군의 병력뿐이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다급해진 에르윈은 잉글랜드의 중기병대를 소환해서 아군과 함께 저들을 막아줄 것을 요청했다. 요청을 받은 기병대의 지휘관은 한심하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봤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만약 눈앞의 병력이 정말 용담공의 직속 병력이고 저 사내가 용담공이라면… 남은 병력을 총동원해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반면 중기병이라면, 평지에서 무적이라고 불리는 그들이라면 그를 붙잡아 둘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르윈의 기대와 잉글랜드의 기병대가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가장 최선두에서 아군의 피를 흠뻑 뒤집어쓴 근육투성이의 사내는 기병들을 향해 들고 있던 창을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사내의 투창술은 아일랜드 신화에 나오는 쿠훌린을 연상시킬 정도로 뛰어났는데 그의 창날이 번뜩일 때마다 구슬픈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기사들이 볼품없이 굴러떨어졌다.
그렇게 삽시간에 10기가 넘는 기병이 무력화되자 전장에는 정적이 흘렀다. 이게 말이 되는가? 어떻게 저런 창으로, 50m가 넘는 거리에서, 마갑을 뚫고 창을 꽂을 수 있단 말인가? 저게 정녕 사람이란 말인가?
하지만 그 엄청난 일을 해낸 사내는 그걸로 부족했는지 짙푸른 안광을 빛내며 포효했다.
“에르윈!!! 랜스터의 쿠어거여! 그대가 겁쟁이가 아니라면 나와서 내 검을 받으라!”
가장 최선두에 선 자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에르윈은 저도 모르게 머리칼이 쭈뼛 섰다. 그리고 동시에 상대의 정체를 확신할 수 있었다.
용담공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그 괴물 같은 힘과 능력으로 제국의 공작에 올랐으며 황제라는 타이틀만 없다 뿐이지 황제와 같은 권력을 휘두르는 게 바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였다.
오죽하면 바다를 두 번이나 건너야 할 정도로 먼 이곳까지 사내의 위명이 들려오겠는가. 문제는 왜인지 몰라도 그런 사내가 자신을 적대하고 있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사내의 창끝이 정확히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에르윈은 체통도 잊고 겁에 질려 자신의 말에 올랐다.
“저, 전군 퇴각한다.”
갑작스레 허둥대며 밑도 끝도 없이 퇴각을 입에 담는 에르윈의 모습에 주변의 장수들이 당황한 얼굴로 그를 말렸다.
“주군. 진정하십시오. 적들의 기세가 놀랍기는 하지만 이미 적의 본대를 다 밀어붙였습니다. 예비대로 저들을 막는 사이 남은 병력으로 아르단을 먼저 사로잡는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이런 멍청한 자식들. 저자는… 저자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다. 신성 제국의 용담공이라는 말… 커헉!”
하지만 에르윈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어디선가 날아온 창이 정확히 에르윈의 심장을 꿰뚫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