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77화 (177/205)

▣ 177화

아일랜드가 그렇게 큰 땅도 아니고 얼스터의 수도인 벨파스트부터 랜스터의 수도인 더블린까지는 돌아가는 걸 감안해도 채 200km가 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2주 만에 랜스터와 평원에서 대치했다.

고작 200킬로 가는데, 그것도 양쪽에서 진군하는데 2주나 걸리는 게 말이 되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의외로 이게 말이 된다.

일단 병력들 대부분이 장거리 이동을 경험해보지 않은 데다 오전에 조금 걷다가 밥 먹고, 다시 걷다가 대여섯 시만 돼도 다시 저녁 먹고 야영할 준비를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행군을 해보면 알겠지만 엄청 피곤하다. 그런데 잠까지 허리 아픈 땅바닥에서 잔다? 병력들의 상태가 시간이 지날수록 병신이 돼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 이거 빼고 저거 빼고 하면 하루에 순수하게 이동할 수 있는 시간은 채 5시간이 되지 않았다. 이러다 보니 하루에 10km를 행군하면 무난하게 잘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이것도 아무 문제 없이 행군할 때나 해당되는 얘기고 중간에 비라도 와서 진창이 된 도로를 통과하거나, 간 큰 도적 새끼들이라도 만나면 일정이 세월아 네월아 늘어질 수밖에 없었다.

진군하는 것만으로 이렇게 진이 빠지니 아르단이 먼스터는 그냥 소 닭 보듯 넘어가겠다는 거겠지. 물론 배를 이용해서 훨씬 더 빠르게 이동할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더블린에 상륙하는 건 불가능했다.

일단 얼스터가 해군을 운용할 수 있을 만큼 능력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해군이라는 게 육군을 배 위에 태운다고 해군으로 변모해서 잘 싸우는 것도 아니잖은가.

그랬으면 호표기라는 기병을 만들 정도로 진성 말박이었던 조조가 적벽에서 ‘따흐흑. 곽푸치노가 살아 있었다면….’ 하면서 피눈물을 흘릴 일도 없었겠지.

“아르단. 병력들의 상태는 어떤가?”

“자네 말대로 드로그헤다에서 사흘 정도 푹 쉬어서 그런지 나쁘지 않네. 사기도 괜찮고.”

확실히 병력들은 며칠 전만 해도 오랜 행군으로 다 죽어가는 얼굴이었지만, 며칠 쉬어서 그런지 혈색은 나쁘지 않았다.

하긴, 푹신한 침대에 따뜻한 음식을 먹고 긴 휴식을 취하면 무너졌던 몸의 리듬도 어느 정도 돌아오겠지.

“떠나기 전에 드로그헤다의 영주에게 감사 인사나 한 번 더 하게. 그의 입장에선 우리를 받아주는 것도 그 나름의 모험이었을 테니까.”

사실 드로그헤다는 엄밀히 말하면 랜스터에 속한 땅이었는데 랜스터의 수도인 더블린과 거리가 채 50km도 되지 않았기에 전진기지로 삼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그 때문에 나는 무조건 가는 길에 저곳을 함락시킬 생각이었다. 나름 크긴 했지만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내부를 지키는 병력의 수는 채 백 명이 되지 않았다.

물론 근처의 자경단을 끌어모은다면 수비 병력의 숫자를 좀 더 늘릴 수 있겠지만 자경단이라고 해봤자 동네 양아치들과 술주정뱅이들을 상대했던 경험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창과 방패를 쥐여주고 최일선에서 싸우라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였다. 그걸 드로그헤다의 영주라고 모를 리가 없었기에 그는 눈치 빠르게 우리에게 전령을 보냈다.

자신의 입장이 입장인 만큼 성 내에는 들일 수 없지만, 드로그헤다 근처의 마을에서 묵는 건 묵인하겠다는 게 그의 뜻이었다.

처음 그 편지를 받고 난 뒤 나와 아르단은 고민했다. 이 편지를 믿고 가야 하는가, 아니면 무시하고 드로그헤다를 공격해서 점령해야 하는가.

하지만 의외로 선택은 간단했다. 점령으로 인해서 얻게 되는 득보다 실이 더 컸기에 우리는 영주의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했는데 우선, 아무리 적의 숫자가 적다고 해도 공성전을 하기에는 부담스러웠고 긴 행군으로 병력들의 피로가 쌓여 있었다.

거기에 상대측에서 자존심을 굽히고 양보를 했는데도 그를 무시하고 조졌다는 소문이 퍼지면 추후 아르단이 아르드리가 되어 국가를 다스릴 때 두고두고 발목을 붙잡을 터였다.

이쪽에서 자신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자 그는 대놓고는 아니더라도 식량과 물자를 몰래 지원했고 우리는 눈치껏 가져온 군자금 중 일부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현대 기준으로 보면 이완용도 손가락질할 매국에 배신행위였지만 중세 기준으로 보면 특별할 것도 없는 행동이었다.

모든 영주들이 왕에게 진심을 다해서 충성을 바쳤다면 중세시대에 반란이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을 테니까.

거기에 랜스터의 쿠어거인 에르윈에게 종잇장 같은 의리를 지키자고 2천이 넘는 병력과 맞서 싸우는 건 미친 짓이었다.

또한, 영주의 행동에도 나름 명분이 있었는데 왕은 영주의 충성을 받는 대가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그의 영토를 지켜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었다.

하지만 랜스터의 쿠어거인 에르윈은 아르단과의 결전을 위해 휘하 병력들을 더블린에만 끌어모으고 있었다.

이는 랜스터 내의 다른 영토가 공격받든 말든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다. 물론 회전을 위해선 당연히 병력을 결집시켜야 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계약 위반이었다.

즉, 에르윈이 먼저 계약을 어겼으니 영주의 행위도 다소 눈감아줄 수 있는 것이다.

겁쟁이라고 손가락질이야 받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영지가 점령당하고 수탈당하며 본인은 저택에 감금당하는 미래보단 낫지 않겠는가?

“오히려 그냥 조용히 떠나는 게 더 좋은 것 아닌가? 상대도 우리를 암묵적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을 숨기고 싶을 텐데?”

“아니, 이쪽에서 확실히 제스처를 취해줘야 우리 뒤통수를 치지 않을 거야. 다른 이들도 잘 볼 수 있게 성문 앞에 돈과 보물을 두고 가게.”

다른 사람이 봤을 때 정확히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는 몰라도 둘 사이에 뭔가가 있구나 정도의 인식만 심어놔도 충분했다.

그런 상황에서 뒤통수를 친다? 그럼 그의 명예가 가루가 되도록 까임은 물론 신용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끝까지 중립을 지키겠지.

“흐음… 일단 알겠네.”

확신에 찬 어조로 얘기하는 날 보며 아르단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나는 굳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이런 건 내가 가르쳐주는 것보다 스스로 깨닫는 게 더 좋으니까.

그렇게 드로그헤다를 떠난 우리는 계속 진군했고 그사이 앞서 나갔던 정찰병이 적들이 클래시포드 인근에 진을 치고 있다고 보고했다.

“쯧, 선수를 빼앗겼군. 델빈강 때문에 타이밍을 놓쳐서 애매해졌어.”

아르단은 강 건너 진을 치고 있는 랜스터의 군대를 보며 가볍게 혀를 찼다.

“어떻게 할 텐가? 결국, 원정을 나온 건 우리니 이대로 기다리면 말라 죽는 건 우리가 될 것 같은데.”

“그냥 건너면 되지 뭘 고민하나?”

태연하게 얘기하는 내 모습에 아르단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뭐? 저들이 강을 건너는 사이 공격하면 어쩌려고 그러나?”

지극히 상식적인 말이었지만 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러지 않을 거야. 자네가 랜스터의 쿠어거… 에르윈이라고 했던가? 아무튼 그놈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게.”

“…….”

“자네가 에르윈의 입장이라면 어떻게 할 것 같나? 강을 건너는 걸 중간에 공격해서 약간의 이득을 취하는 걸로 만족하겠나? 아니면 강을 건널 때까지 기다린 뒤 한 번에 덮쳐서 모조리 소탕하겠나?”

“으음… 하지만 랜스터는 델빈강을 지키면서 우리가 더블린으로 들어가지 못하게만 막아도 이득 아닌가?”

“이보게 아르단. 자네도 병력을 출병시키는 게 부담되겠지만 그건 저쪽도 매한가지야. 심지어 저쪽은 잉글랜드에게 지원까지 요청했네. 그런데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격퇴에 그쳤다? 당연히 내부에서 말이 나오겠지.”

“결국 본전을 뽑기 위해 우리가 강을 건너는 걸 기다린다는 말인가?”

“맞아. 그리고 애초에 수심이 그렇게 깊은 강도 아니잖나.”

보고에 의하면 제일 깊은 곳도 가슴께까지 온다고 적혀있었다. 얕은 곳을 찾아 건너면 허리춤만 젖는 선에서 건널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마저도 이쪽이 손해를 보는 짓이었지만 전쟁을 수행할 때 손해는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하는 법이다.

“좋아. 그건 자네 말이 맞다고 치자고. 그런데 뒤에 강을 두고 싸우는 게 맞나? 이러면 후퇴도 못 하지 않나?”

“이런 회전에서 후퇴는 곧 전멸이야. 자네는 물론이고 다들 놈들에게도 죽을 각오로 싸우라고 전해. 그리고 강의 수위가 낮으니 필경 도망치는 놈이 나올 텐데 그런 놈들은 바로 즉결 처형하게.”

원래 전쟁터에서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치는 놈들은 즉결 처형이다. 전쟁에 도망치는 아군을 처형하는 독전관이 존재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이런 오합지졸들 사이에서 한번 군기가 흐트러지거나 분위기가 이상해지면 다른 병사들도 동요해서 진영 무너지는 거 순식간이야. 싸우다 죽을지언정 절대 탈주는 없다는 걸 기억하게.”

“으음… 명심하도록 하지.”

“뭐, 너무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지 말게. 등 뒤에 강이 흐르면 적의 기병들이 후방을 급습할 위협도 사라지지 않겠나? 이대로 각 잡고 버티기에는 최고의 조건 아닌가?”

“이런 젠장. 자기 일이 아니라고 쉽게 말하는군.”

“뭘 당연한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이건 자네 일이고 아르드리가 되고 싶으면 이 정도는 알아서 극복해야 해. 아니면 내가 모든 걸 떠먹여 주길 원하나?”

“….”

“물론 원한다면 그렇게 해줄 수도 있어. 하지만 자네는 그 대가로 허수아비가 되어야겠지. 정녕 그걸 원하나?”

“…아니. 나는 얼스터의 왕으로서 당당히 내 힘으로 지고왕의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 눈빛이 살아있었기에 나는 더 이상 추궁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좋아. 그럼 지난 작전 회의 때 얘기했듯 내가 빙 돌아서 적의 후방을 급습할 테니 자네는 서너 시간 정도만 버텨주게.”

“하루 종일이라도 버텨주지.”

“믿음직스럽군. 행운을 빌지.”

말을 마친 나는 내 휘하의 병력을 끌고 본대에서 이탈해 행군 속도를 올렸다. 강까지 건너서 적의 후방을 급습하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할 테니까.

* * *

아르단은 강을 건넌 직후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정신없이 병력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적들은 라그나르의 말대로 자신들이 강을 건널 때까지는 얌전히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후발대까지 강을 건너는 순간 기다렸다는 듯 공격을 가해왔다.

그 첫 시작은 잉글랜드의 중장기병들이었다. 그들의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압박감이 느껴졌다.

압도적인 덩치와 위압감 탓에 마음이 무너져내릴 것 같았지만 라그나르가 몇 번이나 강조했던 것처럼 마차와 수레를 이용해서 임시로 방벽을 설치하자 생각 외로 간단하게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다.

이쪽에서 제법 효과적으로 중장기병을 막아내자 상대는 기병으로 찌르는 것을 포기하고 보병을 진군시켜 몇 차례 전투를 벌였다.

보병 전투는 몇 번 겪어봤기에 처음에는 그럭저럭 잘 싸웠지만, 문제는 전방에서 싸우던 병력의 휴식을 위해 뒤로 퇴각시킬 때 일어났다.

적의 기병들은 본대와 예비대가 교대하는 그 약간의 틈을 노려서 공격해 들어왔고 자신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교대 과정에서 꽤 큰 틈이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병력들은 무리하지 않고 착실하게 아군을 밀어붙이며 피해를 누적시키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상대와의 교환비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저들이 하는 꼴을 보아하니 델빈강 때문에 도망치지도 못하는 거, 무리하지 않고 조금씩 살을 깎아 먹기로 한 모양이었다.

“빌어먹을. 전투 참 야비하게 하는군.”

굳이 저렇게 야비하게 싸우지 않더라도 이미 아군은 한참 전부터 적군에게 밀리고 있었다.

물론 이게 자신의 지휘력이 부족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런 변명은 구차할지도 모르지만, 장비의 차이도 컸다.

거기에 적들은 이곳에서 대기하며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던데 반해 자신들은 행군을 한 것도 모자라 강까지 건너왔기에 체력소모도 적들에 비해 훨씬 컸다.

이처럼 모든 조건과 지표가 자신들의 패배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틸 수 있던 원동력은 라그나르의 존재였다.

그가 적의 후방을 급습하기만 하면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하에 병력들은 기를 쓰고 적의 공격을 버텨냈다.

그렇게 사흘 같은 3시간이 지났을 무렵, 마침내 적의 뒤에서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그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던 지원군임을 깨달은 순간 아르단은 곧장 병력을 몰아쳐 함께 적군을 휘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적군의 상황을 본 그는 이내 지원을 갈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자칭 오딘의 대전사이자 신성 제국의 용담공은 무시무시한 기세로 적을 학살하고 있었으니까.

적의 숫자는 그가 이끄는 병력보다 몇 배는 더 많았지만, 그 누구도 라그나르의 앞길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가 지나는 길마다 시체가 늘어났고 그걸 멍하니 바라보던 아르단은 켈트족 사이에서 전해지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크롬 크루어히. 뒤틀린 어둠이자 수많은 공물을 원하는 죽음의 신이 현세에 강림해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