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전쟁이란 늘 그렇듯 내가 원하지 않아도 벌어지기 마련이다. 사실 전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결국 내가 저놈을 패고 싶거나 누군가 나를 패고 싶으면 일어나는 게 전쟁이었다.
그리고 지금 얼스터는 누구보다 랜스터를 두들겨 패고 싶어 했다. 정확히는 아르단이 아일랜드 통일을 위해 일방적으로 공격하는 모양새였지만, 명분은 충분했다.
아르드리. 아일랜드의 하이 킹(High King). 고작 저 칭호 하나 얻겠다고 전쟁을 일으키는 게 합리적인가는 둘째 치고 명분으로는 차고 넘쳤다.
그도 그럴 게 과거부터 수많은 아일랜드의 쿠어거(국왕)들이 저 칭호에 매료되어 전쟁을 일으켰으니까.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처참한 결말을 맞이했다.
그 증거로 지금껏 아일랜드는 통일되지 못했고, 설사 통일된다고 하더라도 불완전한 통일이었으며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네 개의 국가 중 어느 한 국가가 나머지 세 국가를 압도할 만한 힘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관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건 인구수였고 이는 선천적으로 인구가 희박한 아일랜드에서 뽑아낼 수 있는 병력의 수에 한계가 있음을 의미했다.
해봤자 이삼백? 정말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무리해서 박박 긁어내봤자 오백을 넘기기 힘들었다.
한국에 사는 이들은 옆 나라가 워낙 인구수가 많으니 몇백, 몇천은 우습게 여기는데 사실 이 시기 유럽은 만 단위의 전투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중국이 한 번 싸우다 전투를 말아먹으면 수천, 수만이 죽는 것에 비해 참 대조되는 상황이긴 하지만 그게 현실인 걸 어쩌겠는가.
물론 어거지로 병력을 끌어모을 순 있다. 무슨 소설에 나오는 것마냥 인구가 십만일 때 절반만 뽑으면 5만의 병력을 육성할 수 있지 않겠나?
애초에 그냥 강제로 징집해서 창 쥐여주면 그게 징집병이었다. 문제는 이러다 나라가 망한다는 점이었다. 수나라가 왜 망했겠는가?
결국, 국가의 규모가 그렇게 큰 게 아니다 보니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의 숫자에 한계가 있었고 어찌어찌 야전까지는 가능해도 공성전까지 감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설사 제갈공명이 환생해서 신들린 용병술로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거둔다고 해도 각 왕국의 생산력으로는 전쟁으로 인해 소모되는 물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거기에 악순환으로 병력… 그러니까 건장한 성인 남성이 죽기라도 하면 그 해는 물론이고 몇 년간은 농사의 생산력이 떨어지니 전쟁을 벌일수록, 그리고 승리를 거듭할수록 손해를 보는 기이한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게 아일랜드가 지금까지 통일되지 못하고 여러 개의 군소 왕국들로 나뉘어서 살아올 수 있던 이유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외세의 힘이 개입했고 상황이 묘하게 돌아갔다.
신라와 백제, 고구려가 자신들만의 힘으로는 통일을 하지 못해 결국 당나라라는 외세의 힘을 빌려왔듯, 이들 역시 통일을 위해서 외세의 힘을 빌렸다.
얼스터의 아르단은 신성 로마 제국의 힘을 빌렸으며, 랜스터는 잉글랜드의 힘을 빌렸다. 그리고 지금, 아르단은 무려 2천에 달하는 병력을 끌고 랜스터로 진군 중이었다.
내가 데려온 병력들이 있긴 하지만 2천이라는 규모에서 알 수 있듯 아르단은 뒤를 생각하지 않은 채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긁어모았다.
성 내부를 수비해야 할 경비병들까지 긁어모았기에 사실상 얼스터나 코노트나 무주공산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잉글랜드의 지원군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이상 그로서도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불안한 건 어쩔 수 없는지 그는 랜스터로 진군하는 와중에 몇 번이나 내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용담공. 우리가 정말 승리할 수 있겠나?”
“뭐가 그렇게 불안한가?”
“이런 젠장. 난 지금 내 모든 것을 걸었다네. 자네처럼 져도 그만, 이겨도 그만이라는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라는 말이야.”
뭐, 불안한 건 이해한다. 정말 랜스터를 이길 수 있을까? 잉글랜드의 지원군을 상대로 이기는 게 가능할까? 중갑을 둘러싼 노르만 기사들은 무적이라는데 그들과 대적하는 게 가능할까 등등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하지만 그런 걱정은 기우에 불과하다. 이 내가, 오딘의 대전사이자 반신인 내가 옆에 있는데 질 리가 없잖은가.
“음, 일단 몇 가지 정정해줄 게 있는데 나는 전쟁에서 진 적이 없네.”
“…뭐라고?”
“말 그대로야. 나는 누구와 싸우든 승리했다네. 그리고 그건 하이르 앗 딘을 상대할 때도, 베네치아를 상대할 때도, 폴란드의 정의공을 상대할 때도,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를 상대할 때도, 노르웨이의 에릭 블러드엑스를 상대할 때도 마찬가지였지.”
내 말에 아르단은 입을 다물었다. 내가 언급한 인물들 하나하나가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들이었으니까.
“사자심왕 리처드가 살아서 돌아온다고 해도 내게 승리하지 못할 텐데 리처드의 발톱의 때만도 못한 존이 내게 이길 수 있을 거라 보나?”
“허… 자신감이 너무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일세.”
물론 아르단은 내가 직접 싸우는 걸 보지 못했으니 내 실력을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겠지만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고 나면 믿기 싫어도 믿게 될 것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사람은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것에 한해선 맹목적인 신뢰를 하는 법이다. 그때가 되면 내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겠지.
“글쎄, 자신감이 아니라 이건 그냥 진리일세. 내가 전투에 나서면 언제나 승리한다는 불변의 진리!”
내 말에 아르단은 더 이상 말해봤자 소귀에 경 읽기라 생각했는지 따로 대답하지 않고 말을 돌렸다.
“뭐 좋아… 자네의 명성이 헛된 게 아니라면 승리는 따놓은 당상이겠지. 그럼 적들을 상대로 어떻게 싸울 생각인가? 랜스터의 병력들은 대부분 장창병이니 잉글랜드에서 기병을 지원받았다면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할 걸세.”
와! 망치와 모루 아시는구나!? 하긴, 망치와 모루 전술은 전장에서 기본으로 사용될 만큼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인 전술이었다.
그리고 정석이라는 건 그만큼 단순하면서도 효과적이라는 얘기였다. 하지만 그런 만큼 약점도 명확했는데 망치든 모루든 그냥 보이는 족족 박살 내면 그만이었다.
망치로 내려치려고 해도 모루가 없으면 소용이 없으며, 모루가 받쳐줘도 위에서 내려칠 망치가 없다면 무용지물이 아니던가.
이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지만 내겐 쉬운 일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많이 전장에서 굴렀다고 생각하는가.
“싸우는 것도 방법이 있나? 그냥 눈 마주치면 싸우는 거지.”
내 말에 아르단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날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건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말하는 건 전략이나 전술 같은 걸 이야기하는 걸세. 설마 그냥 멧돼지처럼 달려드는 게 자네가 얘기하는 불패의 전술은 아니겠지?”
“압도적인 힘 앞에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다네. 덩치 큰 어른이 조그만 아이와 싸우는데 하나하나 작전을 세워가며 싸우진 않잖은가.”
뭐 좀 상대가 싸울 만해야 전략이랑 전술이 필요한 거지 그냥 힘으로 찍어누를 수 있는데 머리 아프게 그런 걸 고려할 필요가 어디 있겠나.
거기에 합동으로 병력을 운용하는데 제대로 연합 훈련을 한 것도 아니고 아르단이 이끄는 병력 역시 훈련도가 높은 병력들이 아니다.
전략과 전술이라는 건 그걸 수행할 능력이 있는 군대에게나 유효한 거지 어중이떠중이들이 쓸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다.
그 왜 삼국지에 나오는 팔문금쇄진이니 팔진도니 하는 게 그냥 징집병들로 쓸 수 있는 진법은 아니잖은가. 그처럼 전략과 전술 역시 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작전상 후퇴를 시켜도 진짜 패퇴해서 도망간다 생각하고 탈주하는 놈들도 많았고 앞으로 진군해야 할 때 적의 기병에 겁먹고 나아가지 못해 진형이 붕괴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느니 그냥 근대의 전열보병들마냥 한군데 모아놓고 도망치지 못하게 감시하며 진군시키는 게 제일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아니 그게 무슨… 자네가 자신감에 넘치는 건 알겠는데 저들은 기병일세. 그것도 중장기병! 그렇게 얕봐도 될 만한 놈들이 아니라는 말이야!”
“진정하게 아르단. 그리고 경고하는데 내게 소리치지 말게. 가르치려 들지도 말고.”
내가 웃음기 싹 빼고 차가운 목소리로 경고하자 아르단은 입을 다물었다.
“나는 윙드 후사르와도 싸워봤다네. 설마 저들이 윙드 후사르보다 더 뛰어나다고는 안 하겠지?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나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살아왔다네. 자네가 아는 걸 나라고 모르겠나?”
어차피 대답 못 할 게 뻔했기에 나는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다다 쏘아붙였다.
“자네가 그렇게 전략 전술을 좋아하니 얘기해주지. 자네 말대로 적은 기병이 포함되어 있고 우리는 보병뿐이니 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선 보급품이 실린 마차와 수레를 이용해 주변을 방어하면서 이동하는 게 가장 효과적이라네.”
공성전에서 기병이 활약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마차와 수레는 일시적으로 성벽의 역할을 해주기에 충분했다.
“내 말이 안 믿길 수도 있겠지만 이건 사자심왕 리처드도 성지를 탈환하려 행군할 때 썼던 방법이네. 나름대로 효과도 있었고.”
물론 원역사에선 지금과는 다르게 다른 한쪽은 해안선으로 막혀있었지만, 그래도 그 상대가 살라딘이었던 걸 감안해보면 그 효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근데 자네 휘하의 병력으로 이게 가능하겠나? 옆에서 기병들이 화살을 쏘아대는데 겁을 집어먹지 않고 행군하는 게 가능할 거라 보냐 이 말일세.”
당연히 불가능하겠지. 그러니 아르단도 저렇게 아무 말 못 하고 입 다물고 있는 게 아닌가?
“그러니 그냥 진지나 구축해서 적의 기병대나 붙잡고 있게. 어차피 적의 기병도 숫자가 얼마 안 될 테니 함부로 들이박지는 못할 거야. 그러는 사이 나와 내 휘하의 병력이 랜스터의 본대를 박살 내주지.”
“…….”
“그럼 끝이야. 어차피 적의 기병은 날파리 같은 존재일세. 귀찮지만 그냥 무시하면 그만이야. 랜스터가 무너지면 그들은 퇴각할 수밖에 없을 걸세.”
“만약 기병들이 적의 보병들과 합쳐서 자네를 공격하면 어쩔 텐가?”
“그땐 같이 박살 내면 그만이지. 자기들이 알아서 말을 바치러 와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어디 있나?”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내 표정에 아르단은 질렸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고작 오백으로 적을 궤멸시키겠다고 하는 건가? 미쳤군. 미치지 않고서야….”
“다들 그렇게 얘기하더라고. 근데 원래 전쟁은 미친놈들이 하는 거야.”
아르단의 말대로 오백밖에 안되는 병력으로 적과 맞서 싸우는 건 미친 짓이었지만 내 휘하의 병력은 내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특수 병종인 후스카를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이끄는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거기에 나와 힐데, 이비가 뿌려주는 버프까지 있으니 지고 싶어도 질 수가 없었다.
“그대가 진정으로 왕이 되고 싶거든 이걸 기억하게. 신중함을 기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과감함도 필요한 법이라는 걸.”
* * *
<랜스터 왕국 – 더블린>
랜스터의 쿠어거 에레윈은 옆에서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행군하는 잉글랜드의 병력들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자신의 애절한 마음이 담긴 편지가 통했는지 존 왕은 무려 200명이나 되는 지원병력을 보내줬다. 그 태반이 그 이름도 유명한 장궁병들이었고 중장기병도 20기나 포함되어 있었다.
번쩍이는 갑옷을 걸치고 바이저를 내린 채 기다란 랜스를 들고 행군하는 그들을 보니 절로 가슴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저들만 있다면 오합지졸인 얼스터 따위는 순식간에 박살 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무상의 도움은 없는 법이니 추후 저들의 내정간섭은 당연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진 만큼 저들도 동맹을 잃지 않기 위해 강하게 나가진 못할 것이다. 그 틈을 타서 자신은 빠르게 아일랜드를 통합하면 그만이다.
얼스터야 이번 전투로 인해 패퇴시킨 뒤 합병하면 그만이고 코노트는 이미 얼스터에게 넘어가 있었다.
점령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물자를 수탈함은 물론 병력까지 차출해가는 아르단의 폭정에 불만이 많을 테니 아르단을 물리치고 그들을 해방시키기만 해도 자신을 지지할 것이다.
먼스터야 뭐… 굳이 건드릴 것도 없겠지. 애초에 거기까지 원정을 가는 건 무리였다. 코노트와 얼스터를 손에 넣게 되면 당분간은 내실을 다지는 데 시간을 쏟아야 하지 않겠는가?
먼스터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이후에 손봐줘도 그만이다. 어쨌든 지금 당장은 얼스터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게 급선무였다.
그리되면 아르드리라는 칭호를 손에 넣는 것도 마냥 꿈은 아니리라. 그렇게 에레윈은 아일랜드 통일왕조의 초대 국왕이 될 꿈에 부풀어 전쟁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