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4화
물론 그런 내 생각과는 별개로 일단 주어진 일은 열심히 해야 한다. 내가 밥값을 해야 아르단도 호응해주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조심스럽게 방 안쪽으로 들어간 나는 다시 단검을 집어넣었다. 이렇게 상대가 무장해제 상태에 깊은 잠에 빠져있는 상태라면 단검을 쓸 것도 없었다.
외상 없이 죽여야 다른 이들이 하이나르손이 죽은 걸 모르지 않겠는가. 아마 평상시와 다르게 늦잠을 잔다고 생각하겠지. 그럼 그때 동안 우리는 유령처럼 이곳에서 사라지면 되는 거다.
물론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서 들킬 테고 심문과 추적을 하다 보면 우리의 뒤를 캘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몰래 들어오긴 했지만 숙소도 잡았고 사람들 통행이 금지된 밤에만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상관없었다. 적들이 우리의 꼬리를 잡았을 때쯤에 이미 코노트는 얼스터의 손에 들어왔을 테니까.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아르단이 못 먹으면 손절해야지 뭐.
그렇게 생각을 마친 나는 까치발을 들고 혹시라도 상대가 깰세라 조심스럽게 침대에 다가갔다. 하이나르손에 대해 받은 정보에 잠귀가 밝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했다.
다행히 그는 자신이 코앞에 올 때까지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가볍게 손을 푼 나는 재빨리 그의 위에 올라타서 왼손으로는 입에 천을 집어넣어 재갈을 물렸고 오른손으로는 그의 목을 졸랐다.
“으읍… 읍…!”
갑작스러운 고통에 그가 눈을 부릅뜨며 나를 바라봤지만,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최대한 빠르게 영면에 빠지게 해주는 것뿐이었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그래도 최대한 고통받지 않도록 빠르게 보내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 때문에 그의 목을 쥐고 있는 내 오른손에 힘이 들어갔고 그럴수록 그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갔다.
“크흡… 큽… 크흐윽….”
그는 살기 위해 마지막으로 발악했지만 쓸데없는 발버둥에 불과했다. 물가에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발버둥 치던 그는 이내 축 늘어지며 고개를 떨궜다.
남들이 보기엔 죽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는 단지 산소 부족으로 정신을 잃은 것뿐이었다. 그 증거로 여전히 그의 심장은 피를 공급하기 위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 상태에서 그의 목뼈를 비틀어 죽일 수도 있었지만 나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대신 품속을 뒤져 이비가 챙겨 준 병을 꺼냈다.
몇 방울만으로도 코끼리마저 죽음에 이르게 하는 극독이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병의 마개를 딴 뒤 그의 입 안에 천천히 흘려 넣었다.
반신인 내가 저 독을 먹는다고 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조심해야 하지 않겠나? 반신이었던 헤라클레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도 결국 히드라의 맹독이었으니까.
부족한 것보다는 과한 게 낫다는 지론하에 나는 준비해 온 독 한 병을 전부 그의 입에 털어 넣었다. 한 사람에게 쓰는 것치고는 굉장히 많은 양이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 아니던가.
결이 다른 이야기기는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도 왕이 내린 사약이 통하지 않아 활줄로 목 졸라 죽인 사례도 제법 됐다. 그 유명한 송시열도 사약이 안 통해서 3번이나 먹지 않았던가.
아무튼 독이 도는 것을 확인한 나는 방 안에서 내 모든 흔적을 지운 뒤 하이나르손의 머리끝까지 이불을 덮어준 채 다시 창문 밖으로 나왔다.
발코니에 밧줄을 걸고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나는 적들의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일부러 밧줄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렇게 올라올 때 만들어 놓은 발판을 밟으며 내려갔고 발이 지상에 닿자마자 나는 지체하지 않고 성벽의 담을 넘었다.
아까 이비가 일으킨 소란 때문에 순찰병들의 숫자가 늘어나 있었지만, 반신인 내게 그런 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애초에 경찰 열 명이서 도둑 하나 막기 힘들다 하지 않았나. 평범한 도둑들도 그럴진대 날 잡으려면 경비병 수천 명은 동원해야 할 터였다.
그렇게 무사히 현장에서 도망친 나는 힐데와 이비가 기다리고 있는 숙소로 돌아왔다.
“어서 오십시오. 라그나르.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군요.”
“별다른 변수가 없더라고. 만약 밤늦게까지 안 자고 있었으면 밖에서 찬 바람 맞으며 잘 때까지 기다려야 했을 텐데 말이야. 따로 동침하던 여자도 없었고.”
내 말에 힐데는 비아냥거리듯 이야기했다.
“흠, 누구랑 다르게 난봉꾼은 아닌 모양이군요. 당신도 좀 보고 배우는 게 어떻습니까?”
“글쎄… 암살이 무서워서라도 계속 누군가와 같이 자야 하지 않을까?”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이건 반쯤은 진심이었다. 죽여야 될 사람이 하나인 것과 둘인 거는 난이도가 달라지니까.
물론 둘 다 칼로 푹찍푹찍 하면 눈 깜짝할 새 죽일 수 있지만, 내부의 독살처럼 보여야 했기에 칼을 사용할 순 없었다.
당연히 난이도가 올라갈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하게 된다면 비명으로 인해 내가 암살을 시도하려 했다는 사실이 동네방네 퍼질 터였다.
“이제는 자기가 호색한이라는 걸 숨길 생각도 없군요.”
“알면서도 날 좋아하는 거잖아?”
“하, 애초에 저 말고 당신을 좋아해 줄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글쎄… 적어도 이비나 칼리나는 날 좋아하더라고. 그렇지 이비?”
“예? 아… 그… 예. 마, 맞습니다. 주군.”
“봤지?”
내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힐데를 바라보자 그녀는 짜증 어린 표정을 지으면서도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내가 벗어서 아무렇게나 던져둔 옷을 집어 들어 옷걸이에 걸어 넣으며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이렇게 옷 벗어 던지지 말라고 매번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거 지난번에도 얘기했던 것 같은데 이쯤 해서 안 고쳐지면 포기하는 게 낫지 않아?”
“안 되면 될 때까지 고친다는 생각은 안 해봤습니까?”
“그럼 공평하게 하자구. 네가 내 옷을 관리해주면 나도 네 속옷을 관리해줄게. 어때? 물론 내 취향의 속옷들로 채워 넣을 생각이긴 한데… 나름 공평하지 않아?”
내 말에 힐데는 드물게 경멸 어린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고 나는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무튼, 이비, 건네준 독은 다 썼어. 솔직히 과다 투여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확실한 게 좋잖아?”
“잘하셨습니다. 독이라는 게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효력을 발휘하는 것도 아니니까요. 모자란 것보다는 과한 게 더 낫지 않습니까.”
“오, 아내와 남편은 닮는다더니 어쩜 나랑 생각하는 게 똑같을까.”
“아, 아내 말씀이십니까?”
“오, 그럼. 너와 힐데, 칼리나 셋 다 내 아내들이지.”
사실 사람으로서 아내를 셋이나 두는 건 어떨까 싶지만… 나는 반신이잖은가. 그럼 인간이 정한 규칙을 꼭 따를 필요는 없지 않을까?
당당히 하렘을 선언하는 내 모습에 힐데가 불만 어린 표정으로 뭐라 중얼거렸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한 채 촛불의 불을 끄며 이불을 끌어 올렸다.
결과적으로 별다른 변수 없이 부드럽게 암살을 하긴 했지만, 이래저래 신경을 쓰느라 피곤했기에 기력을 채워줄 필요가 있었다.
“아무튼, 오늘은 이만 자자. 괜히 새벽부터 숙소를 벗어나면 쓸데없는 의심을 받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몇 시쯤에 나갈 겁니까?”
“6시 정도? 그 정도도 조금 이르긴 해도 엄청나게 의심을 받지는 않겠지.”
전기가 없는 만큼 중세에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기본이었다. 실제로 1970년대의 우리나라도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일을 나가고 해 떨어지면 돌아와서 일찍 자지 않던가.
“알겠습니다. 좋은 밤 되십시오.”
* * *
그렇게 새벽 6시가 되자 머물렀던 흔적을 전부 지운 나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성벽을 뛰어넘어서 골웨이를 떠났다.
그리고 곧바로 벨파스트로 복귀했는데 우리가 도착하자마자 아르단은 흥분한 얼굴로 직접 성문 앞까지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하하하, 어서들 오게.”
이전과 확연히 다른 그의 태도에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내뱉었다.
“사람 하나 죽였다고 대접이 달라지는군.”
“누굴 죽이느냐에 따라 다르지. 그리고 자네들은 그런 대접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네.”
자격이라… 하긴, 아르단에게 내가 신성 제국의 용담공이고 뭐고가 무슨 상관일까. 결국 자신에게 도움이 되냐 안 되냐가 중요하겠지.
“상황은 어떻지? 자네가 이렇게 흥분하는 걸 보니 확실히 죽긴 한 것 같은데.”
“흠. 하긴 제대로 소식을 못 들었겠구만. 일단 하이나르손은 죽었다네. 다만 누가 봐도 중독돼서 죽은 게 확실했기에 내부 계파들끼리 내전이 일어났네.”
“그쪽도 서열정리가 제대로 안 됐나 보구만.”
“거기라고 여기와 다르겠나? 그걸 하이나르손이 자신의 카리스마로 휘어잡은 상황이었다네. 문제는 그 구심점이 무너지자 코노트도 함께 무너지는 중이고.”
뭐, 흔한 얘기다. 코끼리가 살아있을 때는 사자조차도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지만, 코끼리가 죽게 되면 그 시체를 먹겠다고 온갖 놈들이 꼬이지 않던가.
그런 만큼 코노트에서 하이나르손이 가지는 권한은 엄청났기에 그가 가진 이권을 노리는 하이에나 같은 놈들이 몰려들었고 그 과정에서 자기들끼리 내전에 들어갔다는 말이었다.
“혹시 자네는 그걸 노리고 독살을 한 건가?”
“당연하지. 날붙이를 사용해서 죽이면 거름망이 좁혀지지만 독으로 죽이게 되면 확인해봐야 용의자의 범위가 넓어지거든.”
당장 주방장을 비롯해 음식을 하는 요리사들부터 시중을 드는 이들은 물론이요 술을 관리하는 관리인이나 그의 방을 청소하는 시종들도 전부 용의선상에 오를 테니까.
“하하하, 과연. 제국의 용담공이라더니 그 명성이 헛된 게 아니었군.”
“그나저나 출진 준비가 너무 빠른 거 아닌가?”
내가 다시 복귀하는 데 일주일 정도 걸렸다. 그런데 지금 아르단은 자신이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한 채 출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소식이 전해지고 그 소식을 듣자마자 출진 준비를 끝마친다고 해도 일주일은 너무 빠르다. 이건 누가 봐도 의심을 받지 않겠는가? 거짓말도 좀 그럴듯하게 쳐야 사람들이 믿는 법이다.
“걱정할 필요 없네. 그쪽에서 지원을 요청했고 우리는 그 요청에 응하는 것뿐이니.”
“아, 밀리는 놈들이 도와달라고 한 모양이구만.”
흔한 얘기다. 지금 당장 좆될 것 같으니 추후에 좆될 걸 알면서도 손을 뻗는 것이다. 신라도 당나라의 손을 빌리면 득보다 실이 많을 걸 알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손을 뻗지 않았던가.
아마 지금 밀리고 있는 놈들도 얼스터에게 손을 빌리면 그들에게 종속된다는 걸 알고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자신들이 주도권을 잡고 살아남기 위해선 외부의 힘이 필요했다.
“제법 수완은 있군. 명분도 충분하고.”
“칭찬 고맙네. 그래서 자네도 함께할 텐가?”
“아니, 이번은 패스하지. 애초에 자네가 내게 낸 시험은 하이… 뭔 손? 아무튼 그놈을 죽이는 것까지가 아니던가.”
“하이나르손일세.”
“그래. 그렇다고 치자고. 어차피 죽었는데 이름이 뭐가 중요한가? 아무튼, 나는 자네가 낸 시험을 완벽히 통과했네. 그러니 이번에는 자네가 내 시험을 통과할 차례가 아닌가?”
내 말에 아르단은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다.
“만약 내가 자네가 낸 시험을 만족스럽게 통과하지 못한다면 어쩔거지?”
“서로를 믿고 거래를 했는데 한쪽이 일방적으로 기대에 못 미친다면 거래를 파토내는 게 당연한 것 아닌가?”
“반드시 그 시험을 통과해야겠군.”
“승전보. 기다리고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