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2화
“솔직히 얘기하자면 별로 좋은 상황은 아니네. 우선, 얼스터도 이래저래 의견이 갈라져 있어.”
“정확히 얘기해봐. 그렇게만 얘기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잉글랜드가 몰락한 틈을 타서 완벽한 독립을 쟁취하자는 의견도 있고 잉글랜드와 좋은 관계를 맺어서 자치권을 보장받자는 파도 있고 과거의 원한을 갚자며 공격해 들어가야 한다는 과격한 놈들도 있지.”
생각보다 총체적 난국이었기에 난 웃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었다. 원래 상황이 혼란스러우면 온갖 놈들이 튀어나오기 마련이라지만 이건 개판 오 분 전이 아닌가.
“상황 참 지랄맞군. 그래서 자네 의견은 어떻지?”
“난 얼스터의 완전한 독립을 원한다네.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지. 그게 자네 같은 외지인과 손을 잡는 행위라도 말이야.”
“열사 납셨군. 어떻게 포장해도 실상은 자네 가문이 얼스터를 휘어잡고 싶은 것 아닌가? 정확히 말하자면 자네가 얼스터의 쿠어거(왕)가 되고 싶을 테고.”
아마 내가 보낸 편지에 자신을 얼스터의 쿠어거로 만들어준다는 내용이 없었다면 그는 답장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편지 안에 적혀있던 내 지위 따위는 고려도 하지 않았겠지. 아일랜드인들에게 신성 제국의 공작이라고 해봤자 와닿지도 않을 테니까.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솔직해서 좋군. 그나저나 독립이라… 얼스터는 바이킹들의 공격을 막아낸 걸로 아는데?”
“물리적으로 막아내면 뭐 하나? 이미 경제적으로 조금씩 예속되고 있는데.”
아르단의 설명에 의하면 얼스터는 잉글랜드의 공격을 막아내긴 했지만,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그 때문에 일부는 바이킹들과 융화되기도 했고 교역도 하며 알게 모르게 그들에게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럼 첫 시작으로 얼스터부터 하나로 통합해야겠군. 하는 김에 불순분자들도 좀 뿌리 뽑고.”
내가 히죽 웃으며 얘기하자 아르단은 불안했는지 급하게 덧붙였다.
“설마 병력들을 동원해서 다 때려잡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렇게 강제로 통합하면 그 누구도 날 쿠어거로 생각하지 않을 걸세. 명분이 없지 않나?”
“두들겨 맞다 보면 명분을 생각할 틈도 없을 거야. 대부분 그러더라고.”
“설마 그 잘난 공작위도 그렇게 얻은 건가?”
“물론이지. 나 같은 무식한 바이킹이 싸움 말고 또 뭘 잘하겠나?”
“빌어먹을. 그건 절대 안 돼. 아일랜드인들의 눈에는 자네나 잉글랜드 놈들이나 다를 게 없네. 애초에 자네도 노르만 출신의 바이킹이 아닌가?”
음, 그렇게 얘기하니 또 그렇네. 이걸 대한민국 국민 입장에서 비유하자면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이 독립을 하겠다고 하는데 서로 노선이 갈라진 상황이다.
이걸 자기 말 안 듣는다고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서 다 두들겨 팬 뒤 독립 세력을 하나로 통합하는 그런 그림이 돼 버린다.
“입맛 한번 까다롭군. 그럼 내가 뭘 어떻게 해주길 원하나? 그래도 뭔가 생각이 있으니 내 제안에 응한 것 아닌가?”
“왕이 되기 위해서는 누구나가 인정할 만한 업적이 필요하네. 바이킹이었던 자네가 신성 제국의 공작이 된 건 그만한 업적을 세워서 그런 거겠지?”
“잘 알고 있군.”
“나 역시 왕이 되기 위해선 그런 업적이 필요하네. 그리고 그런 내가 명령한다면 사람들도 자네를 받아들임은 물론 잉글랜드와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겠지.”
“그러니까 자네가 원하는 건 자신을 얼굴마담으로 내세워서 얼스터를 통합할 만한 업적이나 명분이 필요하다는 거군.”
거, 버스 한번 타겠다는 얘기를 뭐 이리 빙빙 돌리는지 모르겠군. 근데 버스 승객이 제법 까탈스러워서 문제다.
“맞아. 그리고 참고로 자네들을 받아들인 건 내 독단이네. 그렇기에 이쪽에서 대놓고 지원을 해줄 순 없어.”
“뭐, 그럴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게 아니라면 아무리 비밀을 요한다고 해도 이렇게 야밤에 쥐새끼처럼 들어올 이유가 없잖아. 고귀한 가주께서 마부 일을 할 필요도 없고 말이야.”
내 비아냥에 아르단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다리를 꼬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서 뭘 어떻게 조지면 되는 거지? 아까부터 하라는 말은 안 하고 이리저리 간만 보고 있는데 속 시원하게 얘기해봐.”
“현재 아일랜드는 이곳 얼스터와 랜스터, 코노트, 먼스터로 나뉘어 있네.”
말하라는 본론은 안 말하고 뜬금없이 아일랜드의 현 상황을 설명하자 짜증이 솟구쳐 올라왔지만, 일단은 듣기로 했다. 주변국의 정세는 들어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더블린을 끼고 있는 랜스터 놈들은 친잉글랜드파가 득세하고 있네. 반면 국경을 맞대고 있는 코노트는 독립을 원하고 있긴 하지만 우리와 묵은 앙금이 많다네. 그래서 랜스터보다 먼저 박살 내야 할 상대지.”
“앙금? 뭐 때문에?”
“아르드리(High King)가 되려고 과거에 자주 치고받고 싸웠거든. 아무래도 랜스터보다야 코노트가 더 만만했으니까. 그리고 그건 상대 역시 매한가지였고.”
하긴, 원래 싸울 때는 만만한 놈부터 조져서 덩치를 불리는 게 정석이다. 삼국지를 할 때도 초반에는 엄덕왕 같은 놈들부터 조지지 조조나 유비, 손권과 싸우지는 않잖은가.
“흠… 먼스터는?”
“먼스터는 그냥 소 닭 보듯 하는 관계네. 거리도 떨어져 있는 데다 교류를 하기도 애매해서 그냥 데면데면한 관계지.”
“그럼 코노트부터 조지면 된다는 말이군.”
“맞아. 다만 병력을 일으키기는 힘드니 암살을 해주게.”
“암살이라… 적의 우두머리가 죽어서 혼란스러운 틈을 타 앞장서서 코노트와 전쟁을 할 셈이군. 그때의 전공을 바탕으로 왕위에 대한 정당성과 명분을 주장할 테고.”
“…정확하네. 내 머릿속에라도 들어갔다 왔나?”
“뻔할 뻔 자지. 원래 정치하는 놈들 생각이 다 거기서 거기 아닌가.”
물론 이건 내가 정치를 많이 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 게임에서 주변의 영지를 통합할 때 이런 방식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침략을 할 명분이 없는 상황에서 암살을 주문한다? 그러면 백 프로다. 원래 주변국의 혼란을 빌미 삼아 쳐들어가는 건 흔해 빠진 일 아니던가.
“그래서. 코노트는 그렇게 삼킨다 치고 랜스터는 어쩔 생각이지?”
“코노트와 얼스터에서 병력을 뽑아내서 단숨에 점령해야지.”
“먼스터는?”
“그놈들은 자치만 보장해주면 알아서 숙이고 들어올 걸세. 억지로 굴복시키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적당히 병력 지원받고 조공을 받는 수준에서 복속시킬 수 있을 거야.”
태평하게 대답하는 아르단의 말에 나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이쪽에서 코노트를 접수할 때쯤에는 하랄과 사자공이 공격을 개시할 것이다.
그럼 잉글랜드나 7왕국, 스코틀랜드도 다른 곳에 눈 돌릴 여유가 없겠지. 그 사이에 아일랜드를 빠르게 통일하고 그걸 바탕으로 잉글랜드의 통수를 치면 계산상으로는 완벽하다.
거기에 아일랜드를 통일하고 나면 본대의 병력들도 지랄맞은 북해 대신 남부의 켈트해를 통해서 운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충한 병력으로 잉글랜드의 존 왕부터 조지면 힐데의 정통성과 명예가 올라가겠지. 그럼 절로 7왕국에 끼치는 영향력도 상승할 것이다.
“급조해낸 계획치고는 나쁘지 않군.”
중세는 정당한 계승권자라는 정통성 하나만으로는 왕이 될 수 없다. 그건 기본에 추가로 왕위를 유지할 강력한 힘과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했다.
만약 힐데가 그녀의 이름으로 잉글랜드 왕국을 조지게 되면 그녀 자신의 실력을 만천하에 입증하고 그 명성을 떨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웨식스의 이름으로 왕위를 재탈환했으니 과거 7왕국의 영광과 웨식스 왕조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지지도 받을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게 영화였다면 그녀가 영국에 돌아오는 것만으로 모두가 들고일어나 힐데를 맞이해줬을 테지만 인생은 실전이 아니던가.
“승낙할 텐가?”
아르단은 긴장한 표정으로 내 입을 바라보았고 나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어영부영하다가 엉뚱한 놈한테 공 넘기지 말고 제대로 준비나 하고 있으라고.”
* * *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나는 힐데, 이비만 데리고 코노트로 향했다. 관리가 안 됐는지 도로의 상태는 물론이고 치안도 엉망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이미 오는 길에 도적단 두 개를 몰살시켰고 나는 그 과정에서 묻은 도적들의 피를 지우지 않았다. 수급을 매달고 다니는 건 덤이고.
그건 힐데와 이비도 매한가지였는데 그 이후로 마주친 도적들은 우리의 모습을 보더니 모른 척하고 보내주었다. 정확히는 못 본 척한 거였지만.
“프리패스라서 편하긴 합니다만 사람 머리를 달고 이동하는 게 썩 좋은 기분은 아니군요.”
“피비린내도 좀 역겹고 찝찝하긴 하지. 거기에 말라붙으면 파리떼도 달라붙어서 짜증 나고. 그래도 귀찮은 일을 겪는 것보단 낫잖아.”
도적들도 어깨 위에 달려있는 게 장식이 아니라면 이게 누구의 목인지 본능적으로 깨달을 것이다. 도적질도 눈치가 없으면 못 해 먹거든.
거기에 나는 도적들이 우리를 죽이려 하지 않는다면 굳이 처리하지 않고 그냥 보내줬다. 물론 쫓아가서 죽이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었지만, 지금은 일 분 일 초가 아쉬운 상황 아니던가.
실제 인게임에서도 도적들은 초반에나 쓸만한 경험치와 장비를 제공하지 후반에 가면 한 입 거리도 안 되는 귀찮은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그리고 그건 도적들에게는 미안하지만 현실에서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내가 그놈들이 쓰는 이 나간 칼이나 허름한 옷을 뒤질 필요가 하등 없지 않은가.
“지도를 보니까 해가 떨어지기 전에 골웨이에 도착할 것 같은데 도착하면 오늘 하루는 푹 쉬고 내일부터 일 시작하자. 빨리 일을 처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컨디션 관리도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힐데의 대답을 끝으로 묵묵히 말을 탄 채 이동하고 있자니 입이 근질근질해진 나는 힐데와 이비를 놀려줄 심산으로 갑자기 생각난 것처럼 얘기했다.
“아, 그러고 보니 아일랜드에 오니까 생각난 건데 여기에선 상대에 대한 복종의 증거로 젖꼭지를 빠는 거 알아?”
“…뭐라고요?”
“젖꼭지를 빤다고.”
“…그게 말이 됩니까? 거짓말을 할 거면 좀 그럴듯한 거짓말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힐데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대꾸했지만 나는 억울하다는 얼굴로 항변했다.
“진짠데? 내가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어디 있어?”
“당신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렇긴 한데 이건 진짜야. 그렇지 이비?”
“예? 아… 예. 그래서 종종 충성맹세를 하지 못하게 포로로 사로잡은 상대의 젖꼭지를 잘라버리는 형벌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비까지 그렇게 얘기하자 힐데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군요. 대체 왜 남의 젖꼭지를….”
“글쎄… 제법 괜찮은 전통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이왕 아일랜드에 온 거 나도 오늘 밤에 힐데 너한테 충성맹세나 할까 하는데.”
내가 음흉하게 웃으며 대놓고 혀를 내밀어 이리저리 움직이자 힐데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나를 매도했다.
“미쳤습니까? 당신이 늘 발정 난 상태라는 건 알고 있지만 그런 이상성욕까지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군요.”
“왜?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잖아.”
“…죽여버릴 겁니다.”
이제 와서 새삼스럽지만 힐데의 저 죽여버린다는 말은 ‘아주 좋다’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힐데의 허락도 얻었겠다 나는 옆에 있는 이비를 향해 똑같은 제안을 건넸다.
“그래서 어때 이비? 이왕 하는 김에 너한테도 같이 충성맹세를 하고 싶은데.”
“주, 주군….”
그녀는 우물쭈물하며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했고 나는 그녀의 반응을 승낙이라 받아들였다. 원래 침묵은 긍정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사이 코노트에 도착했지만 나는 오늘 하루는 파업하기로 했다. 오늘 밤은 둘에게 충성맹세를 하기 바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