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화
“시발. 뒤지는 줄 알았네.”
나는 파도에 흠뻑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동감입니다. 몇 번 배를 타봤지만 여기만큼 지랄맞은 곳은 처음이군요.”
어지간하면 욕을 하지 않는 힐데조차 짜증이 가득 찬 목소리로 동조했고 이비는 거진 반 시체가 되어 헛구역질을 하고 있었다.
“그래도 함선이 커서 버텨줬지 잘못했으면 난파됐을 거야.”
나는 처음 출항할 때와는 다르게 만신창이가 된 내 기함 궁니르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남들이 보면 유령선이라고 할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었는데 북해항로가 얼마나 지랄맞은지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었다.
종종 인게임 내에서 폭풍우에 의해서 배가 작살나는 경우가 있었는데 재수 없으면 상어밥이 되거나 저체온증에 걸려 죽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물론 그런 경우를 대비해 포세이돈의 가호라든가, 요르문간드의 허물 같은 보험용 아이템이 있긴 하지만 이름만 봐도 느껴지는 것처럼 쉽게 얻을 수 있는 물건은 아니었다.
“그래도 덕분에 상대에게 들킬 염려는 없잖습니까.”
“그건 그런데 내 목숨 걸고 하는 도박은 영 아닌 것 같아.”
우리가 북해항로를 택한 건 다른 왕국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일랜드 공작을 위해선 몰래 얼스터에 상륙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항로가 남쪽과 북쪽 두 개밖에 없었다.
남쪽으로 항로를 잡으면 프랑스나 잉글랜드를 비롯해 다른 7왕국에게 우리 지금 아일랜드로 가요옷! 하면서 광고하는 꼴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항로를 북부로 잡을 수밖에 없었다.
“하랄한테 북해항로는 절대 쓰지 말라고 해야겠네.”
굳이 북해항로를 안 써도 해안선을 따라가면 스코틀랜드로 갈 수 있는 데다 원래도 바이킹들은 심심하면 영국 해안가를 조지면서 약탈하고 다녔으니 문제 될 건 없을 것이다.
어쩌면 자기네 해안이 아니라 스코틀랜드를 조지니 다행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원래 벌칙도 나만 아니면 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벨파스트도 니스나 하노버만큼은 아니어도 제법 크군요.”
“그야 얼스터에서 최대항구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물론 벨파스트 기준 북서부에 런던베리라는 항구가 있긴 하지만 이 시기에 아일랜드의 교역 상대는 잉글랜드가 전부였다.
그렇다 보니 필연적으로 잉글랜드와 근접해있는 벨파스트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마저도 아일랜드 기준으로 크다는 거였지만.
“근데 저기에 마중 나와 있는 사람들은 뭡니까? 저희 나름대로 비밀리에 왔던 거 아닙니까?”
힐데는 수많은 환영인파를 보며 내게 물었고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당연히 비밀리에 왔지. 저 사람들이 환영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배에 실려있는 무역품일걸? 오랜만에 상단이 온다는데 뛰쳐나올 법도 하지.”
힐데는 그제야 배 위에서 휘날리는 북부연맹의 깃발을 바라보았고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항로가 이렇게 지랄맞으니 외부에서 정기적으로 오는 상단이 없는 것도 이해는 갑니다.”
그 말대로 아일랜드는 와봤자 이득도 별로 안 되는, 그런 주제에 쓸데없이 위험만 큰 하이리스크 로우리턴의 전형적인 예시였다.
일단 아일랜드는 현대에도 인구수가 그렇게 많은 지역은 아니었다. 땅 크기는 남한 크기의 70% 정도인데 인구수는 1/10수준이다. 그럼 과거는 어땠겠는가?
거기에 지리적으로도 유럽 기준으로 제일 변방에 있기 때문에 기술의 발전도 느렸고 전체적으로 낙후된 데다 특산물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그래도 더블린은 여기보다 낫더라고.”
더블린은 현재 아일랜드의 수도이기도 하고 영국과 교역을 하기에 최적의 항구였다. 그런 점에서 보면 얼스터보다 랜스터가 스타팅으로 최적의 장소였다.
다만, 영국과 가깝고 많은 이들이 오가다 보니 계획이 들킬 우려가 있었다. 심지어 지금은 웨일즈 지방으로 존 왕이 이사를 오지 않았던가.
당분간은 웨일즈에 대한 지배력을 높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테지만 벌써부터 들키고 싶지는 않다. 원래 통수는 몰랐을 때 큰 효과를 발휘하지 않던가.
“더블린도 가보셨습니까?”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지만 나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입에 담았다.
“네 아버지랑 일할 때 종종 가봤지. 아무래도 반란을 일으키려면 여기저기서 다 일어났어야 하니까. 물론 그 당시 왕이 사자심왕이라 택도 없었지만 말이다.”
뭐, 완전 틀린 말은 아니다. 라그나르는 가보지 않았지만 나는 인게임 내에서 자주 가봤으니까.
“흐음… 근데 아일랜드에서 내전이 일어나면 주변에서 수상하게 여기는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한데 자기들도 서로 찢어진 데다가 사자공 전하와 하랄의 공격을 막는데 정신없을걸? 자기 집 불났는데 남의 집 불구경할 여유가 어디 있겠어.”
“그것도 그렇군요.”
“거기에 아일랜드는 종종 자기가 아르드리(high king of ireland)가 되겠다고 허구한 날 싸워대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할걸?”
그렇게 힐데와 대화를 나누는 사이 배가 항구에 정박했고 선원들이 짐을 내리기 시작했다. 물론 우리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했기에 굳이 내리지 않고 배 위에 남아있었다.
그렇게 낮의 활기참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정적이 내려앉자 우리는 흔들리는 배 위에서 내렸다. 몇 날 며칠을 배 위에서 살다 보니 흔들림 없는 땅이 어색할 지경이었다.
“땅이 안 흔들린다는 당연한 사실에 이렇게 감사할 줄은 몰랐습니다.”
“동감이야.”
아무리 내가 바이킹에다 항해에 익숙하다지만 솔직히 바다 위에서의 생활이 재밌는 건 아니었다. 행동도 제한되고 놀 것도 거의 없지 않던가.
“그래서, 일단 내렸는데 어떻게 할 겁니까?”
“분명 항구 동쪽에 마차를 대기시켜놓는다고 했는데… 아! 저깄네.”
힐데와 이비의 양어깨에 손을 올린 채 동쪽으로 가다 보니 한 대의 마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나는 당연한 것처럼 마차 안에 들어갔다.
안에 있던 마부는 나를 힐끗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말을 몰았고 그렇게 20여 분 정도를 달리고 나서야 거대한 대저택에 들어설 수 있었다.
“규모가 제법 크군요. 저와 연관된 가문은 다 망한 줄 알았는데.”
“부계가 망한 거지 모계는 나름대로 잘나가던 신분이었을걸?”
물론 아일랜드도 윌리엄 1세 휘하의 기사들에게 공격을 받고 일부 영토가 종속되기는 했지만 얼스터는 그들에게 저항했고 켈트인들의 땅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래서, 이제 곧 잊어버렸던 친척들을 만나게 될 텐데 기분이 어때?”
“먼 친척은 가까운 이웃만 못하다고 하지 않습니까? 지금 제게 남은 가족은 라그나르 당신뿐입니다.”
“푸하하하, 하긴 그것도 그래. 근데 너무 비즈니스 관계인 거 아니야?”
“어차피 저는 그들의 힘이 필요하고, 그들은 제 명분이 필요한 것 아닙니까? 절 찾으려고 했다면 진작에 찾았겠지요.”
“뭐, 그건 그래. 그래서 힐데는 그렇다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오. 가주 양반?”
내 말에 조용히 마차를 세우고 말을 돌보던 마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히죽 웃으며 가볍게 한마디 던져줬다.
“내가 아무리 잘생겼어도 그렇게 계속 쳐다보면 곤란해. 내게 남색 취미가 있는 건 아니거든.”
하지만 상대는 내 농담에도 단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또박또박 되물었다.
“내가 레드우드 가문의 가주라는 걸 알고 있었나?”
“적진에 가는데 정보수집은 기본이지.”
“적진이라… 이곳이 적진이라는 건가? 조카가 삼촌을 찾아왔는데 적진이라고?”
“밖에서는 형제끼리 치고받는 일도 많더군. 아비가 아들을 죽이려고도 하고. 근데 조카 삼촌 관계가 무슨 소용이겠나?”
내가 유들유들하게 대꾸하자 그게 심기를 거슬렀는지 상대는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말이 짧군. 바이킹이라서 그런지 기본적인 예의도 밥 말아 먹었나?”
“그건 내가 할 말인 것 같네만… 아르단 레드우드. 나는 제국의 용담공이다. 촌구석의 다 망해가는 가문의 가주 주제에 내게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려고 들지 마라.”
내게 압도된 건지 아니면 초면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모욕에 어이가 없는 건지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물론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내 할 말만 했다.
“내가 이곳에 온 건 내 친우인 해럴드와 그 딸인 힐데가르트를 위해서이지 네놈을 위해서가 아니다. 이걸 명심하도록.”
“그렇게 잘났으면 혼자 알아서 하지 그러나. 애초에 네놈이 내게 도움을 요청해놓고 그런 태도는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오, 물론 얼마든지 혼자 힘으로도 가능하지. 그런데 후회하지 않겠나?”
“후회? 자네가 말하는 대로 촌구석에서 혼자 잘 살고 있는 내가 후회할 일이 뭐가 있나 모르겠군.”
“덴마크―노르웨이 동군연합의 왕인 하랄 블로탄이 스코틀랜드를,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사자공이 7왕국으로 진군을 준비 중이네. 잉글랜드를 전부 다 점령하고 나면 그다음은 어디라고 생각하나?”
“…미쳤군.”
“미쳤는지 아닌지 한번 두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가?”
“나는 언제나 말한 걸 지키는 사람이야. 그리고 모르는 것 같아서 한마디 첨부해주자면 사자공의 아들인 오토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라는 것도 잊지 말게. 오토가 한때는 내 밑에 있었다는 것도 잊지 말고.”
본래라면 이들을 적당히 어르고 달래며 퀘스트를 진행해야 하지만 나는 쿨하게 복종시키기로 했다. 내게 힘이 있는데 빌빌거리는 것도 웃긴 일이 아닌가?
내가 지랄맞은 북해의 항로를 뚫고 이곳에 온 건 시간 끌지 않고 삼면에서 몰아쳐 빠르게 영국을 점령하기 위해서지 뭔 시발 듣도 보도 못한 시골 가문 가주의 엉덩이를 빨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게 뭘 원하지?”
“편지에 적지 않았나? 힐데가르트 고드윈이 원래 가져야 할 것을 가질 거라고. 그 대가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아일랜드 따위는 자네가 가지게. 이왕 선심 쓰는 거 아르드리(high king of ireland)로 만들어주지.”
“….”
시발.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난이도 때문인가 반응이 영 시원찮다. 짜증이 난 나는 아르단을 한 번 더 닦달했다.
“선택하게. 내게 협조할 텐가 아니면 적대할 텐가?”
“…협조하도록 하지.”
“좋아. 그럼 그 건방진 태도와 반말 정도는 친교의 의미로 봐주도록 하지.”
바이킹식 협상을 끝마친 나는 앞장서서 휘적휘적 걸어갔고 아르단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내 뒤를 따라왔다.
“아무튼, 당분간은 여기서 머물러야 될 것 같은데 방이나 안내해주게.”
“병력들은? 편지에는 정예병들을 끌고 온다고 적어놓지 않았나?”
그의 질문에 나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쏘아붙였다.
“그 많은 인원을 수용해서 쓸데없이 의심받을 일 있나? 적당히 위장시켜서 흩뿌려놨으니 걱정은 집어치우게.”
“그러지. 방은 3개면 되나?”
“아니, 하나면 되네.”
그 말에 아르단은 내 옆에 있는 힐데와 이비를 한 번씩 번갈아 바라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하나도 모자라 둘이라… 해럴드가 알면 관뚜껑을 박차고 일어나겠군.”
그렇게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응접실에 도착했고 나는 집주인이라도 된 것마냥 푹신한 소파에 걸터앉으며 물었다.
“자, 일단 이곳 상황부터 듣도록 하지. 현재 아일랜드의 상황은 어떻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