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6화
“쯧… 자각몽인가.”
나는 분명 힐데와 사랑을 나눈 뒤 잠에 들었을 텐데 눈 앞에 펼쳐진 낯선 광경에 작게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자각몽을 꾸는 이유는 기억의 해금 때문인데 간단하게 얘기하면 여타 게임의 호감도와 비슷한 시스템이다. 새삼스럽게 반응할 것도 없는 게 이전에도 종종 겪어왔던 일이다.
다만 게임과의 차이점이 있었는데 인게임에선 동료 캐릭터의 과거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 동료가 과거에 라그나르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보게 된다는 점이었다.
정확한 메커니즘을 알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 동료와 친밀한 관계가 될수록 더 깊이 과거가 해금되는 구조였다.
그러니 힐데와 몸을 섞고 난 뒤에 그녀와의 과거가 해금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더 해금될 과거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완벽히는 아니어도 이미 힐데와 라그나르의 과거는 거진 다 파악했다. 과거 라그나르가 의뢰를 맡았는데 의뢰의 당사자가 습격당해서 죽었고 그 와중에 아이 혼자만 살아남았다.
그때 살아남은 아이가 바로 힐데였고 라그나르는 그런 힐데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본인이 부모를 대신해 그녀를 양육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을 한 건지 그는 힐데가 제법 자라자 그녀를 정화교단에 맡긴 채 떠났다.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라그나르는 용병단을 이끌고 몰락 귀족이 된 칼리나를 도와주었다.
라그나르의 활약으로 칼리나는 잊었던 백작위를 차지함은 물론 밀라노까지 차지하며 신성 제국의 변경백으로 발돋움했다.
엄청난 공적을 세운 만큼 그녀의 곁에 머물러도 될 터였지만 라그나르는 그 어떤 보상도 마다한 채 칼리나의 곁을 떠났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뒤, 전투 사제가 된 힐데가 라그나르를 찾아왔고 그의 용병단에 합류했다. 그리고 그러던 중에 내가 빙의했다.
이게 지금껏 내가 알아낸 라그나르의 연대기이자 랜덤 변수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내가 모르는 과거가 더 있나?”
뭐,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이미 자각몽을 꾸게 된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기에 나는 영화를 감상하는 기분으로 눈앞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슬슬 눈앞의 풍경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걸로 봐서 곧 주역들이 등장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2명의 사내가 방 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해럴드. 자네 이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르나?”
나는 라그나르. 그러니까 좀 더 젊은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게 제법 기묘한 기분이라는 걸 느끼며 눈앞의 사내들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나도 그 위험성에 대해선 잘 알고 있네. 하지만 평생을 이렇게 쫓겨 다닐 수는 없지 않나?”
“이곳을 떠나면 되는 일 아닌가?”
라그나르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물었지만 해럴드라 불린 사내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를 간다고 한들 노르만의 칼날은 우리를 따라올 걸세. 무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를 추적하지 않았던가?”
“모든 걸 포기할 생각은 없나? 사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네만 자네의 생각은 현실성이 없어. 개인이 국가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네.”
“라그나르. 자네의 말이 정론이네만 사자가 풀잎을 뜯어 먹으면서 살 수는 없는 일 아닌가?”
“필요하다면 풀이라도 뜯어야겠지. 그렇게 고기만을 고집하다간 굶어 죽기 마련이네.”
“그렇게 굶어 죽어서 가죽이라도 남긴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건 아니잖나.”
평행선을 달리는 대화에 신물이라도 난 건지 라그나르는 눈살을 찌푸리며 쏘아붙였다.
“사자치고는 이미 이빨과 발톱이 다 빠진 것처럼 보이네만?”
“하하하, 신랄하구만. 자네가 보기에는 미친 짓이겠지만 그래도 이해해주게 라그나르.”
“이해가 될만한 걸 해달라고 해야지.”
라그나르가 툴툴거리자 사내는 잔에 맥주를 가득 따르며 씁쓸하게 이야기했다.
“라그나르. 자네도 알다시피 노르만 왕조와 윌리엄 1세에게 빼앗긴 왕위를 되찾는 건 우리 가문의 오랜 비원이자 맹약일세. 그리고 그 복수심은 우리가 살아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됐지.”
“비원이니 뭐니 해도 백 년쯤 지났으면 포기할 때도 되지 않았나?”
“우리는 복수를 위해 수많은 것을 희생하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포기할 수 있을 리가 없잖은가. 사냥감이 사라진 세상에서 사냥꾼이 의미가 없듯, 우리 가문에게서 복수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네.”
“그 맹약이 자네들을 붙잡는 족쇄이자 망령이 됐군. 뭐 좋아. 그래서, 누구에게 힘을 보탠다고?”
“노르망디 공작인 로베르 2세일세. 윌리엄 2세가 급사해서 현재 왕위는 윌리엄 1세의 4남인 헨리 1세가 이어받지 않았나? 그래서 장남인 로베르가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고 나섰더군.”
해럴드의 말에 라그나르는 어이가 없는지 코웃음 쳤다.
“자네 미쳤나? 로베르 그놈은 지 애비한테 칼 들이밀고 반란 일으켰다가 털린 놈 아닌가? 노르망디 공작위도 지 애비 죽을 때나 겨우 받았다고 들었는데?”
“그러니까 우리 힘이라도 필요하지 않겠나?”
하긴, 딴에는 맞는 말이었다. 잉글랜드에 기반이 없는 로베르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에 웨식스 왕조의 일원이자 해럴드 2세의 자손들이 도와준다고 하니 당연히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야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것처럼 행동하겠지만 그가 왕이 된 뒤에도 자네들을 인정해줄 것 같나?”
“아일랜드를 우리에게 주기로 했네. 내 아내가 게일인이니 로베르도 마냥 우리를 무시할 순 없겠지.”
“난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네. 그냥 자네가 미친 것 같아.”
“흐흐흐, 미치지 않고서야 이런 일을 할 수 있겠나?”
하긴, 복수라는 건 제정신으로 할만한 짓은 아니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맥주를 단숨에 비운 라그나르는 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물었다.
“그래서, 나는 왜 보자고 한 건가? 설마 그 미친 짓에 동참해 달라는 건가?”
“그것도 고민했지만… 힐데가르트. 이리 오렴.”
사내의 말에 저쪽 한구석에서 놀고 있던 아이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아버지에게 다가왔다.
이제 3~4살이나 됐을 법한 아이는 자신의 아버지 뒤에서 옷깃을 잡은 채 두려운 눈빛으로 라그나르를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라그나르는 최대한 밝게 미소 지으며 아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귀여운 꼬마 아가씨. 이름이 뭐지?”
하지만 아이는 입을 꾹 다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멋쩍어진 라그나르가 입맛을 다시며 일어나려 할 때 아이는 작지만 분명하게 자신의 이름을 이야기했다.
“힐데가르트. 힐데가르트 고드윈.”
“힐데가르트라… 예쁜 이름이구나. 하지만 부르기에는 너무 긴 것 같은데 힐데라는 애칭으로 불러도 될까?”
“…좋아.”
“그래. 힐데. 만나서 반갑구나. 나는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란다. 편하게 라그나르라고 불러주렴.”
“응… 라그나르.”
수줍은 듯 배시시 웃으며 대답하는 힐데가르트의 모습에 해럴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자네 아이와 친해지는 게 제법 능숙하구만. 난 매번 진땀빼는데.”
“자네의 그 우락부락한 얼굴을 보면 누구라도 그럴 거야.”
“이런 젠장. 아무튼, 내가 왜 이 아이를 소개해줬는지 알겠지?”
죽으러 가는 놈이 굳이 자신의 딸을 소개시켜 주는 이유가 뭐겠는가? 굳이 듣지 않아도 그가 자신의 딸을 맡기려 한다는 걸 깨달은 라그나르는 착잡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나 보군.”
“그때 자네 나와 내기했던 것 기억하나?”
“빌어먹을. 그때 술집에서 내기를 하지 말아야 했는데.”
투정하듯 내뱉는 라그나르를 보며 해럴드는 작게 미소 지었다.
“아무튼, 우리가 실패한다면 저 아이에게서 멍에를 벗겨주게.”
“고드윈의 이름을 버리라는 말인가?”
“맞아. 자네 말대로 우리는 고드윈이라는 망령에 씌어 평생을 시달려왔다네. 저 아이에게까지 그런 고생을 시키고 싶지는 않네.”
“…알겠네. 지금 당장 데려가기는 그렇고 나중에 준비가 되면 데리러 가겠네.”
“그래. 나중에 준비가 끝나는 대로 우리가 연락하겠네.”
그 말과 함께 순식간에 광경이 뒤바뀌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좀 더 듣고 싶었지만 기억의 해금은 과거의 일이기에 내가 개입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렇게 바뀐 광경에선 한 사내가 라그나르를 향해 다급하게 보고하고 있었다.
“단장님. 단장님의 친우분께서 지금 적들에게 기습당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누가? 누가 감히 해럴드를 공격한단 말인가!?”
“적들은 헨리 1세의 깃발을 들고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형인 로베르 2세를 도와줄 수 있는 지지기반을 미리 뿌리 뽑으려는….”
쾅!
거칠게 탁자를 내려친 라그나르는 전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갑옷을 걸쳐 입고 있었다. 그렇게 부랴부랴 수하들을 이끌고 갔지만 상황은 정리되어 있었다.
지난번에 봤던 것처럼 그 참상에서 살아남은 건 오직 힐데 혼자였고 라그나르는 자신의 친우가 바랐던 것처럼 그녀를 데리고 와서 본인이 직접 키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꿈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나는 이게 이 세계가 무너지는 전조임을 깨달았다.
아마, 이번에는 이 정도만 보여준다는 거겠지. 시간이 좀 더 흐른다면 남은 전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힐데의 정체가 잉글랜드의 왕위 계승자였다니…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심지어 그녀의 모친이 게일인(켈트족)이라고 했으니 잉글랜드에 한해서 그녀의 계승권과 명분은 절대적이었다.
물론 앵글로색슨족이 세운 7왕국은 진작에 무너졌고 노르만인들이 세운 왕조가 잉글랜드에 들어선 지 오래지만 말이다.
내가 새로 알아낸 사실을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는 사이 과거의 세계는 완전히 무너져내렸고 나는 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현실 세계로 돌아온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주무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방의 풍경은 바뀐 게 없었지만 단 하나 바뀐 게 있었으니 내 옆에 힐데가 누워있다는 점이었다.
― 업적 : 역키잡을 달성했습니다.
“…어이가 없네.”
헛웃음을 터뜨린 나는 내 옆에 누워서 새근거리며 자고 있는 힐데의 배를 가볍게 간질였다.
내 가벼운 손장난에 그녀는 고양이처럼 몸을 말며 작게 웅얼거리더니 이내 두 눈을 부릅뜨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라, 라그나르?”
“잘 잤어. 힐데?”
“어제… 어젯밤은….”
아마 저 표정을 보아하니 어젯밤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물론 나는 조금 짓궂게 장난을 치기로 했다.
“제법 뜨거웠지? 그것도 그거지만 난 네가 그렇게 말을 잘 타는지는 몰랐는데?”
은근슬쩍 어제 그녀의 기승위 실력을 얘기하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힐데가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어제 그녀는 요부처럼 허리를 흔들며 내 정액을 착취했다.
농담이 아니라 그저께 칼리나에게 쪽쪽 빨렸는데 힐데한테까지 빨리니 죽을 것 같았다.
어쩌면 오딘이 날 반신으로 각성시킨 건 이걸 염두에 두고 그런 게 아니었을까? 사실 하렘도 말이 좋아 하렘이지 정력이 감당돼야 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 잊어 주십시오. 그건… 그건 술 때문이었습니다.”
아, 역시 술에 취해있던 건가? 하긴, 그녀 성격에 맨정신으로 그런 말을 하진 못할 테지. 그래서 술의 힘이라도 빌린 걸 테고.
“그래? 그럼 술을 안 마시고 한번 해볼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하인리히가 보낸 전령이 저택에 당도했기에 나는 눈물을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나야 했다.
젠장. 괜스레 어젯밤에 하인리히에게 하루의 기한만 준다고 한 내가 원망스러워졌다. 하지만 나는 이내 고개를 흔들며 아쉬움을 털어냈다. 꼭 오늘만 날도 아니잖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