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그렇게 사자공과 필리프를 설득한 나는 하인리히에게 회담을 요청했다. 이쪽에서 계획을 다 세워놔도 저쪽에서 고개를 저으면 끝 아니던가.
다만 하인리히가 바보가 아니라면 내 제안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다른 걸 포기하면 포기했지 황제라는 타이틀을 포기할 순 없을 테니까.
“그래. 하인리히 전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하긴, 이런 중대사를 듣자마자 결정할 순 없겠지. 시간이 없다며 강요하기도 모양새가 안 좋았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그럼 하루 뒤에 다시 오겠네.”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하인리히 전하께서 기한에 대해선 따로 말씀이 없으셨….”
“이보게.”
“예. 공작 전하.”
내가 불쾌한 기색으로 말을 끊자 눈앞의 시종은 긴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나는 나지막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하루 뒤에 오겠다고 했네. 더 말이 필요한가?”
“…죄송합니다. 공작 전하. 제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가서 자네 주인에게 전하게.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더 이상의 협상은 없을 거라고.”
“꼭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나는 수행원들을 이끌고 칼리나의 저택으로 향했다. 지금쯤이면 칼리나도 일어났을 테니 가서 밥이라도 같이 먹어야겠다.
설마 오늘까지 하자고 달라붙지는 않겠지. 아무리 내가 반신이라지만 그래도 쉬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었다. 애초에 내가 정액 만드는 기계도 아니잖은가.
그렇게 칼리나의 저택으로 돌아온 나를 맞아준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힐데?”
“오랜만입니다. 라그나르.”
그녀는 응접실에 앉아 홀로 와인을 들이켜고 있었다. 술이 꼭 기분이 좋을 때만 마시는 게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 오랜만이고 자시고 뭔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어?”
“으음… 좀 마시고 싶어서 마셨습니다. 그보다 거기 서 있지 말고 이쪽에 앉으시지요.”
그녀는 자신의 옆자리를 팡팡 내리쳤고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의 옆자리로 갔다. 옆에 앉자마자 달콤한 와인 향이 풍겨오는 걸로 봐서 제법 많이 마신 모양이었다.
“사흘… 아니 이틀 만이던가? 벌써 총본사에 갔다 온 거야?”
내 기억이 맞다면 정화교단의 총본사는 동로마에 있을 터였다. 물론 랜덤변수가 적용돼서 다른 곳에 있다고 해도 이틀 만에 왕복으로 다녀올 만한 거리는 아니었다.
“대주교님께서 근방을 순례하고 계셨기에 금방 일을 처리할 수 있었습니다.”
“아… 지금이 그런 시즌이던가?”
바티칸에 처박혀서 어지간하면 나오지 않는 교황과는 다르게 정화교단의 대주교는 고행이라는 이름하에 순례를 다니고는 했다.
여담이지만 종교전쟁을 일으키려면 이 시기를 잘 노려서 정화교단의 대주교를 암살하면 된다. 물론 그리스도의 흔적을 풀풀 남긴 채로 말이다.
나 역시 종종 그런 적이 있었는데… 저 말을 들으니 괜스레 양심에 찔리네. 이랬거나 저랬거나 좋은 의미로 순례를 다니는 양반을 죽인 셈이니까.
“예. 그리고 다행히 성녀 자리가 비어있었기에 부족하지만 제가 성녀가 될 수 있었고요.”
그녀는 드물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과연 그녀는 교단의 성녀만이 입을 수 있는 옷을 입고 있었다.
그래봤자 군대 계급장마냥 장식 몇 개 더 붙은 것에 불과했기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그거일 테지만 교단 소속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터였다.
“잘 어울리네. 근데 성녀 임명이라는 게 그렇게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진행하는 거였던가?”
교단의 성녀라고 하면 한 교단의 우두머리나 다름없는 위치다. 그걸 길바닥에서 ‘지금부터 선생님은 성녀로 임명됐습니다. 땅땅땅.’ 이렇게 얘기하고 끝내버리던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주교님도 순례 중이셨기에 지금은 약식으로 임명된 거고 추후에 정식으로 임명 절차를 거칠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데… 아, 혹시 내 도움이 되고 싶어서 이렇게 헐레벌떡 온 거야?”
정화교단의 사제가 날 지지하는 것과 성녀가 지지하는 것은 무게감이 다르다. 성녀쯤 되면 그녀의 의지가 곧 교단의 의지였기 때문이다.
내가 정곡을 찔렀는지 힐데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그녀는 늘 그렇듯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차갑게 대꾸했다.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전 그저 언제까지고 이곳에 붙들려 있기 싫어서 그런 겁니다.”
“하긴 이런 정치적인 얘기가 재밌는 건 아니지. 머리 아프기도 하고.”
“글쎄요. 당신은 여기에 계속 머물고 싶을 텐데요? 어젯밤도 칼리나 변경백과 제법 즐겼다고 들었습니다만.”
힐데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내 직감이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큰일 난다고 경보를 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흐음. 꽤 즐거운 시간이었지. 뭣하면 오늘 밤 너도 함께하지 그래?”
그런 힐데의 말에 대답한 건 칼리나였다. 그녀는 지금 막 일어났는지 다소 흐트러진 모습이었는데 눈빛만큼은 형형히 살아있었다.
“관심 없습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나중에 내가 라그나르와 결혼하면 와서 축가나 불러주는 게 어때? 내 배 속의 아이에게 축복도 좀 걸어주고. 사례금은 넉넉하게 줄게.”
능글맞게 비꼬는 칼리나의 모습에 힐데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붙였다.
“그거 알고 있습니까? 당신. 처음 만날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그건 똑같네. 사실 나도 네가 마음에 안 들었어. 애초에 라그나르가 날 떠난 것도 너 때문이었거든.”
둘 사이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신경전이 오갔지만, 칼리나는 이내 능글맞게 웃으며 얘기했다.
“아무튼, 라그나르의 물건을 한번 보게 되면 절로 관심이 가게 될걸? 너도 어렸을 때 라그나르랑 같이 살았다며? 그럼 보기 싫어도 아침마다 봤을 텐데?”
뭔가 짐작이 가는 바가 있는지 힐데는 입을 다물었고 칼리나는 여전히 나른한 표정으로 날 보며 가볍게 미소 지었다.
“어차피 난 라그나르 당신이 내 곁에만 있어 준다면 여자 하나둘 정도는 상관없어. 애초에 당신 같은 남자를 나 혼자 독점한다는 게 욕심이라는 걸 아주 잘 알거든.”
“아니, 칼리나. 나는….”
“나나 저기 성녀로도 부족하면 그 이븐 시나인지 뭔지 하는 당신 주치의까지 포함해서 즐겨도 괜찮아. 듣자 하니 오늘 욕탕에도 같이 들어갔다던데.”
그 순간 힐데가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쏘아보았고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변명했다.
“힐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대단하군요. 라그나르. 혹시 반신이 되면서 늘어난 게 정력밖에 없습니까? 당신이 그렇게 행동력 넘치는 사람인 줄은 몰랐군요.”
“아니, 그게 아니라….”
뭐라고 변명을 해야 될까? 아니, 애초에 이게 변명을 할 거리던가? 사람이 살다 보면 마음에 맞는 사람끼리 섹스를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렇게 마음먹고 당당히 얘기하려던 찰나 힐데는 뜬금없이 다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당당하게 얘기했다.
“뭐, 당신도 남자인 이상 어쩔 수 없지요. 이해합니다. 그런 당신의 일그러진 욕망을 성녀인 제가 아니면 그 누가 포용해 줄 수 있겠습니까?”
그런 힐데의 말에 칼리나는 어이가 없다는 듯 코웃음 치며 대꾸했다.
“하, 아까까지만 해도 관심 없다더니 어이가 없네. 저게 성녀가 할 소리야? 성녀가 아니라 탕녀라고 해도 믿겠어.”
다만 난 힐데의 말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뭐지? 뭘 어떻게 생각하면 의식의 흐름이 그렇게 흘러가는 거지? 그보다 저건 힐데가 내 성욕을 풀어주겠다는 얘기인가?
“힐데. 그게 무슨 뜻인지 알아?”
“물론입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하는 힐데의 모습에 난 입을 다물었다. 난 여타 소설 속 주인공처럼 둔감하진 않기에 힐데가 내게 가진 감정이 가족에 대한 애정 이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힐데와 그 이상의 관계가 되는 것을 생각해본 적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그러나 내가 아닌, 라그나르의 기억이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 라그나르에게 있어서 힐데는 거의 딸이나 다름없지 않던가. 물론 서로 피가 섞인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불안해진 건지 힐데는 내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애초에 당신이 저한테 저와 계속 같이 있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그런 말을 하진 않았으니 라그나르가 한 말일 텐데 그건 어디까지나 가족을 향한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딸아이가 ‘나는 아빠랑 결혼할 거야.’라는 말처럼 말이다.
“라그나르. 제게 남아있는 건 당신밖에 없습니다. 또, 그때처럼 절 내버려 두고 가실 겁니까?”
그녀는 술에 취한 건지 분위기에 취한 건지 촉촉한 눈동자로 날 바라보았고 나는 차마 그녀의 눈동자를 저버릴 수 없었다.
그 모습에 칼리나는 작게 혀를 차며 자리를 비켜주었고 나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힐데를 부축한 채 내 방으로 데려갔다.
솔직히 그녀를 내 방으로 데려오면서도 이게 맞나 싶었지만 이미 낙장불입이었다. 그렇게 침대 위에 힐데를 앉히자 그녀는 내게 몸을 기댄 채 가볍게 머리를 비볐다.
“라그나르. 제가 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는지 알고 있습니까?”
그녀의 말에 뭐라 할 말이 없기에 나는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어렸을 때는 당신이 사창가에 가는 걸 그냥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요. 한번은 어린 마음에 그게 너무 싫어서 엉엉 울면서 당신을 찾으러 갔는데 기억하십니까?”
그녀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보았더니 과연 그녀의 말대로 그랬던 기억이 있었다.
라그나르가 힐데와 함께 살던 시기에 그는 시간이 꽤 오래 걸리는 일을 수주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용병 일을 마치고 돌아온 라그나르는 동료들과 함께 술을 마신 뒤 사창가로 갔다.
평상시에는 힐데 때문에 곧장 집에 돌아왔지만 당시 라그나르도 20대였고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였기에 거리낌 없이 갔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힐데가 다른 용병들은 돌아오는데 당사자인 라그나르가 돌아오지 않자 엉엉 울면서 그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렇게 사창가에서 라그나르를 찾은 그녀는 라그나르가 도망치지 못하게 옷을 꼭 붙잡은 뒤 집에 가자며 엉엉 울었었다. 그게 아마 열 살 때쯤이던가.
“어렴풋하게?”
내 말에 힐데는 히죽 웃으면서 나를 끌어안았다. 단순히 옆에 앉아있을 때와는 다른, 숙성된 와인의 향기가 그녀에게서 물씬 풍겨왔다.
“원래는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댈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도 모르게 조급해진 모양입니다.”
그녀의 말대로 힐데는 나와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징조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마, 그녀 나름의 위기의식이 발로된 게 아닐까?
칼리나와 내가 결혼하게 되면 자신을 떠날 거라는 불안함이 그녀를 떠밀었을 것이다. 거기에 최근 이비가 눈에 띄게 미인이 된 것도 있고.
“뭐, 아까 그 여자가 얘기했던 것처럼 저 혼자 당신을 독점할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단둘이 있을 때만큼은 저만 생각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번에도 침묵으로 일관할까 했지만, 침묵이라는 건 제법 비겁한 행동이었다. 자신의 의견을 내비치지 않은 채 상대의 행동만을 강요하는 행동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나는 침묵을 깨고 그녀에게 내 마음을 전하기로 했다.
“사랑해. 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