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칼리나와 몇 차례나 몸을 섞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10번까지는 센 것 같은데 그 이후로는 손가락이 모자라서 세지 않았다.
중요한 건, 나와 그녀가 침실에 들어간 게 점심 무렵이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여전히 낮이었다는 점이었다.
“끄응… 죽겠네.”
뒤늦게 밀려오는 허리의 통증과 피곤함을 실감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가볍게 주위를 둘러보니 격렬했던 정사의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있는데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이쯤 되니 청소를 해주는 시녀에게 미안할 지경이었다. 이런 참사의 원인인 칼리나는 잠에 취해서 누가 업어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자고 있었다.
평상시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는 것과 달리 단정치 못하게 입가에 흐르는 침조차 그녀의 아름다움을 돋보이게 만들고 있었다.
손으로 조심스럽게 입가를 닦아주자 그녀는 가볍게 몸을 뒤척였는데 그 과정에서 이불이 살짝 말려 들어가 그녀의 나신이 훤하게 드러났다.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음심이 솟구쳐 올랐다. 이렇게 천사처럼 자는 모습과 다르게 지난밤 그녀의 모습은 희대의 요부 그 자체였다.
어떻게든 날 쥐어짜 내기 위해 허리를 흔들면서도 쾌감에 취해 흐느끼는 칼리나의 모습은 그 자체만으로 나를 미소 짓게 만들었다.
“아, 이런.”
그 모습을 회상하니 또 아플 정도로 발기해버렸다. 이러다 조만간 뼈가 삭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만 날도 아니니 지금은 욕망을 이겨내기로 했다.
나는 감정을 다스릴 줄 아는 차갑고 냉철한 이성을 지닌 문명인이 아니던가. 그렇게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나는 아직까지 자고 있는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키스한 뒤 방문을 열었다.
서늘한 공기와 함께 앞에는 음식이 놓여있었는데 아무래도 시종들이 차마 문을 열지는 못하고 앞에다 가져다 둔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면 어제 식사를 두고 간다는 소리가 들린 것 같기는 한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뭐라 대꾸를 한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뭐 시종도 어쩔 수 없었겠지.
안에서 뭘 하는지 뻔히 알고 있는데 문을 벌컥 열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열심히 식사를 준비해줬는데 미안한 짓을 했다 생각하며 한쪽으로 치워놓은 뒤 복도로 나오자 집사가 바로 내게 달라붙었다.
“편안한 밤 되셨습니까. 공작 전하.”
“덕분에 편안히 잘 수 있었다네. 그리고 누가 가져온 건지 모르겠는데 식사는 다 식었으니 도로 가져가서 치워주게. 주방에 미안하다고도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하옵고 사자공 전하의 저택에서 사자가 와서 응접실로 모셨습니다. 지금 바로 만나보시겠습니까?”
집사의 말에 나는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이비를 사자공의 저택에 보내면서 내일 아침쯤에 찾아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아침은커녕 점심도 지났을 시간이었다.
“아… 젠장. 많이 기다렸다던가? 지금이 몇 시지?”
“아직 3시가 조금 안 됐을 겁니다.”
“세면만 하고 바로 만나본다고 전하게.”
서둘러 씻기 위해 욕탕으로 가려던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혹시 사자공 전하의 저택에서 온 사자가 이비… 그러니까 이븐 시나던가?”
내 물음에 집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븐 시나라면 그 가면을 쓰신 의사분을 말씀하시는 거잖습니까? 제가 그분의 맨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사자로 오신 분은 굉장한 미인분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른 사람들은 이비의 맨얼굴을 모르던가? 하긴, 알았다고 해도 저주가 풀린 뒤의 얼굴은 모를 테니 저런 반응도 그럴법하지.
“그게 이븐 시나 맞네. 잘됐어. 오라고 하게. 안 그래도 사자공 전하의 저택에 가기 전에 보고받을 게 몇 가지 있었는데.”
“어… 욕실로 들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집사는 내 말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을 욕실로 들인다는 건 상대와 섹스를 하겠다는 얘기였으니까.
솔직히 말해 침대보다 뒤처리도 훨씬 더 편하지 않은가. 괜히 중세시대에 목욕탕이 매춘 장소로 이름 높았던 게 아니다.
물론 몸 씻는 걸 돕기 위해 들일 수도 있겠지만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으면 시녀를 불렀지 주치의를 부르진 않았을 것이다.
거기에 주치의라는 사람이 절로 눈이 돌아갈 정도의 미인이라면 그야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내 주치의인데 문제 될 게 뭐가 있나.”
“알겠습니다.”
다만 집사는 의문을 품었을지언정 즉각 내 말에 군말 없이 복종했고 나는 이비가 오기 전에 옷을 탈의한 뒤 욕조에 몸을 담갔다.
“하아… 근육통 살살 녹는다.”
나는 온수에 의해 온몸의 근육이 노곤하게 풀어지는 것을 느끼며 기분 좋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나만의 작은 사치를 즐기고 있을 무렵 닫아뒀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부, 부르셨습니까. 주군.”
이비는 욕탕의 열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 상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내게 다가왔다.
“아, 미안해. 이비. 내가 오늘 아침에 간다고 했는데… 오랜만에 칼리나랑 회포를 풀다 보니 조금 늦어졌네.”
“아닙니다. 사자공 전하께서도 대충 이해하시는 눈치였습니다. 그래서 절 다시 보내신 거고요.”
물론 대꾸를 하는 그녀의 눈은 이래저래 헤엄치고 있었다. 아무리 상사에 자신이 모시는 주군이라지만 명백한 이성이 옷을 벗고 있으면 당황스럽겠지.
다만 나도 수하에게 몸을 노출하고 그 시선을 즐기는 변태적인 성욕이 있는 건 아니었기에 적당히 수건으로 몸을 가리고 있는 상태였다.
“사실 나도 굳이 부를 생각은 없었는데 시간이 부족하기도 하고 보안이 뚫릴 위험도 있고 해서 여기로 부른 거야.”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벽에도 귀가 있다는 건 딱히 한국에서만 통용되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목욕탕은 비밀 얘기를 나누기에 제법 적합한 장소였다. 애초에 부르지도 않은 사람이 기웃거릴 일도 없을 테고.
“아아, 그, 그러시군요.”
“왜, 너도 같이 들어올 생각이었어? 그것도 나쁘지 않지.”
내가 짓궂게 웃으면서 얘기하자 그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지금에서야 생각하는 거지만, 그녀는 제법 놀리는 맛이 있는 여자였다.
“농담은 이쯤하고, 현 상황부터 얘기해봐.”
물론 어제 칼리나를 통해서 대강 듣긴 했다. 다만 마지막 즈음에 그녀는 거의 울다시피 하면서 신음을 내지르고 있었기에 알아듣는 게 불가능했다.
“예. 일단 칼리나 변경백 각하께서 공식적으로 필리프 전하를 지지해주시고 실제로 검은 용 군단의 일원들 일부가 뉘른베르크로 올라왔기에 힘 싸움에서는 크게 밀리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느 정도 균형이 맞아떨어져서 지금까지 조용했다는 얘기군.”
북부는 사자공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관망만 하고 있었을 테고 슈바벤과 바이에른 공국,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주류는 장남인 하인리히를, 주류를 제외한 나머지 세력과 칼리나의 남부가 필리프를 지지했다는 얘기다.
다른 선제후들이나 유력한 귀족들은 눈치만 보고 있었겠지. 황제가 쓰러졌다지만 언제 나을지 모르는 일이었고 괜히 계승 전쟁에 개입했다가 사자공처럼 영혼까지 털릴 수 있었으니까.
“예. 그리고 사실 장남인 하인리히 입장에서도 황제의 처분을 두고 고심했을 겁니다. 쓰러진 황제 폐하를 편히 보내드리기에는 아직 자신을 지지하는 기반이 탄탄하지 않았고 또, 살해에 대한 부담도 있었을 테고요.”
“뭐, 그야 그렇겠지. 다 죽어가는 노인네라도 아직은 살아있는 상태였을 테니까.”
아무리 중세가 개막장이라지만 그래도 패륜은 심각한 범죄에 속했다. 물론 들키지만 않으면 아무 상관 없을 테지만.
“그렇다고 내버려 두자니 날이 갈수록 필리프의 위세가 커져 가는 모습에 난감했을 겁니다.”
“그러던 와중에 황제가 죽었고, 새로운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서 선제후들을 소집했다는 거군.”
사실 하인리히도 필리프와 내전을 벌이기에는 내심 불안했을 것이다. 차라리 황제가 살아있을 때 그 권력을 승계받은 상태라면 모를까 지금으로서는 무리였다.
그렇다고 미리 계승권 정리를 안 한 황제를 탓할 수만도 없는 게 그도 나름대로 교통정리를 하려고 노력은 했었다.
다만 사자공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서 권위에 큰 타격을 입었고 이를 회복시키기 위해 대규모 숙청을 기획하고 있었다.
세조가 사육신을 숙청하고, 소비에트의 이오시프 스탈린이 대숙청을 감행했던 것처럼, 숙청은 권력을 강화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이었다.
물론 어중이떠중이를 숙청해봤자 별다른 약빨도 없었고 그 때문에 프리드리히는 일부러 그 제물이 되어줄 필리프를 암암리에 밀어주었다.
애초에 나와의 인맥을 가지고 있던 필리프는 프리드리히의 지원까지 받자 순식간에 하인리히를 위협할 수 있을 만한 거물로 성장했다.
그렇게 살이 통통하게 오른 필리프를 숙청하며 장남인 하인리히에게 권력을 승계할 생각이었겠지만 그 전에 황제 본인이 죽어버렸으니 그야말로 죽 쒀서 개 준 꼴이었다.
“꽤 많은 부분이 요약되긴 했지만, 아주 간단하게 정리하면 그렇습니다.”
“좋아. 그거면 충분해. 곧장 사자공 전하의 저택으로 갈 테니 나가서 준비하고 있어.”
“알겠습니다.”
* * *
세면을 마친 나는 적당한 예복을 차려입고 사자공이 머무는 저택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을 따르는 이들과 함께 응접실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었기에 오토가 사자공을 대신해서 나를 맞이해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용담공 전하.”
“아. 오토. 오랜만이군. 사자공 전하는 어디 계시나?”
“안쪽 응접실에 계십니다.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맘 같아선 전장에서 함께 싸운 전우인 자네와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네만 지금은 힘들 것 같고… 나중에 시간 되면 한잔하지.”
“언제든 전하께서 불러주시길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는 오토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어준 나는 응접실 안에서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자공을 향해 인사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사자공 전하.”
“그래 간만일세. 안 그래도 자네 얘기가 나오고 있던 참이었는데 일단 앉게. 자네들은 좀 나가보고.”
내 인사에 사자공은 찌푸렸던 인상을 풀며 자신의 맞은편에 비어있는 자리를 권했다. 그와 동시에 다른 귀족들은 군말 없이 나갔는데 그 모습을 보니 내 위상이 올라가긴 올라간 모양이었다.
“오늘 아침에 온다더니 왜 이리 늦었나?”
“칼리나가 놓아주질 않더군요.”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자 사자공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뭐 그럴 거라 예상은 했네만… 아무튼 지금 상황이 조금 복잡하네.”
사자공은 머리를 감싸 쥐며 현재 정세가 어떻고 다른 귀족들이 누구를 지지하고 등등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물론 들어둬서 나쁠 게 없기에 조용히 듣고 있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렇게 영양가 있는 얘기들은 아니었다.
어차피 다른 귀족들이 뭔 지랄을 하건 현재 가장 큰 발언권을 가지고 있는 건 칼리나와 사자공을 비롯한 다른 선제후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애초에 투표권도 선제후들과 주교들밖에 없다. 물론 아예 다른 이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가진 영향력이 남다르다는 말이었다.
“전하. 복잡하게 갈 것 없습니다. 왜 간단한 길을 두고 돌아가려고 하십니까?”
“설마 그 매듭이 안 풀리니 칼로 자른 미친놈마냥 싹 다 조지자는 얘기는 아니겠지?”
“절 뭘로 보고 계시는 겁니까?”
“바이킹 아닌가? 그리고 자네가 한 걸 보면 대부분 부수거나 힘으로 찍어누르거나 뭐 그러지 않았나? 이제 와서 뭘 그리 새삼스럽게.”
그렇게 얘기하니 또 할 말이 없어졌다. 괜스레 민망해진 나는 헛기침을 하며 얘기했다.
“이번에는 아닙니다. 이 상황을 타개할 기가 막힌 생각을 떠올렸으니까요.”
“일단 들어는 보지.”
사자공은 굉장히 미심쩍다는 표정이었지만, 일단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하지만 이내 내 입에서 나온 말을 들은 그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전하. 혹시 황제가 되고 싶지 않으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