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1화
내가 눈을 뜬 건 수퉁을 죽이고 나서 일주일이 지난 무렵이었다.
솔직히 일주일 동안 죽은 듯이 잠들어있다고 해도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는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것뿐인데 일주일이 지났다니 누가 그걸 믿겠는가.
하지만 그걸 부정하기에는 힐데와 이비의 처참한 몰골 때문에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비는 일주일 내내 쉬지도 않고 날 간호했는지 눈가에는 피로감이 가득했다.
그리고 힐데는 펑펑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있었으며 눈가도 시뻘겠다. 뭐, 굳이 그런 흔적을 보지 않아도 내가 일어나자마자 아이처럼 내게 안겨서 엉엉 울었으니 뭐….
“주군. 몸은 괜찮으십니까?”
“글쎄… 조금 뻐근한 것 빼고는 괜찮은 것 같은데?”
나는 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상태를 점검해봤는데 약간 기운이 없고 배가 고픈 것 말고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손, 발 움직이고 숨 쉬는데 이상 없고 통증이 안 느껴지면 된 것 아닌가?
“혹시 저희를 걱정해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 진짜 괜찮은데?”
“…믿을 수가 없군요. 주군께서는 직접 싸운 당사자시니 모르겠지만 제가 봤을 때 최소한 몇 달은 요양을 하셔야 할 움직임이었습니다.”
“조금 무리한다고 생각하긴 했는데 그 정도였어?”
“아포피스의 힘을 끌어 쓴 저는 물론이고 신성력을 밥 먹듯이 쓰는 힐데가르트 사제님도 사나흘 동안 앓아누웠습니다. 이쯤 되니 왜 신성력을 축복의 저주라고 하는지 알 것 같더군요.”
허탈하게 웃으며 얘기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그녀의 몸 여기저기를 바라보았다. 과연 전체적으로 안색이 창백하고 힘이 없어보이는 게 누가 봐도 환자 그 자체였다.
“이비 넌 괜찮아? 너도 꽤 무리했잖아.”
이비는 다루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아포피스의 힘을 무리하게 끌어썼다. 이미 신성력이 그녀의 일부가 된 시점에서 그런 행동은 정신적인 피로감과 탈력감을 가지고 온다.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내가 그래봤거든. 다만 타고난 신체가 남달랐기에 부작용을 짧게 겪었을 뿐이다. 한숨 자고 나면 깔끔하게 낫기도 했고.
“조금 뻐근하긴 합니다만 주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다만 두 번 하라고 하면 못할 것 같습니다.”
“흐흐, 이것도 하다 보면 나름 괜찮아. 적응되거든.”
“저는 사양하겠습니다.”
“아무튼, 괜찮아보이니 다행이네. 힐데 너는 어디 뭐 다친 곳 있어?”
나는 내 품에 쏙 들어와 있는 힐데를 향해 물었고 그녀는 이상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뜬금없이 왜 유아퇴행을 해버린 건가 싶었지만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종종 그러긴 했다.
어렸을 때 가끔 무서운 꿈을 꾸거나 번개가 치는 날이면 이렇게 내 품에 안겨 들어왔었지. 아무래도 일주일이나 잠들어 있었으니 날 잃어버릴 거라 생각한 모양이었다.
“다 큰 줄 알았는데 아직도 얘였네.”
내 말에 힐데는 저항하듯 뒤통수로 내 가슴팍을 툭툭 두들겼지만, 그마저도 귀여워보였기에 나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상황설명은 이쯤이면 됐고…수퉁은 어떻게 됐어?”
“확실히 죽었습니다. 다만 그대로 두면 시체를 노리는 짐승들이 달려들 것 같아서 제힘으로 소멸시켰습니다.”
이비가 손에 죽음의 기운을 일렁거리며 얘기하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수퉁의 몸도 나름대로 쓸모가 있긴 했지만, 상황도 상황이었고 내가 말하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다.
“수퉁이 살던 집 내부는 뒤져봤어?”
“예. 다만 돈이 될 만한 건 안보이더군요. 술로 보이는 항아리를 몇 개 발견하긴 했지만…뭔가 특별한 힘이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그야 당연히 숨겨놨겠지. 이미 한번 도둑맞았는데 또 아무렇게나 내버려두겠어?”
그렇기에 내가 위험부담을 안고서 그와 싸우는걸 택한 거다. 손기술이나 은신에 능한 동료가 있는 것도 아니고 털다가 중간에 걸리면 앞뒤가 꽉 막힌 집에서 싸워야 했으니까.
거기에 수퉁 몰래 크바시르의 술을 찾는 건 꽤 짜증 나는 일이었다. 집안 곳곳을 뒤져가며 단서를 찾아 퍼즐을 풀 듯 진행해야 했으니까.
더 짜증 나는 건 이게 답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라 랜덤변수가 적용된다는 점이었다. 가령 비밀번호가 1회차 때는 1234였다면 2회차 때는 5678이라는 말이다.
그러니 고인물이라고 해도 답을 찾는 과정을 좀 더 빠르고 부드럽게 할 뿐 단번에 술을 훔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수퉁이 죽은 지금 그깟 퍼즐 따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집주인이 없는데 뭐하러 굳이 조심조심 퍼즐이나 풀고 있단 말인가? 그냥 화끈하게 도끼로 다 박살 내면 그만이다.
“힐데. 좀 일어나봐.”
내가 쓰다듬는 걸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그녀는 불만 어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좀 더 붙어있고 싶은 모양이지만 일단은 술부터 찾아야 한다.
“나중에 실컷 안아줄게. 착하지?”
어린아이에게 얘기하듯 힐데를 어르고 달래자 그녀는 간신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는 힐데의 손을 붙잡은 채 이비와 함께 수퉁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음…여기였던가? 긴가민가하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퉁의 집을 둘러보았다. 이 퀘스트를 깬 지도 꽤 오래돼서 기억도 가물가물한데다 거인이 생활하던 집이라 그런지 한눈에 내부를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그 때문에 나는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고 나서야 결계를 구성하는 물체들을 찾을 수 있었다.
“이비. 저기 문양이 새겨진 벽에 구멍 좀 뚫어주고, 탁자도 박살내버려. 그다음에…스읍…아…뭐더라? 아! 맞아. 저거 벽난로도 부숴버려.”
그렇게 나는 집 안에 있는 가구를 부술 것을 명령했고 그녀는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충실하게 내 명령을 수행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집 뒤편에 있는 창고까지 박살내자 그의 집 한가운데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이 생겼고 이비는 물론 힐데까지 놀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왠지 모르게 둘 다 설명을 바라는 표정이었기에 나는 목을 가다듬은 뒤 설명을 시작했다.
“혹시 비프로스트라고 들어봤어?”
“어…로스트비프 말씀이십니까?”
멍청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이비의 모습에 난 작게 웃은 뒤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소고기 요리 말고.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되나…어, 일단 북유럽 신화에는 차원이 여러 개가 있는데…아니, 됐다.”
굳이 차원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머리 아프게 떠들 것도 없다. 어차피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동전의 양면을 생각하면 돼. 네가 부순 건 동전의 양면을 구분해주던 경계의 매개체들이야.”
“그럼 그 경계가 무너지면서 반대쪽에 있던 게 이곳에 드러나게 됐다는 겁니까? 약간 평행 세계 같은 느낌이군요.”
“정확하진 않은데 대강 비슷해.”
“라그나르. 이런 건 또 어떻게 알았습니까? 혹시 전에도 한번 와본 적이 있습니까?”
힐데의 질문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예전에 퀘스트를 깨봐서 안다고 할 수는 없잖은가. 다행히 내겐 적당한 회피기가 있었다.
“오딘께서 신탁을 내려주셨어. 그분은 이전에도 한번 여기에 와봤잖아.”
내 말에 둘은 긴가민가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고 난 서둘러 지하실로 내려가는 문을 열었다. 어두컴컴한 구멍에선 서늘한 기운이 올라왔고 나는 횃불을 들고 안으로 걸어내려갔다.
“어지간한 보물은 다 이곳에 보관한 모양이군요.”
뒤따라온 이비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보물을 바라보며 감탄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엄중히 경고했다.
“재수 없으면 여기 갇힐 수도 있으니까 다른 건 건드리지 마.”
내 말에 겁을 집어먹었는지 이비는 내게 바싹 붙었고 그렇게 의도치 않게 양손에 꽃을 든 채로 지하실을 뒤졌고 마침내 원하던 술을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있네.”
나는 항아리 안쪽에서 찰랑이는 주홍빛 액체를 보며 미소 지었다. 물론 현실의 내가 직접 크바스를 마셔본 적은 없지만 묘사된 것과 똑같은 색깔이나 향을 풍기는 걸로 봐서 이게 맞는 것 같다.
“생각했던 것보다 양이 좀 많이 적네요.”
“계속 두고두고 마셨을 테니 어쩔 수 없지. 그나마 우리가 마시니까 이 정도 양이 나오는 거지 본인이 마셨으면 딱 한 모금이었을걸?”
사실 게임에서야 아이템 취급이니 얼마가 남았는지 모르지만, 현실이 되다 보니 이런 식으로 디테일하게 바뀐 모양이다.
쇠뿔도 단김에 뽑으랬다고 나는 통을 기울여 남아있는 술을 탈탈 털어냈다. 대충 4잔 정도 나오기에 1잔 분량은 따로 챙긴 뒤 힐데와 이비에게 건네주었다.
“이 한잔을 마시기 위해 그렇게 고생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는군요.”
“의외로 냄새는 평범하네요. 어디 맛은….”
힐데나 이비나 재료에 피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면 저런 말은 못 하겠지? 하지만 난 굳이 그 사실을 얘기하지 않고 가볍게 잔을 부딪친 뒤 술을 들이켰다.
근본이 벌꿀주라서 그런지 달짝지근한 맛이 입안을 감돌았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맛있었다. 술이라기보다는 도수도 생각보다 낮은 것 같은 게 달짝지근한 음료수 같기도 했고.
그래서 내가 엉뚱한 걸 찾은 게 아닌가 싶었는데 효과는 대단했다.
― 신의 술인 크바스를 마셨습니다. 역병 의사 이븐 시나가 ‘운명을 극복한 자’ 칭호를 얻었습니다.
― 운명을 극복한 자 : 예정된 파멸을 뒤집고 자신의 운명을 쟁취해 낸 자에게 내려지는 칭호.
― 운명을 극복한 자의 칭호 효과로 인해 이븐 시나가 아포피스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있게 됩니다.
― 아포피스의 힘에 대한 대가가 대폭 감소합니다.
― 플레이어의 도움을 받아 저주를 해주했기에 이븐 시나는 당신을 향해 충성을 바칠 것입니다. 또한, 그녀는 당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 신의 술인 크바스를 마셨습니다. 전투 사제 힐데가르트의 신성력에 대한 이해도가 대폭 상승합니다.
― 힐데가르트가 ‘성녀’ 칭호를 얻었습니다.
― 추후 정화교단의 본부에 방문 시 정식으로 성녀로서 임명받을 수 있습니다.
― 이후 플레이어는 성녀 힐데가르트가 동료로 있는 한 정화교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 힐데가르트의 호감도가 상승합니다(이미 호감도가 최상입니다.)
“성능 확실하구만.”
나는 조심스럽게 크바스를 홀짝이는 힐데와 이비를 보며 미소 지었다. 둘의 눈에는 상태창이 보이지 않으니 저렇게 태연하게 있는 거겠지.
지금 당장은 둘 다 자신의 몸에 어떤 변화가 생겼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차차 시간이 흐르면 본인들도 깨닫게 되겠지.
그리고 나 역시 크바스를 마셨기에 변화가 일어났다. 다만, 힐데나 이비와는 다르게 내게 생긴 변화는 좀 더 극적이었다.
― 신의 술인 크바스를 마셨습니다. 몸 안에 남아있는 신성력이 크바스와 공명합니다.
― 신체가 신성력을 좀 더 받아들이기 쉽게 변화합니다.
― 플레이어의 몸에 흐르는 피에서 오딘의 힘이 발견됐습니다. 추가로 각성을 진행합니다.
― 반신화가 완료됐습니다.
“이건 상상도 못 했는데?”
나는 뜬금없는 반신화에 헛웃음을 터뜨렸다. 본래는 신성력을 안정시키기만 해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 외의 수입을 거뒀다.
다만 반신화가 당황스러우서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내가 보여주는 이 괴물 같은 힘과 능력의 근원이 신의 힘이었다면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