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퀘스트 창.”
# 메인 퀘스트
― 바이킹을 위한 나라는 없다 : 바이킹들을 규합해 나라를 만들고 초대 군주가 되시오.
# 에픽 퀘스트
― 네 것도 내 것, 내 것도 내 것 : 수퉁이 애지중지하는 크바시르의 술을 훔치십시오. 어떤 방법을 써도 무관합니다.
크바시르에 대해 얘기하려면 북유럽 신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했는데 그는 오딘이나 토르를 비롯한 애시르 신족과 프레이야 같은 바니르 신족 간의 전쟁이 끝난 뒤 평화의 증표로 만들어진 신이었다.
그를 만들어낸 방법이 꽤 어처구니가 없는데 모든 신들의 침과 진흙을 섞어서 오딘이 빚어냈다고 한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정도지만… 애초에 신화니까 그러려니 해야지.
아무튼, 그는 신들의 침으로 빚어졌기 때문인지 굉장히 지혜롭고 현명했는데 이 때문에 신들의 외교관으로 활약을 하게 된다.
사실 화친을 했다지만 꽤 오랜 기간 싸워온 만큼 서로에 대한 앙금도 남아 있을 테고 이야기하기 껄끄러운 것들도 대신해서 전달했기에 제법 신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문제는 그렇게 잘나가던 크바시르가 팔라르와 갈라르라는 난쟁이에게 살해당한다는 점이었다.
삼국지의 장비 급으로 어이없는 죽음을 맞아서 저게 정말 현명한 게 맞나 싶기도 하지만 어쨌든 난쟁이들은 그의 피로 벌꿀주를 만들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술이 바로 크바스였는데 만드는 과정이야 어쨌든 그 성능 자체는 제법 대단했다.
마시는 이들에게 현명함과 지혜, 지식을 선물해 준다고 하니 가히 마법의 술이라고 불러도 무리가 아니었다.
난쟁이들은 이 마법의 술을 미끼로 평상시에 원한을 가지고 있던 길링이라는 거인 부부를 초대한 뒤 끔찍하게 살해했다.
그리고 그 거인 부부의 아들이 바로 수퉁이었는데 그는 부모의 죽음을 알자마자 곧장 난쟁이들에게 쳐들어가 머리를 박살 내버린 뒤 크바스를 강탈했다.
그렇게 수퉁은 30년 된 발렌타인을 마시듯 크바스를 아껴마셨는데 크바시르가 죽어서 술이 된 걸 안 오딘이 몰래 수퉁의 집에 들어가 술을 전부 마신 뒤 도망쳤다는 게 이야기의 골자다.
뭐 중간중간에 수퉁의 딸과 오딘이 관계를 맺고 몰래 술을 마시게 해줬다거나, 독수리로 변신해 도망치는 오딘을 수퉁이 참매로 변해 추격했고 도망치는 와중에 흘린 술을 마신 인간들은 뛰어난 영감을 가진 음유시인이 됐다는 야사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수퉁은 여전히 살아있었고 그가 숨겨둔 크바스는 2통이었다는 게 ‘크바시르의 술’ 퀘스트의 개요였다.
이 술을 얻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는데 오딘이 했던 것처럼 몰래 훔쳐 가거나 아니면 당당히 들어가서 대가리를 깨버리고 취하는 방법이 있었다.
신의 술을 얻는 것치고는 그 과정이 너무 간단한 거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이건 퀘스트를 깨는 것보다 퀘스트를 받는 그 과정이 지랄맞았다.
무슨 수를 쓰든지 북유럽을 통일하는 게 퀘스트 수주 조건이었는데 사실 북유럽을 일통할 정도면 거진 게임 후반이나 다름없었다.
막말로 내가 칼리나라는 뒷배 없이 밑바닥부터 시작했다면 아마 10년은 더 굴러야 이 퀘스트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퉁이 잡기 쉬운 보스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북유럽 신화의 주신이라는 오딘이 몰래 훔쳐 올 정도였는데 굳이 더 얘기할 필요가 있을까?
“퀘스트 자체의 난이도도 지랄맞은데 퀘스트 발생 조건도 지랄맞으니 인기가 없지.”
그 덕에 이 퀘스트를 깨는 플레이어는 거진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냥 업적작 할 때 한 번 깨고 마는 정도?
다만 바이킹이 이 퀘스트를 깨다 보면 얻게 되는 부가 수입이 있는데….
―울프베르트 퀘스트를 완료했습니다.―
“이거지. 이런 거라도 없으면 누가 이딴 정신 나간 짓을 하겠냐고.”
울프베르트. 바이킹 소드. 다마스커스강으로 만든 무기와 비견될 정도로 강력한 오버테크놀러지의 결정체다.
원래 이 퀘스트는 흔한 RPG가 그렇듯 별 볼 일 없는 작은 마을에서 자질구레한 심부름을 들어주면서 시작되는 대서사시였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감동을 받기도 하고, 배신도 당하고, 반전도 마주하고… 근데 길어도 너무 길다. 귀찮기도 하고.
아무튼, 스토리대로라면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싸울 때 오딘 신앙과 토르 신앙으로 나뉘어서 참전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도 아니면 스웨덴을 기독교로 개종시킨 뒤 덴마크와 노르웨이까지 통수쳐서 조지고 다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도 가능했고.
다만 개발자가 심혈을 기울여 준비해 놓은 이 모든 컨텐츠를 무시하고 한 번에 깰 수 있는 히든 루트가 있었으니 바로 하랄의 왕위 복귀를 도와주는 것이었다.
어차피 쫓겨난 상태의 하랄이 왕위를 되찾기 위해선 노르웨이와 군힐드, 에릭을 조져야 했고 그 과정이 거진 북유럽의 통일과 엇비슷하다는 게 히든 루트의 개요였다.
실제로 노르웨이는 에릭의 죽음으로 쪼그라들었으며 한창 내전을 진행 중이잖은가. 거기에 스웨덴은 우리에게 순종적인 태도를 보이며 복속했으니 시스템상 통일로 인정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왕위를 탈환한 하랄이 그에 대한 감사 인사로 울프베르트 무기를 공급해준다는 게 스토리의 골자였다.
물론 바이킹 출신의 병력들을 이끌 때만 울프베르트가 적용되겠지만 어차피 바이킹들을 이끌고 영국을 침공할 생각이니 상관없다.
울프베르트 퀘스트도 깨고, 크바시르의 술 퀘스트도 수주된 걸 확인한 나는 떠날 시간이 왔음을 깨달았다.
어차피 이제 내가 북부에 있어봤자 할 것도 없는 데다 퀘스트 후딱 깨고 중부로 내려가야 한다. 황제가 죽기까지 채 한 달도 안 남았으니 나름대로 준비는 해둬야 하지 않겠는가?
“하랄. 이제 난 잠시 떠나봐야 할 것 같네.”
“으음… 벌써 떠나려고 그러나?”
“시간이 없네. 어차피 자네도 북부를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나도 황제 사후를 대비해야 되거든.”
황제의 죽음은 그냥 사람 하나 죽는 게 아니었다. 황제의 죽음은 곧 권력의 공백을 의미했고 이 틈을 노려서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싸우는 상황이 굉장히 많았다.
특히나 지금처럼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정당한 후계자인 장남과 차남이 칼을 맞대며 싸우는 상황이라면 쉽사리 내전이 끝나지 않을 것이다.
괜히 제국이 내전으로 망한다는 소리가 있는 게 아니다.
“알겠네. 그럼 중부의 일을 마무리하는 대로 최대한 빨리 돌아와 주게.”
난 고개를 끄덕이며 하랄의 어깨를 툭 쳐준 뒤 방을 나섰다. 이곳을 떠나기로 결정되자 나는 빠르게 뒷마무리를 시작했다.
우선 나와 함께 온 수하들의 활약에 따라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주었다. 또한 정의공과 사자공에게 보낼 편지도 손수 작성했으며 언젠가 이번 도움에 보답한다는 얘기를 꼭 첨부했다.
그 이외의 자잘자잘한 일은 고드프리가 도와주었고 그 덕분에 나는 그에게 병력의 철수를 맡기고 힐데, 이비와 함께 유틀란트반도 북부에 있는 벤쉬셀튀섬으로 향했다.
이곳은 유틀란트반도의 최북단에 있는 꽤 큰 크기의 섬이었는데 퀘스트의 나침반은 이곳 어딘가에 수퉁이 있음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문제는 그게 끝이라는 건데 이곳에서 꼭꼭 숨어있는 거인을 찾는다는 건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 때문에 추적술을 익히거나 고고학을 익힌 동료를 통해서 수퉁이 있을 법한 위치를 줄여나가며 그의 소재를 파악하지만 그건 일반적인 플레이어들에게나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난 업적작을 위해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이 섬을 이 잡듯이 뒤진 적이 있었고 덕분에 수퉁이 있을법한 곳을 특정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여섯 번의 시도 만에 그가 머무는 곳을 찾아냈고 나는 풀숲에 몸을 숨긴 뒤 도끼를 꺼내 들었다. 애초에 자유도가 넘치는 게임이었기에 뭔 수를 쓰든 술만 뺏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당당히 수퉁을 죽이기로 했다. 크바스를 훔치는 데 성공해도 혹시 들키거나 흔적을 남기면 분노한 그가 끊임없이 날 추적해 오기 때문이다.
거기에 한번 들킨 이상 죽이기 전까지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되어 날 괴롭힌다. 가령 밤에 자는데 뜬금없이 날 급습 한다거나 적의 편에 서서 싸운다거나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죽이는 게 뒤탈을 남기지 않고 제일 깔끔하게 처리하는 방법이다. 문제는 보기보다 상대가 강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으음… 충분히 잡을 수 있겠지?”
“힘들 것 같은데요. 당신은 저 몸에서 뿜어지는 신성력이 안 느껴집니까? 지금이라도 병력들을 끌고 오는 게 더 낫지 않겠습니까?”
드물게 힐데가 부정적인 의견을 냈지만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병력들은 끌고 와봤자 고기 방패도 안 될걸?”
많은 동료 중에 힐데와 이비만 끌고 온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는데 퀘스트 자체가 3명까지는 문제없지만, 그 이상의 인원을 끌고 오면 적에게 보정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거기에 힐데는 원래도 전투사제였기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전투력을 가지고 있는 데다 아포피스의 힘을 자각한 이비 역시 그에 비견될 정도였다.
그 때문에 난 둘을 믿고 여기서 수퉁을 잡기로 했다. 레이드 실패의 대가는 죽음일 테지만 어차피 지금 크바스를 못 얻어도 나는 말라 죽어갈 거다.
통제하지 못하는 신성력이라는 건 그런 거니까. 이비는 아포피스의 화신이 되어 세계를 멸망시키려 들 테고 난 자아를 잃어버린 채 죽을 자리를 찾아 헤매는 광전사가 될 것이다.
그런 암울한 미래를 막고 희망찬 미래를 거머쥐기 위해 나는 도끼로 상대의 머리를 정조준한 뒤 그대로 집어 던졌다.
후우우웅!!
무서운 속도로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도끼는 그가 가볍게 머리를 꺾자 허무하게 빗나가 버렸다. 나는 허탈한 마음을 감춘 채 새 도끼를 꺼내 들고 풀숲을 나왔다.
“내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
“그렇게 살기를 풀풀 풍기는데 모르는 게 이상하지. 다만 손님일지도 몰라 지켜만 보고 있었는데… 첫 만남부터 도끼부터 던지는 걸 보면 적이 확실한 것 같군.”
“딱히 그대의 적이 될 생각은 없어.”
내 대답에 수퉁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흠, 그럼 도끼를 던진 건 가벼운 인사였나 보군. 뭐 그렇다고 하지. 그래서 자네는 누군가. 어린 친구여.”
“내 이름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오딘의 대전사다.”
내 대답에 수퉁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손을 튕기며 이야기했다.
“오딘… 오딘이라. 혹시 술을 정정당당히 가져갈 생각조차 못 하고 쥐새끼처럼 슬금슬금 기어들어 와서 몰래 훔쳐 간 도둑놈을 말하는 건가?”
으음, 틀린 말은 아닌데 왠지 오딘을 섬기는 내 입장에서 저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조금 그렇네.
“이왕이면 지혜롭게 일을 처리했다고 해주게.”
“어떻게 포장하든 오딘 그놈이 비열한 마법사인 건 바뀌지 않는 사실 아닌가? 뭐 오딘 얘기는 이쯤하고… 자네가 이렇게 날 찾아온 이유는 뭔가?”
“자네가 몰래 숨겨놓은 술이 하나 더 있다고 하더군. 그걸 가지러 왔네.”
“가지러 왔다라… 누가 들으면 내게 맡겨놓은 줄 알겠군. 젊은 친구. 우리는 그런 행위를 갈취라고 한다네. 그리고 이건 범죄행위지.”
“주인 없는 물건을 수거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정중하게 널 죽여버리겠다는 의견을 피력하자 그는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웃더니 이내 거대한 검과 방패를 꺼내 들었다.
“자네의 의지가 확고하니 어쩔 수 없군. 딱히 자네를 죽일 마음은 없지만 혹여나 죽더라도 날 원망하지는 말게.”
빈말이 아닌 듯 그가 들고 있는 검의 크기를 볼 때 스치기만 해도 중상이었고 방패는 한번 잘못 맞으면 온몸이 박살 날 것만 같은 위압감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그가 무기를 들자마자 은근하게 느껴지던 빈틈마저 전부 사라졌기에 나는 긴장감을 놓지 않고 오딘을 향해 기도했다.
“천공신 오딘이시여. 그대의 대전사를 이끄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