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8화
해가 중천에 뜬 어느 날.
유례없을 정도로 수많은 군중들이 쾨벤하운의 광장으로 몰려들었다.
하랄 블로탄이 왕위를 찬탈당했을 때도, 하랄이 다시 왕위를 되찾았을 때도 문을 걸어 잠근 채 숨죽이고 있던 시민들의 흥미를 끌어낸 건 오늘이 바로 여왕과 국왕의 처형일이었기 때문이다.
혹시 모를 불상사를 대비해 수많은 병사들이 광장을 물샐틈없이 에워싸고 있음에도 군중들은 꾸역꾸역 안으로 들어왔다.
물론 하랄이 완전히 통제하고자 한다면 개미 한 마리 얼씬도 못 하게 할 수 있었지만 하랄은 둘을 공개처형 함으로써 자신이 완전히 돌아왔다는 걸 모두에게 각인시키고 싶었기에 굳이 군중들을 내치지 않았다.
그렇게 약속된 시각이 되자 군힐드와 에릭은 사지를 결박당한 채 처형장으로 끌려왔다. 에릭은 어느 정도 체념했는지 얌전히 끌려왔지만 군힐드는 아니었다.
죽음이 두려웠던 건지, 아니면 자신이 얕잡아보던 동생에게 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는 건지 그녀의 몸에는 발버둥의 기색이 만연하게 새겨져 있었다.
머리는 봉두난발에 옷은 풀어 헤쳐져 있었고 그러다 간수에게 한 대 맞았는지 뺨이 시퍼렇게 부어있었다.
그렇게 짐덩이마냥 질질 끌려온 그녀는 에릭의 옆에 강제로 무릎 꿇려졌고 그걸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하랄은 목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자랑스러운 덴마크 왕국의 국민들이여.”
“내가 나의 누이와 에릭에게 왕위를 잃던 날. 나는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나를 따르던 야를들은 복수라는 이름의 숙청에 목숨을 잃어야 했으며 그들의 영지는 손 쓸 틈도 없이 무너졌고 그곳에 사는 이들은 끔찍한 고통을 받아야 했다.”
물론 왕국 전체와 싸울 게 아닌 이상 군힐드와 에릭도 적당한 시점에서 그들과 타협했을 테지만 어차피 지금 시점에서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기나긴 싸움의 승자는 하랄이었고 그가 모든 권력을 틀어쥔 만큼 그가 쥐를 가리켜 사자라고 하면 사자가 되는 법이었다.
“어쩌면 죽음은 축복이었을지도 모른다. 살아남은 이들은 저 폭군들의 강압적인 통치와 폭정에 시달려야 했다. 그들의 통치하에서 이곳은 살아있는 헬헤임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나는 저 머나먼 곳, 니플헤임과도 같은 곳에서 조국이 무너져가는 걸 지켜만 봐야 했다. 난 그곳에서 내 조국이 무너져 내리는 걸 바라보며 내 무력함을 실감해야 했다.”
“내 비록 왕위를 찬탈당했다지만 군힐드가, 에릭이 나보다 더 덴마크를 잘 다스려준다면 나는 기꺼이 내게 주어진 의무와 책임을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조국과 내 국민들을 힘으로 짓밟았고 폭정을 일삼으며 사치를 벌이기에 바빴다. 그렇게 덴마크는 점차 무너져 갔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내게 주어진 마지막 사명을 깨달았다.”
물론 하랄이 얘기한 것들은 얼마든지 군힐드와 에릭의 입장에서 반박할 수 있는 얘기들이었지만 지금 이곳에 그들을 변호해줄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 자신마저도.
“나의 국민들이여. 내 비록 몸은 덴마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지만 나는 단 한시도 나의 조국 덴마크를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나는 리가에서 복수의 칼을 갈며 이곳으로 다시 돌아올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왕국을 위하여, 나를 믿고 기다리는 이들을 위하여.”
“그리고 마침내! 나는 든든한 조력자와 함께 화려하게 귀환했으며, 거짓된 왕들을 격파해 승리를 거두었고, 다시 자유를 되찾았다.”
“하지만 이는 어그러진 것을 다시 원래대로 되돌린 것에 불과하다. 나와 그대들, 나아가 덴마크가 한 발자국 더 나아가기 위해선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저들과 작별해야 한다.”
“저들의 죽음으로써 우리는 스스로를 억압하던 사슬을 해방하고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약도 심하고 제대로 된 논리는 아니었지만, 군중들을 현혹하기에는 충분했다. 그들은 철저한 방관자가 되어 모든 잘못과 과오를 군힐드와 에릭에게 떠넘겼다.
“마녀에게 죽음을!”
“하랄 블로탄 전하 만세!”
그들은 하랄의 선동에 호응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분노의 함성을 내지르며 군힐드와 에릭을 향해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군힐드. 나의 누이여. 죽기 전에 남길 말이 있는가?”
누군가 던진 돌에 맞았는지 이마에서 새빨간 피를 흘리며 표독스러운 눈빛을 지은 군힐드는 나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나와 에릭이 폭정을 펼쳤다고 했더냐!? 그래, 그렇다고 하자. 허면 저들은 다를 것 같은가!?”
“말이야 그럴듯하게 하지만 하랄은 결국 자기 힘으로 이룬 게 아무것도 없다.”
“내 말이 거짓말 같은가? 장담하건대 신성 제국의 용담공, 라그나르가 아니었다면 오늘 처형당하는 건 내가 아니라 하랄이 됐을 것이다!”
“하랄 블로탄은 결코 라그나르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을 것이고 그대들은 하랄이 진 빚으로 인해 원금은커녕 이자만 갚다가 파멸하게 될 것이다.”
“기억하라! 우매한 이들이여! 대가 없는 호의는 결코 없다는 것을!”
악을 쓰듯 내지르는 군힐드의 말에 군중들은 돌을 던지는 걸 멈췄고 나는 분위기가 경직된 걸 느꼈다. 되는대로 내지르는 것 같지만 저 여자는 죽는 그 순간까지 하랄에게 엿을 먹이고 있었다.
사실 하랄이 날 어떻게 생각하건 덴마크인들에게 나와 에릭은 별로 다를 게 없을 것이다. 군힐드는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에릭의 도움을 받았고 하랄은 내 도움을 받았으니까.
그렇기에 나는 이 기회를 통해 확실히 선포할 생각이었다.
“덴마크 왕국의 국민들이여. 나는 제국의 용담공이자 하이르 앗 딘 참살자이며 니스의 지배자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다.”
내가 입을 열자 광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확실히 그대들에겐 내가 에릭 그 이상의 폭정을 펼칠 수 있는 존재일 수도 있을 것이다.”
“허나 에릭과 내가 다른 점이 있다면 에릭은 목적을 가지고 군힐드를 도왔지만, 나는 순수한 선의로 하랄을 도왔다는 것이다.”
“생각해보아라. 애초에 제국의 공작인 내가 뭐가 부족해서 그대들을 수탈한단 말인가?”
“내 천공신 오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건대, 내가 하랄을 도운 건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호의로 한 일이다. 그러니 내가 에릭과 같이 군림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내 선언에 군힐드가 거짓말이라며 고래고래 소리쳤지만, 하랄의 턱짓에 그녀는 강제로 입에 재갈을 물린 채 처형대에 몸을 처박혀 참수당해야 했다.
“에릭 블러드엑스. 그대는 할 말이 없는가?”
“없다. 패배한 자가 뭐 더 할 말이 있겠는가. 빨리 내 목숨도 거둬 군힐드의 곁으로 보내다오.”
밖으로 끌려 나온 물고기처럼 펄떡이며 반항했던 군힐드와 다르게 에릭은 모든 걸 포기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물론 난 그런 에릭의 발작 버튼을 알고 있었고 그를 위해 마지막 선물을 건네주기로 했다. 이대로 아무것도 모른 채 죽는 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에릭! 내가 그대를 위해 마지막으로 준비한 선물이 있는데 보고 가는 게 어떤가?”
내 말에 에릭은 떨궜던 고개를 들었고 나는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채 내 옆에 다소곳하게 서 있는 이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그녀는 내가 어깨를 툭툭 치자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뒤덮고 있던 후드를 벗어넘겼고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에릭의 두 눈동자는 이 이상 없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내가 빌려준 예언자의 성능은 어떻던가?”
그제야 일이 어떻게 흘러간 건지 깨달은 에릭은 핏발이 선 눈동자로 날 노려보며 소리쳤다.
“라그나르!!!!!!!!”
“하하하하하, 내가 준비한 선물이 제법 마음에 들었나 보군. 그렇게 기뻐해 주니 나도 준비한 보람이 있구만.”
“네놈은 결코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내 반드시 네놈을….”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게 그의 유언이 되었다.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망나니의 칼날이 목을 베었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는 그렇게 죽음을 맞이했다.
툭. 데구르르…….
얼마나 원통했는지 그의 눈에는 여전히 핏발이 서 있었고 나는 그걸 바라보며 내 옆에 서 있는 이비를 향해 물었다.
“이런, 이비. 네 주군이 죽었는데 기분이 어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제가 섬기는 주군은 오직 용담공 전하 한 분뿐입니다.”
“하하하, 에릭이 들었으면 피눈물을 흘렸겠네.”
뭐, 이미 죽었으니 이 대화를 듣지도, 피눈물을 흘리지도 못하겠지만 말이다.
* * *
에릭과 군힐드의 사망.
이 사건은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삼국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우선 덴마크는 그 둘의 죽음으로 내전이 종결됐음을 선포했고 스웨덴의 왕인 에이리크는 선지자라며 추앙받고 있었다.
사실 스웨덴의 야를들 입장에서는 하랄의 승리를 낮게 점쳤는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우선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데다 소문이란 과장되는 법이었고 난 이곳에서 뭔가 크게 이름을 떨친 적이 없었다. 거기에 하랄은 이미 한 번 모든 걸 내팽개친 채 도망친 전적이 있었다.
반면 에릭은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국왕으로서 북부 전반에 영향력을 과시하고 있었으니 그들 입장에서 누구를 고평가할지는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무리 제국의 공작이라지만 과할 정도로 굴종적인 외교 태도를 보이는 에이리크에게 어느 정도 불만이 쌓여 있던 상황이었다.
헌데 순식간에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 둘을 참수해버리자 다들 손바닥 뒤집듯 에이리크의 통찰력과 정치력을 칭송하는 상황이 나오게 된 것이다.
스웨덴 입장에서 에릭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군주였는데 그런 그를 어린애처럼 가지고 놀았다? 더 볼 것도 없이 바로 계산이 나오지 않던가.
그 때문인지 무역에 대한 협상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들은 북방의 패자가 된 내 심기를 거스르고 싶어 하지 않았고 그것과 별개로 내가 제법 괜찮은 조건을 내민 까닭이었다.
우선 나는 고틀랜드를 중간 기항지이자 무역의 중심지로 삼았는데 나는 그곳을 장보고의 청해진 같은 곳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실제로 발트해의 정중앙에 위치해서 지리적으로 용이하기도 했고 이는 스웨덴에게 있어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일단 자국의 영토를 중심으로 무역판이 돌아간다는 건 무역을 주도할 수 있음은 물론 어떤 사건이 터져도 빠르고 안전하게 대응할 수 있다는 얘기였으니까.
뭐, 그 이외에도 여러 가지 협약을 맺었지만 크게 중요한 건 아니었고 제일 충격적이면서도 어이가 없는 결말을 맺은 건 노르웨이였다.
이들은 어이없게도 자신들의 왕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자 바로 내전을 시작했다.
이해가 안 갈지도 모르겠지만, 아니 사실 나도 이해가 가는 건 아니지만 그들은 에릭이 죽자마자 비어있는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그 누구도 에릭의 복수를 부르짖지 않는 모습을 보며 권력의 무상함을 느꼈지만, 어쨌건 노르웨이는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합의했다.
덴마크도 전쟁을 끝내긴 했지만, 현 상태는 입원 직전의 환자나 다름없었고 왕국을 단결시키기 위해서 아직까지는 노르웨이를 공공의 적으로 내버려 둘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북부의 전쟁을 대강 마무리 지은 나는 시간이 난 김에 퀘스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사실 생각해보면 통일 전쟁을 벌인 게 퀘스트 하나 깨자고 벌인 일이었으니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진 것 같았지만 이 퀘스트는 충분히 그런 수고로움을 감수할 만했다.
북유럽 최고의 현자인 크바시르의 피로 만든 벌꿀술을 얻을 수 있는 퀘스트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