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화
아군이 전투에서 승리하기는 했지만, 전투에서 승리한다고 전쟁에서 승리하는 건 아니었다.
물론 적의 수뇌가 잡히고 적이 가진 병력이 대부분 소모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왕이 죽었다고 게임이 끝나는 체스가 아니었다.
왕이 죽으면 퀸이, 퀸이 죽으면 비숍이, 비숍이 죽으면 나이트가 그 유지를 잇는 아주 지랄맞은 게임이었다. 그래서 게릴라가 좆같은 거고.
그래서 나는 그 이후의 처리를 두고 하랄과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음… 그러니까 하랄 자네는 우선 쾨벤하운부터 점령하고 생각하자는 거지?”
“맞아. 왕국의 수도는 쾨벤하운이고 그곳이 가지는 상징성은 어마어마하네. 수도에 남아있는 놈들이 헛짓거리를 하기 전에 서둘러 왕국의 수도를 점령해야 하네.”
“이미 왕국의 수도는 우리의 손아귀에 들어온 거나 다름없네. 애초에 거기서 어중이떠중이가 왕위를 탈취한다고 해도 우릴 상대로 어쩔 텐가?”
애초에 에릭이 이렇게 무모한 공격을 해온 것도 셀란에 처박혀 있어봤자 답이 안 나왔기 때문이다. 왕위를 가지고 있던 에릭도 그러할진대 다른 이들은 어쩌겠는가?
“하랄. 부디 흥분을 가라앉히고 냉정해지게. 우리는 아직 유틀란트반도도 다 점령하지 못했네. 비록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야를들이 도망쳤고 중립을 지키는 야를들도 존재하네.”
지금 급한 건 수도 따위가 아니다. 만약 최북부의 야를들이 다 좆돼보라면서 노르웨이와 손을 잡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렇게 되면 교통도 거지 같은 북부까지 원정을 감행해야 하는데 솔직히 우리에겐 그럴 여력이 없다. 그러니 청소를 할 거면 이미 군을 일으킨 지금 무조건 마무리 지어야 했다.
그리고 그건 나보다 하랄이 더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런데도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면 조금 답답할 정도다. 물론 왜 그런 고집을 피우는지 알고는 있지만….
“라그나르. 그들의 숫자가 얼마나 된다고 보는가? 어차피 그들은 우리에게 저항할 의지를 잃었으니 수도만 점령하면 알아서 다 복속할 걸세.”
하랄답지 않게 너무 낙관적인 전망이었다. 애초에 우리에게 저항했던 놈들이 도망치거나 항전하면 항전했지 항복할 리가 있겠는가?
“하랄. 나는 자네가 어떤 심정을 가지고 이 자리에 섰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걸세. 내 어찌 창자가 끊어지는 그대의 고통을 감히 이해한다 말할 수 있겠나?”
“그렇다면….”
하랄이 무언가 얘기하려 했지만 나는 냉정하게 그의 말을 잘랐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일세. 하랄. 자네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굉장히 감정적인 상태야. 그리고 그런 자네를 멈춰 세울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네.”
내 말에 하랄은 피식 웃으며 자신의 잔에 와인을 가득 따랐다. 그는 말없이 와인을 단번에 들이킨 뒤 우울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라그나르… 난 자네를 만난 뒤 지금까지 자네의 말을 따라왔네. 자네의 제안을 이해할 수 없어도, 나와 생각이 다를지라도 난 자네가 하자는 대로 했어.”
“자네는 명실상부하게 나보다 더 뛰어났고 자네의 선택은 언제나 최선의 결과를 가져왔지. 그리고 지금도 라그나르 자네의 말이 맞을 걸세.”
“하지만 이번만큼은 내가 욕심을 부릴 수 있게 해주지 않겠나? 내가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해왔는지 자네도 알지 않나?”
“나 스스로도 이게 잘못된 거라는 건 알고 있네. 하지만 생각해보게. 무려 20년일세. 20년. 솜털이 파릇파릇하게 나기 시작했던 어린아이가, 이렇게 나이를 먹어 손에 굳은살이 배기고, 이마에 주름살이 새겨질 동안 꿈꿔왔던 상황이 지금 눈앞에 있는데 내 어찌 참을 수 있겠나?”
하랄의 말에 나는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때로는 감성이 이성을 넘어설 때도 있는 법이기에 나는 이번만큼은 하랄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좋아. 자네 말대로 하도록 하지. 다만 병력을 둘로 나누세. 자네는 휘하 병력을 끌고 가서 쾨벤하운을 복속시키게.”
“자네는?”
“나는 군힐드와 에릭을 끌고 유틀란트반도를 한 바퀴 돌면서 중립을 지키는 야를들에게 선택의 시간이 왔음을 알려야지. 그리고 우리에게 대적한 이들을 마무리 지어야 하지 않겠나?”
“가능하겠나? 자네에게 엄청난 비난이 쏟아질 텐데?”
나와 하랄은 지금 이후로 항복하는 야를들은 전부 버리기로 합의를 했다. 아니, 버린다기보다는 모조리 참수하고 가문의 씨를 말려버릴 생각이었다.
불리해지니 하는 항복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거기에 불만도 잠재우고 본보기도 필요했기에 철저히 박살 내기로 한 것이다.
애초에 긴 시간 동안 전향할 기회를 줬는데도 군힐드와 에릭의 편에 서 있었다는 건 본인이 그 둘을 충성할 것을 선택했고 그에 대가를 치를 준비가 됐다는 얘기다.
“그렇긴 해도 왕인 자네가 하는 것보단 내가 악역을 맡는 게 낫지 않겠나?”
“알겠네. 그리고… 고맙네.”
“친구 사이에 뭘 그러나. 그럼 고생하게.”
그렇게 합의를 끝낸 우리는 얘기했던 대로 움직였다. 하랄은 곧장 셀란섬으로 넘어가서 남아 있던 병력들을 제압하고 쾨벤하운을 접수했다.
그리고 다른 것보다 쾨벤하운을 복구하는 데 온 힘을 쏟았고 그사이 나는 유틀란트반도를 순회공연하며 모두에게 에릭과 군힐드의 패배를 각인시켰다.
뭐 사지가 결박당한 에릭과 군힐드가 감옥에 갇혀 있는 걸 보여주니 싫어도 알게 될 수밖에 없었지만.
아무튼, 그에 대한 야를들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성문을 열고 내게 항복하거나 아니면 원수를 갚겠다는 그런 진부한 말들을 내뱉으면서 칼을 겨누던가.
당연히 내게 덤빈 이들은 전부 박살이 났으며, 거짓으로 항복해 날 독살하려던 야를은 본인은 물론이요 그 가문의 일원이라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참수했다.
그렇게 가문 2~3개 정도 멸문시키고 나자 몇몇은 우리가 가기도 전에 성문을 활짝 열고 우리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에게 항복하는 야를들도 많아졌고 나는 그들을 참수하는 대신 하랄이 직접 판단해야 한다는 이유를 대며 그들을 합류시켰다.
사실 항복한 야를들까지 전부 조지면 살기 위해 결사항전을 할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고 그것들을 하나하나 조지고 다니기에는 시간도, 보급도 여유롭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었다.
물론 이미 살생부에 목록이 올라가 있던 이들을 셀란섬까지 데려갈 필요가 없었던 나는 그들을 배 하나에 몰아넣고 먼바다로 나오자마자 곧장 배를 침몰시켰다.
당연히 이 기묘한 사고에 대해서 여러 말들이 나왔지만 나는 가볍게 무시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고 설사 살아남은 이가 있다고 해도 내게 이에 대해 따지고 들 수는 없었다.
하랄의 친우이자 내전에서 군힐드를 사로잡는 군공을 세운 내게 그런 의문을 제시한다는 건 죽고 싶다는 말밖에 안 됐으니까.
그리고 지금, 나는 당당히 쾨벤하운에 입성했고 하랄은 그런 나를 맞아주었다.
“그간 고생했네. 교통도 불편한 북부를 돌아다닌다고 힘들었겠어.”
“말해 뭐하겠나. 한동안은 푹 쉴 생각이야.”
내가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얘기하자 하랄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에서 며칠 머무르다 가지 그러나. 자네 성격상 작센으로 돌아가면 또 일을 할 것 같은데 여기서 며칠 쉬다가게.”
“안 그래도 스웨덴과의 일도 있으니 당분간은 여기에 머물러야 할 것 같네. 온 김에 마무리 짓고 가야 하지 않겠나?”
“알겠네. 그리고 군힐드와 에릭말인데… 내일 광장에서 형을 집행할 생각이네. 어차피 덴마크에서 더 이상 우리에게 적대하는 이들은 없지 않나?”
아마 이게 하랄이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내 입성을 두 팔 벌려 환영한 것도 내가 군힐드와 에릭의 신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사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 둘을 죽여야 진정한 의미로 전쟁이 끝날 테니까.
만약 둘이 살아있다면 그들은 모든 반란의 구심점이 될 것이다. 실제로 그들이 영향을 끼치든 아니든 말이다.
그 예로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2세는 어린 나이에 황위를 찬탈당해 처참하게 죽고 그 시신은 바다에 유기되었다.
헌데 죽었음이 분명한 알렉시오스 2세의 이름으로 여러 차례 반란이 일어났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비슷한 사례로 세조가 왕위를 찬탈한 후 이미 실각한 지 오래인 단종을 죽인 것도 그런 연유에서였다.
그 때문에 적대적인 야를들까지 전부 제거했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하랄은 바로 다음 날 광장에서 형을 집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은 나와 하랄이 친히 군힐드와 에릭에게 전해주기로 했다. 원래 기쁨은 함께 나눌수록 커진다고 하지 않던가.
* * *
늦은 밤. 나는 하랄과 단둘이서 성 내부의 깊숙한 지하감옥으로 향했다. 입구에 발을 들였을 뿐인데도 쾨쾨한 냄새와 썩은 내가 풍겨왔고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군.”
“그놈들에게는 이런 곳도 사치야. 사실 내가 고문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 둘은 내게 감사해야 할 걸세.”
뭐,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하랄이 고문을 지시하지 않은 건 이런 환경에서 고문까지 당한 상태로 있다간 병에 걸려 죽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랄에게 있어 이 둘은 대미를 장식할 최고급 소재였다. 그런 둘을 병으로 편하게 보내주고 싶을 리가 없잖은가.
그렇기에 둘은 의외로 나름 괜찮은 지하 감옥에서 생활하다가 사흘 전에야 이런 깊숙한 감옥으로 이송된 것이었다.
“여길세.”
말을 마친 하랄은 근처 횃대에 불을 붙여 감옥 안을 훤히 밝혔고 나는 한쪽 구석에 널브러져 있는 군힐드와 에릭을 볼 수 있었다.
쓰러져있는 자신의 누이의 모습에 하랄은 입가를 씰룩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가 조롱섞인 안부 인사를 건넸다.
“누님. 어떻게, 감옥 안의 생활은 좀 괜찮습니까? 내 나름 신경 써주라고 했는데 괜찮은지 모르겠구려.”
“너무 안락해서 눈물이 나는구나. 동생아.”
“하하, 누님이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에 이런 곳에 머물게 해줄 걸 그랬소.”
하랄의 값싼 도발에도 군힐드는 표정의 변화 없이 그를 노려보며 저주의 말을 입에 담았다.
“정녕 네가 승리했다고 생각하느냐? 하랄? 아니, 너는 그 값싼 승리를 위해 재앙을 불러들였다. 이제 그 재앙이 너를 삼킬지니 네가 어떤 식으로 비참하게 죽어갈지 기대가 되는구나.”
나와 하랄의 사이를 이간질하려는 군힐드의 모습에 하랄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글쎄… 비참하게 죽는 건 누님이 아닐까 싶소. 내가 그때 얘기하지 않았소? 반드시 누님의 목을 베어버릴 거라고.”
“푸흐흐흐,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못 하는 겁쟁이가 말은 잘하는구나.”
“애써 허세를 부려봤자 결국, 역사는 날 승리자로 기억할 거요. 그리고 누님은 영원한 실패자로 이름 남겠지.”
그 말에 군힐드는 입을 다물었고 그걸로 대화는 끝이 났다. 어쨌든 대화는 둘이서 하는 거였고 하나가 입을 다문 이상 대화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랄과 군힐드 둘 다 입을 다물자 나는 철창 밖에 쭈그려 앉아 에릭에게 반가움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잘 지내고 있나? 왕위 찬탈자.”
쾅!!!
내 말에 시체처럼 누워있던 에릭은 두 눈을 번뜩이며 내게 달려들었다. 물론 튼튼한 감옥의 철창 덕에 그의 손은 내게 닿지 못했다.
“아직도 기운이 남아있는 걸 보면 제법 잘 지내고 있는 모양이군. 다행이야.”
“개자식! 널 죽여버리겠다! 죽여버리겠어!”
“안타깝지만 그럴 순 없을 것 같네. 이미 한 번 경험하지 않았나?”
내가 뭐라 하건 그는 어떻게든 내 멱살을 쥐기 위해 철창 밖으로 손을 뻗었지만 쓸데없는 발버둥일 뿐이었다.
“라그나르!!! 이 개자식!!! 이 비겁한 자식!!! 토르께서 반드시 네놈을 파멸로 이끌 것이다!”
“하하, 오딘께서 날 보우하실 테니 걱정할 것 없네. 아무튼, 먼저 가서 발할라에서 기다리고 있게나. 뭐, 이런 편안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발할라에 갈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지만.”
“으아아아아!!!!!”
발악하는 그를 바라보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충분히 즐길 만큼 즐겼으니 이제 가야 하지 않겠나? 다만 그냥 가기는 아쉬웠기에 한마디 더 덧붙여줬다.
“아, 혹시나 발할라에 가게 되면 오딘께 꼭 안부 전해주게. 그리고 내 손으로 발할라에 보낸 이들이 제법 되니까 그들이랑 친하게 지내면 그래도 외롭진 않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