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그리고 이건…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전하의 앞으로 보낸 편지입니다.”
전령은 부들부들 떨면서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에릭에게 건넸고 에릭은 반쯤 맛이 간 눈으로 그 편지를 받아들었다.
당연히 저 안에 좋은 말이 쓰여 있을 리 만무했지만, 그래도 읽어야 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위대한 왕위찬탈자. 에릭 블러드엑스에게.
왕위찬탈자여. 그때 리가에서 만난 뒤로 꽤 오랜만에 만나는 것 같은데 잘 지내고 있었소?
뭐, 지금 상황을 보아하니 별로 안녕하진 않을 것 같구려.
그래서 내가 그때 경고하지 않았소? 사람은 너무 과한 욕심을 부리면 그 탐욕에 집어삼켜지는 법이오.
뭐, 굳이 내가 주저리주저리 떠들어봤자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테니 잡설은 이쯤에서 마무리 짓겠소.
다른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편지를 보낸 건 그대에게 명예롭게 항복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요. 그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 상황은 그대에게 절망적이오.
군힐드는 우리의 손에 사로잡혔고, 그녀를 따르던 야를들은 각자의 영지로 도망쳤고, 그녀가 이끌던 병사들은 죽거나, 우리에게 포로로 잡히거나, 전부 와해되었소.
사실, 지금에서야 하는 말이지만 위대한 여왕 전하께서 도망칠 생각만 안 했더라도 이렇게 되진 않았을 건데 피아를 떠나서 참 안타까운 선택이라고 생각하오.
그러니 그대라도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도록 내가 편지를 보내 조언을 해주려고 하는 것이오.
위대한 왕위찬탈자여. 솔직히 이 정도면 꽤 긴 시간 동안 즐기지 않았소? 애초에 나와 하랄은 그대에게서 뭘 뺏으려는 게 아니라 그저 잘못된 걸 원래대로 되돌리려는 것뿐이오.
만약 그대가 모든 걸 포기하고 우리에게 항복한다면 그대가 군힐드와 함께 조용히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보겠소.
그대는 내 제안이 터무니없다 생각하겠지만 글쎄… 솔직히 이 정도면 지금 상황에서 그대에게 나쁘지 않은, 아니 오히려 굉장히 관대한 제안이라고 생각하오.
만약 그대가 끝까지 우리에게 대적하려 한다면, 안타깝지만 나는 압도적인 힘으로 그대를 찍어누를 수밖에 없소.
군힐드? 음, 그녀의 안위도 보장은 못 하겠군. 지금은 굉장히 정중하게 모시고 있지만 알다시피 하랄 블로탄이 그녀에게 가진 원한이 꽤 깊소.
혓바닥과 사지를 자르고 두 눈을 뽑아서 병사들에게 던져주자는 걸 간신히 말리느라 진땀 뺐소. 아마 그의 원한은 그대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일 것이오.
아무튼, 그녀의 처우는 그대가 어떤 판단을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오. 하지만 앞서 얘기했듯 긴 시간을 끌게 되면 나조차 장담할 수 없소.
그녀의 목은 꽤 값어치가 있고 그녀의 죽음은 꽤 많은 것을 변화시킬 테니까.
일단 그대는 군힐드와 결혼함으로써 국왕이 됐으니 그 정통성이 흔들릴 테고 하랄은 마지막 남은 정당한 덴마크의 왕위 계승자가 될 거요.
물론 자녀들이 있는 걸로 알고 있지만 그 정통성이 하랄에 비하겠소? 당연히 덴마크의 모든 이들이 그대를 적대할 테고 하랄을 경배할 테지.
거기에 듣자 하니 불만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꽤 강압적으로 통치했다고 하더군. 아마 그들에게 있어서 지금은 큰 기회가 아니겠소?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쯤에서 줄이도록 하겠소. 지혜롭고 현명한 그대라면 뭐가 최선의 선택인지 잘 알고 있을 거라 믿겠소.
솔직히 그대도 그 나이에 홀아비가 되고 싶지는 않을 것 아니오?
아, 그리고 노파심에 하는 말이지만 그대도 내가 평상시에 어떤 식으로 상대에게 편지를 쓰는지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오.
그런 만큼 이 편지는 조롱과 능욕을 위해서 쓴 게 아닌, 그대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조언이라는 걸 꼭 감안해주기 바라오.
그대에게 천공신 오딘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신성 제국의 용담공.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으흐흐흐… 크하하하하. 라그나르… 라그나르… 라그나르!!!!”
광인처럼 웃던 에릭은 이내 라그나르의 이름을 부르며 편지를 구겨서 집어 던졌다.
조롱과 능욕이 아니라 조언이라고? 애초에 이따위 편지를 보낸다는 것 자체가 자신을 능욕한다는 걸 모르고 있는 건가?
군힐드의 안위가 어쩌고 어째? 감히 그 입으로 군힐드를 입에 담는단 말인가?
끊임없이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에릭은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이성과 냉정을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심호흡을 했다. 통제하지 못하는 분노는 시야를 어둡게 만들 뿐이다.
우선 에릭은 냉정하게 현 상황을 분석했다.
군힐드는 사로잡혔다. 유틀란트반도는 이미 적의 손아귀에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하겠지.
이곳에 남아있는 병력의 숫자는 끌어모아도 채 3천이 되지 않는다. 물론 징집을 하면 그 숫자를 늘릴 수는 있겠지만 라그나르와 하랄의 정예병을 상대로는 고기방패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패색이 짙어지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려 하겠지. 그러면 오히려 이쪽의 사기만 흔들릴 뿐이다.
결국 자신이 가용 가능한 병력의 숫자는 최대로 잡아도 3천이라는 얘기다.
허면 이 병력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가? 이곳 셀란섬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하다못해 이곳 쾨벤하운에라도 틀어박혀서 버텨야 하는가?
아니, 그건 아니다. 라그나르는 이미 천 명의 병력으로 쾨벤하운을 털어먹은 전적이 있었다. 그건 그의 능력이 뛰어난 것도 있겠지만 내부의 구조를 다 파악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인정하긴 싫지만, 자신은 아직 내부의 배신자가 누구인지 색출조차 하지 못했다.
수성전에 들어가면 자신은 이곳저곳을 지휘하느라 바쁠 테고, 배신자가 성문이라도 여는 날에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사로잡히고 말겠지.
그리고 사이좋게 군힐드와 함께 참수당해 저잣거리에 목이 대롱대롱 매달릴 것이다.
“최악이군.”
거기에 믿었던 스웨덴까지 라그나르와 동맹을 맺었으니 이미 자신들은 사방으로 포위된 것과 다름없었다.
셀란은 나름대로 크고 물자도 풍족하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적들이 차근차근 섬을 점령하여 자신의 목을 조여오거나 이전처럼 섬 여기저기를 약탈한다면 자신들은 말라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그와 결전을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인가?”
물론 노르웨이로 도망치는 방법도 있었다. 허나 노르웨이의 지원군이 박살 나면서 자신의 지지기반도 무너졌는데 노르웨이로 가서 뭘 한단 말인가.
오히려 괜히 덴마크와 관계를 맺어 노르웨이까지 박살 나게 생겼다고 압박을 받겠지.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라그나르라면 절대 후환을 남겨두지 않는 타입이었다.
아마 얼마나 긴 시간을 들이더라도 노르웨이를 침공해서 자신의 목을 자르려 하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노르웨이 내부의 야를들을 충동질해서 자신의 목을 베게 할 테고.
결국, 에릭은 정면으로 돌파해야 함을 깨달았다. 그게 아니고선 방법이 없었다.
항복은 애초에 선택지에 없었다. 그가 항복한다고 자신을 살려줄지 죽일지도 모르겠지만 설사 살려준다고 해도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고 싶진 않았다.
자신은 왕이었고, 죽을 때도 왕으로 죽어야 했으니까.
“지금 당장 군힐드를 구출하러 가겠다. 전 군대를 동원해라.”
* * *
<퓐섬 – 오덴세 항구 근처의 평야>
“흠, 여기서 저 친구들을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팔짱을 낀 채 내 눈앞에서 휘날리는 에릭의 깃발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런 내 옆으로 피곤한 얼굴의 하랄이 다가오며 대꾸했다.
“난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자네 설마 에릭이 진심으로 그 편지에 적은 것처럼 항복할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
“아니, 나도 그럴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쾨벤하운에 틀어박히거나 다른 곳으로 도망칠 줄 알았거든. 질 게 뻔한데 이런 멍청한 짓을 할 이유가 어디 있나.”
“뭐,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거기에 도망친다 한들 어디로 도망칠 것이며 그렇게 도망친 이를 누가 따른단 말인가?”
완전 내로남불 같은 대사를 내뱉은 하랄의 모습에 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보게 하랄. 이런 말은 그렇지만 자네도 왕위를 찬탈당했을 때 도망쳤고 그 덕에 이렇게 재기에 성공한 것 아닌가?”
“크흠, 나는 그… 도망이 아니라 작전상 후퇴를 한 것뿐이네.”
“아, 그래. 뭐 그렇다고 하자고.”
뭐, 따지고 보면 그를 이곳 퓐섬에서 맛난 것도 필연이라면 필연이었다.
나와 하랄은 굳이 이 전쟁을 질질 끌 생각이 없었고 그 때문에 저쪽에서 헛짓거리를 하기 전에 셀란섬으로 가는 교두보인 퓐섬을 점령하고 싶어 했다.
그를 위해선 퓐섬의 최대 도시이자 항구도시인 오덴세를 점령해야 했고, 반대로 저쪽에선 우리와 결착을 위해 유틀란트반도로 오기 위해선 오덴세를 거쳐야 했다.
서로 목적지는 다를지라도 이동하는 길이 같으니 각자의 군대가 중간에서 마주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중간의 평원에서 대치하게 된 우리는 곧바로 대응 태세를 갖췄고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 숫자는 거진 3~4배나 차이날 정도였다.
이쪽은 1만을 가볍게 넘길 정도였는데 반해 저기는 3천이 될까 말까 했으니까. 아마 저조차도 박박 긁어모아서 마련한 군세일 터였다.
최후의 발악을 하는 에릭의 모습이 미련해 보이면서도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기에 나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고 상대측에서도 에릭이 앞으로 말을 몰아 나왔다.
그렇게 서로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때까지 가까워지자 나는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만나서 반갑네. 에릭 블러드엑스. 헌데 여기까지는 무슨 일인가? 혹시 내가 그대에게 보낸 편지를 받지 못했나?”
“나를 능욕하는 문구가 적힌 불쏘시개 말인가?”
“내가 긴 시간 동안 심사숙고해서 그대에게 해줄 조언을 적은 편지를 불쏘시개라고 표현하다니, 가슴이 아프군.”
내가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자 에릭은 날 죽일 듯이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마음에도 없는 개소리는 집어치워라. 라그나르. 나는 네놈과 농담 따먹기를 하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니야.”
“그건 나도 매한가지네.”
“그럼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돌아가서 죽음을 맞이할 준비나 하는 게 어떤가?”
그가 사납게 얘기했지만 나는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고 그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태도와 공격성은 자신의 빈곤함을 허세로 감추고 있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그 때문에 나는 헤어지기 전 그를 향해 진심이 담긴 덕담을 한마디 건넸다.
“토르가 부디 그대의 바람을 들어주길 빌고 있겠네. 망치나 휘두르는 무식한 신이 자네의 바람을 들어줄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네.”
* * *
물론 반전 따위는 없었다.
이게 에릭이 주인공인 영화였다면 에릭의 기묘한 계책으로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와 하랄은 목숨을 구걸하며 관객들은 그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낄 테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에릭은 분전하기는 했지만, 전투는 아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흘러갔다. 우선 나는 군힐드에게서 승리한 뒤 마냥 쉬고만 있던 건 아니었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 사자공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그는 이왕 도와주기로 한 것 화끈하게 도와주었다. 그렇게 내가 그에게 받아 낸 비밀병기는 바로 로마인들이 쓰던 투창인 필룸이었다.
필룸의 용도는 간단했는데, 적과 싸우기 전 필룸을 던진다. 당연히 적들은 방패로 방어할 테고 필룸은 상대의 방패에 꽂힌다.
문제는 이게 창날 부분을 유연하게 만들어내서 박힌 뒤에 구부러진다는 점이었다.
필룸의 무게는 통상 2~5kg 정도였는데 상대 입장에선 이런 짐 덩어리를 달고 싸우는 건 양발에 모래주머니를 차고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였기에 상대는 방패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런 최고의 보조 무기였던 필룸이 사장된 건 가성비가 쓰레기였기 때문이었다. 필룸이 구부러진다는 건 상대가 재활용을 하지 못하지만 이쪽에서도 재활용을 하지 못한다는 얘기였다.
하지만 전원이 방패를 드는 바이킹을 상대로 최고의 효율을 발휘했기에 한 번 정도는 과감히 투자할 만했다.
거기에 이쪽의 숫자가 압도적이었기에 그렇게 많은 필룸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실제로 단 두 번의 투창으로 적의 방패벽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물론 이를 악물고 필룸을 매단 채 싸우는 것도 가능했지만 하랄과 나의 정예병은 짐 덩어리를 달고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한 이들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방패를 버린 이들은 아군의 화살 세례에 고슴도치가 되어 죽어갔으니 적들이 우리를 이기는 건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내겐 완벽한 승리였지만 단 한 번의 회전으로 회심의 승리를 노리고 있던 에릭으로서는 울분이 터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승부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었고 나는 그를 봐줄 생각이 없었다.
이순신 장군님께선 언제나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을 만들었고 이길 수 있는 상황에만 나가 싸워서 승리를 거두었다.
혹자는 그걸 보고 비겁하다 할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그런 상황 자체를 만드는 게 장수의 능력이었다. 쉽게 승리할 수 있는 길을 내버려 두고 굳이 돌아가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질 싸움을 이기는 건 결코 명장이 아니다. 진정한 명장이란 애초에 질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으며 마땅히 이겨야 할 싸움을 이기는 자. 그게 곧 명장이었다.
결국, 한 줌도 되지 않는 에릭의 병력들은 전부 장렬하게 죽음을 맞이했고 에릭이 아군에게 사로잡히면서 전투는 아군의 대승으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