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내 채찍질에 말은 갈기를 휘날리며 적군을 향해 돌진했다. 그리고 그런 내 뒤를 랜스로 중무장한 윙드후사르들이 뒤따랐다.
본래 기병 돌격은 몇 번이고 랜스차징을 하며 적의 방진을 무너뜨리는 것이지 이렇게 무식하게 개돌을 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억지로 길을 뚫기로 했다. 적군 우익의 이탈로 본대의 대열까지 흐트러진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부족한 틈을 메꿀 예비대까지 우익으로 빠진 상황이다.
이런 절호의 기회를 위험하다는 이유로 놓친다면 난 후대에 병신이라 낙인찍히고 두고두고 욕을 먹을 것이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를 잡기 위해 헤타이로이와 함께 전장의 최선두에 섰듯, 나 역시 군힐드를 사로잡기 위해선 그만한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물론 날 따르는 윙드후사르들의 숫자가 채 50이 안 됐지만, 어차피 적진을 휘저어 혼란을 유도하고 군힐드를 사로잡는 게 목표였기에 이 정도로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이들을 이끄는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아니던가.
나는 입술을 깨문 채 계속 말을 채찍질했고 말은 눈앞에 장애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의도대로 멈추지 않고 달려 나갔다.
곧 중무장한 거대한 생물체의 돌진에 겁먹은 적 병사들의 눈동자가 보일 정도로 가까워졌고 나는 그대로 눈앞에 있는 병사의 몸을 꿰뚫었다.
콰아앙!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거대한 소리가 전장을 뒤흔들었고 내 앞을 가로막고 있던 병사는 창끝에 꿰뚫려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허공을 날았다.
물론 반발력과 함께 내게도 엄청난 충격이 전해졌지만 나는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말은 거칠게 투레질하면서도 내 의도대로 따라주었고 나는 눈앞의 적들을 분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런 내 뒤를 따라 윙드후사르들이 연쇄적으로 충격을 감행했고 하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병력을 진군시켰다.
견고한 댐을 무너뜨리는 건 작은 구멍 하나면 충분했다. 그처럼 내가 만들어낸 작은 틈은 적의 대열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난 여기에 쐐기를 박고자 할버드를 높이 치켜들며 소리쳤다.
“군힐드!!!!!! 오딘의 대전사이자 신성 제국의 용담공인 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그대의 목을 취하러 왔노라!”
물론 군힐드는 이런 내 사자후에 호응해주지 않았다. 그 대신 그녀의 근위대로 보이는 이들이 살기등등한 표정으로 나를 가로막았다.
그와 함께 저 멀리 호리호리해 보이는 몸매의 여성이 말 위에 올라 도망치는 게 내 시야 한구석에 포착됐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다.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본인이 위험해졌다고 이 많은 병력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치는 게 과연 옳은 판단인지는 모르겠군.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서울이고 평양이고 다 내버려 둔 채 북쪽으로 런했고 그게 결과적으로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그 대가로 선조는 분노한 민중을 마주해야 했고 이는 선조의 재위 기간 내내 콤플렉스가 됐으며 그는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욕을 먹고 있었다.
군힐드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그녀가 운 좋게 이곳에서 도망친다고 하더라도 끌어모은 병력들이 다 와해되고 야를들이 지지를 철회한다면 살아남은 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결국, 그녀는 알렉산드로스에게 패퇴한 다리우스와 같은 꼴이 맞이하게 될 것이다. 단지 그와 차이점이라고 한다면 다리우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서 도망칠 수 있었지만, 내게선 도망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군힐드! 도망치려 하는가!? 그대가 그러고도 정녕 이 나라의 여왕이란 말인가!?”
나는 눈앞의 걸리적거리는 적을 베어내며 소리쳤지만 근위대는 그걸로도 충분하다는 것처럼 웃으며 죽음을 맞이했다. 아마 자신의 주군이 도망칠 시간을 벌었다는 것에 만족한 거겠지.
하지만 여전히 군힐드는 내 사정권 안에 들어와 있었다. 여전히 적의 근위대가 걸리적거리기는 했지만, 저들이 장애물이라면 넘어가면 그만 아니던가?
생각을 마친 나는 말의 등을 밟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이런 내 묘기와도 같은 모습에 눈앞의 적들은 경악했지만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할버드를 으스러져라 손에 쥐었다.
콰드드득득!
할버드는 도끼와 창, 그리고 폴암이 결합된 무기다. 형태는 지랄맞지만 어쨌든 도끼인 이상 투척 보너스를 받을 터였다.
그리고 오딘의 무기는 창인 궁그닐이었으며 그는 궁그닐을 투창의 용도로 사용했다. 대개 신의 무기가 항상 그렇지만 던지면 적을 알아서 찌르고 주인의 손으로 돌아온다는 전승을 가지고 있었다.
― 궁니르의 힘이 할버드에 깃듭니다.
― 투척 보너스가 추가됩니다.
기다리던 상태창이 뜬 걸 확인한 나는 도망치는 군힐드를 향해 지체 없이 할버드를 내던졌다.
후우우웅!!!!
거칠게 바람을 가르며 날아간 할버드는 군힐드가 타고 있는 말을 관통했고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군힐드는 설마 자신이 공격받을 거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낙마해서 바닥을 굴렀다.
그렇게 의도치 않게 나려타곤을 펼친 군힐드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정신을 잃었는지, 아니면 낙마하다가 어디가 잘못돼서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목표는 달성했기에 나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목청껏 소리쳤다.
“나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적장 군힐드를 죽였다!”
통상 전쟁터에서 누가 죽었다는 말이 나올 때 당사자가 안 보이면 혼란이 일기 마련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총사령관인 군힐드의 생사가 불분명하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아무리 덩치가 크고 위협적이라고 한들 대가리가 잘리는 순간 그 생물은 죽고 마는 법이다. 군힐드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녀가 죽거나 도망쳤다고 생각한 야를들은 살기 위해 바로 병력을 빼냈다.
경험상 패퇴한 전장에 마지막까지 남아있으면 좆된다는 걸 몸으로 체득하고 있기 때문인지 그들의 행동은 재빨랐다.
그 와중에도 남아서 어떻게든 혼란을 수습하려던 이들은 사로잡히거나 창에 꿰뚫리는 등 최후를 맞이했고 그나마 통제를 할 이들마저 사라지자 혼란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리고 하랄은 이 기회를 놓칠 인물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도망치는 야를들을 붙잡고 적 병력들을 포로로 잡는다면 유틀란트반도는 그의 손에 들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적들을 쫓아라! 모두 추격해서 분쇄하라!”
전쟁에 홀로 남은 병사들은 너무나도 무력했고 그들은 살기 위해 무기를 내버리고 항복하거나 분노한 아군의 창칼에 학살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나는 내가 할 일을 다 했기에 굳이 그 행렬에 끼지 않고 군힐드에게 갔다. 이미 눈치 빠르게 힐데가 그녀를 확보해 두고 있었다.
“살아있어?”
“예. 정신을 잃은 것뿐입니다.”
“다행이네.”
어차피 후환을 없애기 위해 군힐드를 죽일 생각이긴 했지만 아직까지 그녀는 쓸모가 있었다.
시튼 동물기에서 이리왕이라고 불리던 로보를 잡기 위해서 그의 아내인 블랑카를 먼저 잡았다고 했던가?
나 역시 그처럼 의도치 않게 군힐드부터 잡게 됐는데 자신의 아내가 사로잡힌 걸 알게 된 에릭이 과연 어떻게 나올지 정말 궁금하군.
* * *
[스웨덴과 유틀란트반도 사이의 바다 – 카테가트 해협]
한 사내가 바다 위에 조각나 있는 적의 함선들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 사내의 곁에 인자한 얼굴의 노장이 다가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승리왕 전하.”
자신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이는 사내의 모습에 스웨덴의 승리왕. 에이리크 인 시그르셀리는 옅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물심양면으로 도와준 덕분이오. 나 혼자였다면 어찌 이런 승리를 거둘 수 있었겠소?”
한 나라의 왕이 다른 이에게 하는 말치고는 지나치게 정중했지만, 눈앞의 사내는 왕의 존대를 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사내였다.
고드프리 드 부용.
신성로마제국의 공작인 용담공의 대리인이자 그 자신도 니더로트링겐의 공작이었으며 1차 십자군을 이끌었고 예루살렘 왕국의 초대 국왕에 올랐던 자다.
저런 작위와 위명은 둘째 치더라도 그가 가진 능력은 대단히 뛰어났다. 실제로 함께 노르웨이군을 상대로 해전을 벌이며 자신의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거기에 저런 자를 수하로 삼을 정도면 용담공은 얼마나 더 대단한 사내란 말인가? 그 때문에 에이리크는 어지간하면 그와 적대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자신은 과거 그의 제안에 응해 병력을 출병시킨 적도 있었기에 사이가 나쁘지 않았고 이번에도 그의 도움에 응한 건 동맹에 대한 확답을 받기 위함이었다.
“어쨌건 나는 이걸로 그대들과의 약속을 지켰소. 그대들도 약속을 지키길 바라오.”
“물론입니다. 승리왕 전하. 이미 신성 제국의 황제가 살아있는 송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황제가 죽는 순간 제국이 혼란에 휩싸일 텐데 굳이 북부로 눈을 돌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으음… 그건 그렇소만.”
“거기에 덴마크의 왕위를 다시 가져온다고 해도 한동안은 초토화된 왕국을 복구하느라 바쁠 테고, 노르웨이와의 전쟁도 마무리 지어야 합니다.”
“나는 그 이후를 말하는 거요. 약자인 우리로서는 확답이 필요하니까.”
한나라의 국왕이 스스로를 약자라고 말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지만 에이리크는 그런 자존심보다 실익을 챙길 줄 아는 국왕이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실 말이야 바른말이지 이번 전쟁도 결과적으로 저희 입장에선 득보다 실이 많은 전쟁입니다.”
“하긴, 용담공이 실질적으로 얻어가는 건 없는 것 같더군. 오히려 덴마크의 재건을 위해 물자를 지원하면 지원했겠지.”
“그렇습니다. 최대한 빠르게 마무리 짓는 전쟁도 그러할진대 스웨덴과 전쟁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막말로 스웨덴과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 하는 상황입니다.”
왠지 스웨덴의 땅이 기름지고 값어치가 높다면 전쟁을 벌일 수도 있다는 얘기로 들렸지만 에이리크는 애써 무시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어쨌건 전쟁이 마무리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우리와 정식으로 수교를 해주시오.”
“물론입니다. 용담공 전하께선 단순한 수교를 넘어 폴란드―덴마크―스웨덴―작센 공국을 포함한 4국이 동맹을 맺고 교역을 할 생각이십니다.”
“교역이라… 발트해를 기반으로 교역을 하겠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협의를 거쳐야겠지만, 스웨덴으로서는 새로운 교역로를 얻을 수 있으니 좋지 않습니까?”
나쁘지 않은 얘기였지만 동원할 수 있는 자금력은 신성 제국이 압도적이었기에 에이리크는 함부로 대답하지 못했다.
차라리 전쟁을 하면 모를까 내부에서부터 돈으로 후드려맞으면 절대 이기지 못할 테니까.
“그 부분은 지금 확답을 주긴 힘들 것 같소. 여러 가지 이권이 얽매여있다 보니 우리도 자세한 얘기를 들어야 하지 않겠소?”
“오, 물론입니다.”
다행히 고드프리도 이 이상은 권유하지 않았고 에이리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처럼 라그나르를 도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웨덴은 신성 제국과 라그나르를 상대로 강하게 나가지 못할 정도로 입지가 불안정했다.
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었다. 국가 간의 관계에선 힘이 곧 정의였고 이는 모든 힘없는 약소국이 겪어야 할 비애였으니까.
* * *
[덴마크 ― 쾨벤하운]
쾅!!!
“지금… 지금 뭐라고 했나?”
“군힐드 전하께서….”
“다시!! 다시 말해봐! 재미없는 농담이나 늘어놓지 말고 사실을 얘기하란 말이야!”
으르렁거리는 에릭의 모습에 전령은 두 눈을 질끈 감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군힐드 전하께서는 적에게 포로로 사로잡히셨고 야를들은 각자의 본거지로 도망쳤으며 아군은 완전히 와해됐습니다.”
전령의 보고에 에릭은 악몽이라도 꾸는 것만 같았다. 사실 어느 정도 아군이 밀릴 거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군힐드도 나름 군재가 있고 능력도 뛰어났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라그나르만큼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만약 라그나르가 유틀란트반도로 이동한 것만 확인하면 자신도 곧장 병력을 끌고 합류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 잠깐을 못 참고 적과 일전을 벌여 패배했단 말인가? 거기에 군힐드까지 포로로 붙잡혀버렸으니 유틀란트반도는 이제 완전히 적에게 넘어갔다고 봐야 했다.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에릭은 왕이었기에 언제까지나 악몽에 갇혀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최대한 머리를 굴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생각했다.
아직 노르웨이의 지원군은 건재했고 이곳에도 자신이 끌어모은 정예병들이 남아 있었다. 비록 유틀란트반도 탈환까지는 힘들겠지만 적어도 이곳 셀란섬은 지킬 수 있으리라.
그렇게 이곳에서 철통같이 방어하며 시일을 끌고 적이 종전을 요청하면 그때 군힐드의 반환을 대가로 종전 합의를 해주면 되리라.
스웨덴… 그래. 스웨덴도 끌어들이면 될 것이다. 비록 자신과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만, 스웨덴도 새로운 강자가 눌러앉은 걸 좋아하진 않을 터였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지막 희망을 박살 내는 소식이 도착했는데 탈진 상태의 전령은 거진 바닥에 널브러져 간신히 숨만 헐떡이며 보고했다.
“저, 전하. 노르웨이의 지원군은 신성 제국의 고드프리가 이끄는 병력과 스웨덴 연합군에 패퇴해서 본국으로 철수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에릭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직, 에릭의 악몽은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