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4화
“쯧. 생각보다 전투가 길어지겠군.”
하루 이틀이면 끝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전투가 늘어지기 시작하자 군힐드는 혀를 차며 인상을 찌푸렸다.
자신이 끌고 온 건 명실상부 덴마크 최고의 정예병들이었다. 하랄이야 본인의 왕위가 찬탈당한 게 오직 노르웨이와 에릭의 개입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그럴 리가 있겠는가?
만일 자신만의 군대가 없었다면 자신이 에릭과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덴마크는 노르웨이에게 질질 끌려다니는 관계가 됐을 것이다.
내전에서부터 활약한 만큼 자신을 따르는 전사들은 하랄이 데리고 간 후스카를과 맞먹을 정도로 뛰어난 이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마크군은 적들을 압도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이유를 두 가지만 추려보자면 우선 적이 생각보다 잘 싸웠다.
하랄이 직접 최전선에 나서서 그런지 적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했고 실제로 그가 이끄는 중앙은 미세하게나마 아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 때문에 최고 지휘관인 자신까지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전선에 나서야 했다.
종종 눈먼 화살들이 날아오긴 했지만 이런 중요한 전쟁에서 몸을 사리다가 중앙이 쪼개지면 좌익과 우익도 순식간에 무너지기에 어쩔 수 없었다.
“전하. 좌익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해라. 아직 적의 예비대도 투입되지 않았는데 이쪽만 예비대를 투입할 순 없어.”
아군의 좌익은 셀란 섬에서 함께 온 야를들과 에릭이 이끄는 병사들의 일부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에 맞서는 적의 병력은 폴란드와 신성로마제국의 병력들이었다.
아군의 우익은 유틀란트반도 북부의 야를들로 구성했고 적 역시 유틀란트반도 남부의 야를들로 좌익을 구성했기에 얼추 균형은 맞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자신이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한 모양이었다. 아군의 우익은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지만, 좌익은 답도 없이 밀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필두에는 검은 까마귀가 그려진 깃발 아래서 방패와 메이스를 든 채 지휘하는 적의 장수가 있었다.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로 호리호리하게 생긴 적의 장수는 성직자인지 갑옷 위에 정화교단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걸친 채 능숙하게 아군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신이시여! 저들을 불꽃으로 정화하소서!!!”
그 가녀린 목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질 때마다 적의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전사가 되어 아군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설마 저게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인가? 내가 보고 받기로 라그나르는 남자라고 하던데?”
혹시 소문이 와전된 것인가? 아니면 하랄은 진짜 엉덩이가 아니라 불방망이라도 휘둘러서 라그나르를 꼬드긴 것인가?
“아닙니다. 적의 장수는 정화 교단의 사제인 힐데가르트입니다.”
“요새는 성직자를 얼마나 사람을 잘 죽이는가를 기준으로 선발하나 보군.”
저 남부의 십자군이라는 놈들도 그렇고 눈앞의 사제도 그렇고 아무래도 타 종교의 신들은 살육에 미친 놈들이 분명했다.
“자네 혹시 라그나르가 어디에 있는지 파악됐나?”
“라그나르 말씀입니까? 아니요… 척후병과 감시병들을 여기저기 보내봤지만, 보지 못했습니다. 어제도 저기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코빼기도 안 보이지 않았습니까?”
“빌어먹을. 대체 어디서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군.”
갑옷의 모양이나 무기, 싸우는 형태들을 봤을 때 저들은 신성 제국과 폴란드의 군세가 맞았다. 그럼 그들을 이끄는 당사자인 라그나르는 어디서 뭘 하고 있단 말인가?
혹시나 모를 상황을 위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는 거라면 상관없겠지만 만약 후방에서 아군을 노리고 있다면 그건 위험했다.
상식적으로 이런 밀집 진형을 상대로 후방을 급습한다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었지만, 라그나르는 상식이 먹히지 않는 괴물이었다.
쾨벤하운에서 그를 깎아내리며 별거 아니라는 것처럼 얘기하긴 했지만, 고작 천 명도 안 되는 인원으로 한 나라의 수도를 급습한다는 건 단순히 담력이 크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그게 그냥 한번 찔러보는 게 아니라 외성까지 함락시키고 내성까지 박살 낼 정도로 위협적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장담컨대 그건 자신이 아는 인물들 중 가장 용맹한 사내이자 남편인 에릭에게 시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괴물을 아무것도 안 하고 후방에서 놀린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부관. 후방으로 척후병들을 더 내보내게.”
“예? 후방 말입니까?”
자신의 명령에 토를 다는 게 심히 거슬렸지만, 범인에게 자신만큼의 능력을 기대하는 건 무리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짜증을 삼키며 차근차근 설명해주었다.
“라그나르가 이틀째 안 보이고 있네. 하루라면 피곤을 푸느라 그럴 수 있다 쳐도 이틀이나 안 보이는 건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안 드나?”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당장 척후의 숫자를 배로 늘리겠습니다.”
“사각지대 없이 철저히 감시하게.”
물론 이렇게 굴곡 없는 평원에서 급습은 불가능에 가까웠지만, 그녀의 직감이 계속해서 경종을 울리고 있었다.
척후병 몇 명 더 내보내서 이 불안감을 종식할 수 있다면 충분히 이득 보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너른 평원에서 보병과 보병이 맞붙는 전투다. 전열이 무너지는 순간 대치도 무너질 테고 그 순간 피의 학살이 시작될 것이다.
즉, 어느 쪽이 밀리든 이번 전투 한 번으로 전쟁의 승패까지 좌우된다는 얘기다.
“여왕 전하!! 좌익에서 서둘러 예비대를 보내 달라고 합니다! 아군이 밀리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버티라고 주문한 지 30분도 안 됐네. 셀란의 야를들이 그렇게 형편없었나?”
“분전하고 있지만 적들의 전투력이 상상 이상입니다!”
아무리 획일화된 군대가 아니라고 해도 어느 정도 기본은 해줘야 되는 게 아닌가? 설마 어제는 그냥 가볍게 찔러만 봤단 얘기인가?
아니면 라그나르가 좌익에 몰래 숨어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애초에 이곳에서 그의 얼굴을 아는 이들도 몇 안 됐고 막말로 투구를 뒤집어쓰면 어떻게 구분한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좌익이 형편없이 밀리는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후우… 바로 후방의 예비대를 투입하겠네. 피로도가 심한 부대는 질서정연하게 뒤로 물리게.”
예비대를 아끼는 건 좋지만 그렇다고 아끼다 똥 되는 수가 있기에 그냥 투입하기로 했다. 어차피 병력들도 지칠 시점이니 슬슬 교체해줘야 할 시기였다.
다만 어제도 그랬지만 오늘도 이쪽이 먼저 예비대를 투입하고 말았다. 어제 서로 병력을 물리고 대충 전사자의 숫자를 확인해보면 이쪽이 저쪽보다 1.5배는 더 많았다.
전체적으로 본다면 아직 이쪽의 병력이 더 많았지만 일주일… 아니 이대로라면 사나흘만 지나도 역전될 것이다.
물론 그 안에 노르웨이의 지원군이 온다면 승리할 수 있겠지만… 이 빌어먹을 새끼들은 도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다.
설마 길을 잃은 건 아닐 터였다. 에릭과 공동 국왕이 되기 이전 부친이나 하랄이 다스릴 때는 유틀란트반도의 북부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약탈한 놈들이 아니던가?
그런 놈들이 이렇게 밍기적거리는 건 당연히 딴생각을 하고 있다는 말밖에 안 된다. 설마 말만 지원을 오겠다고 지랄하면서 이쪽의 병력이 줄어드는 걸 노리는 건가?
최근에 에릭이 노르웨이를 떠나있는 틈을 타서 그 권력을 노리는 놈들이 슬금슬금 기어 나오고 있다는데… 그놈들이 방해를 한다면 충분히 있을법한 얘기였다.
“…힐드 전하. 군힐드 전하!!”
상념에 빠져있던 군힐드를 깨운 건 부관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왜 그러지?”
“우익에 있는 적들의 움직임이 이상합니다!”
그의 말에 아군의 우익을 보고 있자니 적은 뜬금없이 갑자기 진형을 길게 늘리며 우측으로 계속 이동 중이었다.
맞서 싸우던 적들이 갑자기 뒤로 물러나며 전선을 늘리니 그곳을 담당하던 야를들은 당황해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새였다.
“저게 대체 뭔 짓이지?”
왜 잘 싸우다가 갑자기 저런 짓을 한단 말인가? 혹여 도망치는 건가? 그런데 도망을 저렇게 조직적으로 친다고? 그것도 지금 와서?
“전하! 피아스트 가문의 깃발입니다.”
“…나도 보고 있네. 폴란드의 지원군을 이끄는 게 정의공의 아들인 례셰크라지?”
“예. 아직 어리지만, 능력이 굉장히 뛰어나다고 합니다.”
들은 바 있다. 폴란드의 기병들을 이끌며 유틀란트반도 남부를 점령할 때 꽤 큰 활약을 했다지? 그런 그가 직접 병력을 이끌고 움직인다는 건 도망은 아닐 터였다.
“빌어먹을. 도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아군의 우익이 약하다는 걸 알고 포위하기 크게 기동하는 건가? 아니면 저기서 시선을 끌고 다른 곳에서 이득을 취하려는 건가?
“전하. 야를들이 명령을 요청하는 전령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관의 말에 군힐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일반적인 일이라면 알아서 임기응변으로 대처할 테지만 저런 상황에 대해선 저들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을 못 잡고 있었다.
괜히 단독으로 행동했다가 책임을 지기는 싫었기에 저들은 아기새처럼 자신의 입만 바라보며 명령을 내려주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자신 역시 적의 행동에 대해 그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던 군힐드는 적의 행동을 따라 하기로 했다.
어차피 좌익의 진형이 조금 얇아진다고 해도 예비대를 보낸다면 대응할 수 있을 터였다. 적에게 기병이 있다지만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으니 뚫어내는 건 불가능할 테고.
거기에 아군의 진형이 얇아진다는 건 적의 진형 역시 얇아진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였다.
적의 예비대는 아직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여차하면 이쪽의 수적 우위를 이용해 역으로 적의 진형을 뚫어서 붕괴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병력들에게 저들을 따라가라 명령하고 후방에 대기 중인 예비대를 우익으로 증원하게.”
“알겠습니다!”
자신의 병력들이 적을 따라 이동하며 진이 끝없이 늘어짐에도 적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하랄은 여전히 중앙에서 아군을 밀어붙이고 있었고 그 힐데가르트인가 뭔가 하는 피에 굶주린 성직자는 아군을 학살하고 있었다.
“아군을 한번 흔들어보려고 했나 보군.”
사람이 싸우다가 갑자기 바지를 내리면 당황하기 마련이다. 적의 행동은 이상한 행동을 해서 아군의 심리를 뒤흔드는 것. 딱 그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을 놓고 있는 그녀를 비웃기라도 하듯 대지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그 진동의 근원지에는 날개를 단 중무장한 기병들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중앙을 돌파하며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는 굳이 저쪽을 보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최선두에 있는 자가 라그나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지도 깨달았고.
“이런 젠장.”
* * *
“임기응변치고는 나쁘지 않아.”
나는 말 위에 올라 할버드를 어깨에 걸치며 중얼거렸다. 군힐드는 네임드 영웅답게 아군을 상대로 제법 분전했다.
오랫동안 합을 맞춰온 자신들과는 다르게 야를들은 불러모아 급조한 연합군임에도 불구하고 생각 이상의 전투력을 보여줬다.
하지만 지금 보는 것처럼 예상 밖의 상황에는 유동적으로 움직이지도 못했고 대처능력도 부족했다.
“차라리 그럴 때는 과감하게 뚫고 들어왔어야지.”
물론 적의 의도를 모르는데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고 싶진 않을 테니 최대한 안정적으로 행동하려 한 거였지만 그게 그녀의 패착이었다.
제대로 된 합의도 없이 병력을 늘이면 당연히 보병의 간격이 엉성해지지 않겠는가? 그리고 엉성한 보병진은 기병들에게 딱 좋은 먹이였다.
본인 딴에는 아군 기병의 숫자가 적어서 설마 뚫릴까 싶었던 모양이지만 그 기병을 이끄는 게 누군지까지 생각했어야 했다.
거기에 그녀의 실수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는데 차라리 예비대를 그냥 후방에 놔뒀다면 본인은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의도치 않게 그녀의 뛰어난 능력이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은 셈이다.
“뭐, 본인이 한 선택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겠지.”
생각을 마친 나는 거칠게 투레질하는 말을 한 번 쓰다듬은 뒤 할버드를 치켜들며 소리쳤다.
“지금부터 우리는 군힐드를 사로잡는다!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