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일기토에서 당당히 승리하고 돌아온 하랄은 피가 흐르는 검을 높이 치켜들면서 소리쳤다.
“들어라. 나의 전사들이여!”
“과거에 우리는 군힐드의 교활한 술수와 에릭의 비겁한 기습을 받아 모든 걸 내팽개친 채 도망치듯 쫓겨나야 했다.”
“그렇게 우리는 기나긴 시간 동안 고향에서 추방당하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으며 차갑게 얼어붙은 땅에서 모든 걸 새롭게 시작해야 했지.”
“허나 우리는 강철과도 같은 의지로 그 기나긴 모멸과 인내의 시간을 견뎌냈고 마침내 다시 우리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마침내 복수의 시간이 다가왔다. 오늘 우리는! 왕국을 좀먹는 마녀와 왕위 찬탈자를 끌어내리고 덴마크를 해방할 것이다!”
“천공신 오딘께서 우리를 보우하실지니 전군! 진군하라!!!!!”
* * *
연합군의 공격으로 아침에 시작된 전투는 점심을 넘겨 해가 지기 시작할 무렵까지 진행되었지만, 전투는 백중세였다.
이쪽은 명분이 하랄에게 있었고 일기토의 승리로 사기가 충천해 있는 상황이었지만, 정예병들의 수가 적고 다른 야를들과의 연합군이었기에 효율적으로 지휘하기가 힘들었다.
반면 군힐드가 이끄는 병력은 그 하나하나가 후스카를에 버금갈 정도로 최정예병이었고 수비 측이기에 이쪽에 비하면 피로도가 덜할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걸 비교해봤을 때 어느 한쪽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건 아니었기에 전투가 지지부진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어떻게든 해가 떨어지기 전에 적을 밀어내려던 하랄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병력을 뒤로 물렸고 덴마크군 역시 물러가는 연합군을 그대로 보내주었다.
야간에도 계속 싸우기에는 서로 너무 지쳐있었고 남아있는 예비대도 얼마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 끝에 양측은 병력을 물린 채 꿀맛 같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후우… 죽을 맛이군.”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 모닥불가에 주저앉은 하랄은 투구를 벗으며 투정을 부렸다. 나는 그런 그의 옆에 주저앉으며 시원한 물을 건넸다.
“고생했네. 몸도 좀 씻고 목도 촘 죽이게.”
하랄은 기다렸다는 듯 내가 건넨 물을 받아든 뒤 벌컥벌컥 들이키고 머리에 흩뿌렸다. 몸 여기저기에 말라붙은 핏물들이 조금씩 흘러내려 갔고 나는 그에게 수건을 건넸다.
상남자답게 거칠게 간이샤워를 끝마친 그는 한숨과 함께 수건을 목덜미에 두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푸흐우… 젠장. 따뜻한 물에 몸을 푹 담그고 시원한 맥주를 마시면 소원이 없겠군.”
“생각이야 그렇겠지만 아마 이 상태로 머리가 바닥에 닿는 순간 곯아떨어질걸?”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몸이 피곤하니까 그냥 다 때려치우고 자고 싶더군.”
“일단 병사들은 최대한 빨리 씻기고 저녁 먹고 재울 수 있게 준비해놨네.”
나는 최후의 예비대로 본대에서 대기 중이었기에 따로 전장에 나가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놀고 있던 건 아니었다.
전장에 나간 하랄을 대신해 예비대를 조율하고 전장에 나가 있는 하랄이 보지 못하는 부분을 캐치해 보완하고 식사나 목욕, 잠자리 등을 미리 준비해 두는 것이다.
이른바 지원부대의 역할을 한 셈인데 힘들게 싸우고 온 병사들에게 이런 잡다한 일까지 시키면 사기가 떨어지는 건 둘째 치고 전투력이 폭삭 떨어지게 된다.
“고생했네. 그럼 나도 나머지는 자네에게 맡기고 씻고 밥 먹고 자도 되겠지?”
“미안하지만 자네는 안 되네. 이번 전투가 생각대로 안 됐으니 작전회의를 해야지.”
“젠장.”
“일단 씻고 오게. 자네도 피곤할 테니 같이 밥이나 먹으면서 얘기하지.”
내 말에 하랄은 고개를 끄덕이며 씻으러 떠났고 나는 그가 올 동안 그와 이야기를 나눌 이런저런 서류를 챙겨 놓았다.
얼추 내용이 정리되자 때마침 샤워를 마친 하랄이 머리에 묻은 물기를 털며 막사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한층 개운한 표정으로 내 맞은편에 앉더니 의자의 등받이에 기대며 쭈욱 기지개를 켰다.
“끄으으으으으~~하아!!!”
“기분 좋아 보이는군.”
“찬물로 샤워할 줄 알았는데 더운물까지 준비해놨더군. 능력도 좋아.”
“내가 전쟁터에서 구른 짬밥이 몇 년이라고 생각하나?”
게임 속 지식을 제외하고서라도 수 년 동안 전쟁터에서 구른 나다.
잡다한 일은 동료들을 시켰지만 큰 골자는 내가 짰고 보급은 내가 최우선으로 챙기는 분야였기에 보급에 관해서는 날 따를 자가 없다고 스스로 자신할 수 있었다.
“하긴, 그렇겠지. 아무튼, 덕분에 병력들의 사기도 괜찮네.”
“듣던 중 다행이군. 일단 배고플 텐데 저녁이라도 먹으면서 얘기하지.”
점심은 적과 계속해서 싸움을 했기에 병사들은 예비대가 교대해준 틈을 타서 비스킷에 육포, 버섯 수프를 삼키듯 먹고 다시 전장에 나서야 했다.
먹을 게 부실하면 병력들의 사기가 어떻게 되는지 일찍이 깨달은 나는 요리병들을 닦달하며 저녁만큼은 든든하게 준비했고 그 결과물이 눈앞에 있는 식단이었다.
와인과 상큼한 과일 샐러드, 치즈를 곁들인 베이컨 요리와 감자로 만든 수프, 밀로 만든 흰 빵까지! 장담컨대 이 정도면 군대에서 먹는 별 5개짜리 식사라고 확신할 수 있다.
“젠장. 진수성찬이군. 내 아내가 해준 밥보다 맛있을 줄이야.”
의도치 않게 아내를 디스한 하랄은 게 눈 삼키듯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고 나 역시 그와 똑같은 식단을 받아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10분 만에 식사를 끝마친 하랄은 만족한 얼굴로 배를 쓰다듬으며 나른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제 좀 살 것 같군. 그나저나 이 식단을 전 병력에게 뿌리려면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준비했나?”
“미친 듯이 요리병들을 갈궜지. 나가서 싸우는 게 아니라 안전한 곳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는데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나?”
“솔직히 난 자네가 정말로 병사들과 똑같이 생활할 줄은 몰랐네. 물론 그런다는 얘기를 몇 번 듣기는 했지만….”
하랄의 말처럼 나는 평상시라면 몰라도 전쟁터에 나오는 순간 병사들과 똑같이 생활하며 그들이 먹는 음식과 똑같은 것을 먹었다.
만약 간부들이 병사들과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다면 당연히 병사들 입장에선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런 반발심은 전투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괜히 베트남전에서 뒤통수에 총 맞아 죽은 유골들이 발견되는 게 아니다.
거기에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고, 병사들의 열악한 생활을 본인이 겪어봐야 그걸 개선할 생각이 들지 않겠는가?
이건 철칙이었고 하랄 역시 여기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그동안은 부대를 분할해서 운용했고 타국의 왕에게 내 방식을 강요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직접 겪어보지 않은 것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진짜 병사와 같은 대우를 할 수는 없으니 결국 병사들의 대우를 올리는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물론 하랄이 먹는 음식은 바로 조리해서 좀 더 따뜻한 음식을 먹게 해준다든가, 바로 물을 데워서 미지근한 게 아닌 따뜻한 물을 준다든가 하는 약간의 편의는 봐줬지만 말이다.
“자네도 몸에 익혀야 할 걸세. 말로만 어쩌고저쩌고 하는 것보다 이렇게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는 게 병사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니까.”
군대에서 장군 방문한다고 청소해라 말로만 지랄하지 말고 영관급 장교들이 직접 솔선수범해서 쓸고 닦는 모습을 보여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명심하지. 그건 그렇고… 자네가 볼 때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나?”
“일단 이걸 확인해보게.”
나는 그에게 서류 몇 장을 추려서 건넸고 그걸 쓱 훑어본 하랄은 의외라는 표정으로 얘기했다.
“생각보다 사망자 수가 적군.”
“맞아. 이비가 없어서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그녀가 키워놓은 의무관 부대가 있거든.”
다른 건 몰라도 이런 힘 싸움에선 생각보다 부상자들의 숫자가 적다. 일단 양옆과 뒤는 아군에게 보호를 받고 오직 앞에서만 적을 마주하기에 치명적인 부상을 입지 않는다.
설사 다친다고 하더라도 바로 후방으로 이송이 되고 그런 이들에게 바로 의무관들이 달라붙기에 대부분 가벼운 경상에 그치는 것이다.
물론 진짜 지옥은 전열이 무너져서 추격전이 되는 순간 시작되지만… 이기면 그만 아니던가.
“일단 그걸 보면 알겠지만 이쪽이랑 저쪽의 사상비는 자릿수가 달라. 그래서 이대로 적에게 꾸준히 소모전을 강요해서 무너뜨리는 방법이 있어.”
“다만 그러면 군힐드를 못 잡겠지. 어쩌면 피해가 누적되기 전에 퇴각할지도 모르고.”
보통 이런 식으로 무난하게 이기는 시나리오로 가면 그 끝은 둘 중의 하나다. 적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거나 아니면 무너지기 전에 전열을 정비하고 성에 틀어박히거나.
“전쟁이 길어져서 좋을 게 없지 않나. 그리고 자네 말대로 신성 제국의 황제도 살아있는 송장 상태인데 내부에서 일이 터지면 자네도 여기에 발붙이고 있기는 힘들 테고.”
후방 걱정 없이 마음껏 싸울 수 있을 때 끝내자는 하랄의 의견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괜찮지만 이대로 몇 개월만 지나도 보급에 대한 압박이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선 야를들에게 협조를 받아야 되는데 늘 그렇지만 이런 식의 강제된 협조는 반발심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좋아. 그럼 새벽이 되자마자 전투를 벌이도록 하지. 저들이 정신없는 사이를 파고들어야 틈을 만들 수 있지 않겠나?”
“그럼 내일도 내가 나서서 시선을 끌어줘야겠군.”
“이왕이면 화려한 갑옷을 입고 날뛰어주게. 그렇다고 칼침 맞으라는 말은 아니고.”
“푸하핫, 조심하겠네.”
“그래. 그럼 지금부터 부대는 내가 지휘할 테니 자네는 들어가서 눈이나 좀 붙이게.”
내 말에 하랄은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막사로 돌아갔고 나도 시급한 문제들만 빠르게 처리한 뒤 막사로 들어와 누웠다.
나 역시 내일 전투를 해야 될 테니 충분히 잠을 자서 최적의 컨디션을 유지해야 하지 않겠는가. 뭐, 무슨 일이 생기면 얀이 알아서 잘 처리하겠지.
* * *
다음 날 새벽. 하랄은 약속대로 어제에 비해 한층 화려해진 갑옷을 입고 전장의 한복판에서 날뛰고 있었다.
전황만 보면 이쪽이 밀어붙이고 있는 모양새였지만 오버페이스였기에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이쪽이 밀릴 터였다.
“얀. 자네는 예비대를 가지고 여기서 대기하다가 하랄이 밀리는 것 같으면 지체하지 말고 달려가서 그를 지원해주게. 오백 정도면 충분하겠지?”
“차고도 남습니다.”
“그래. 가서 흔들어주기만 하면 되니 크게 무리할 건 없네. 중요한 건 자네나 하랄이 다치지 않는 거니까.”
“알겠습니다.”
“그다음은… 례셰크. 자네 차례네.”
“그 말씀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용담공 전하.”
내 명령이 떨어지자 그는 피아스트 가문의 깃발을 높이 들어 올린 채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천천히 우익으로 이동했다.
그가 멀어지는 걸 확인한 나는 례셰크에게 빌린 윙드 후사르를 이끌고 주변을 배회하며 군힐드의 위치를 확인했다.
상대를 붙잡으려면 적어도 상대가 어디에 있는지는 확인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군힐드는 하랄이 직접 나와서 싸우는 것에 자극받았는지 어제보다 훨씬 더 앞에 나와 병력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거기에 그녀의 근처에서 누가 봐도 정예병으로 보이는 병력들이 물샐틈없이 호위하고 있었으며 크누트 가문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었기에 위치를 파악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뭘 그리 변태같이 웃고 있습니까?”
어느새 정화 교단의 갑옷을 입고 내 옆에 나란히 선 힐데가 불퉁스럽게 얘기했고 나는 기다렸다는 듯 대꾸했다.
“저 잘난 듯한 얼굴이 분노로 일그러질 걸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지더라고. 자신만만한 얼굴이 삽시간에 무너져서 굴복하는 걸 보면 이…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고 해야 되나?”
내 대답에 힐데는 질렸다는 듯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고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시선을 받아넘겼다.
그렇게 그녀와 실없는 대화를 나누는 동안 례셰크가 맡은 바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는지 적의 우익이 흔들렸고, 그걸 확인한 나는 바이저를 내리며 무기를 뽑아 들었다.
“여왕 전하를 만나러 갈 시간이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