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전투를 앞두게 되면 전장에는 절로 긴장감이 깃들게 된다.
병사들은 전투를 앞두고 죽음에 대한 공포와 긴장감, 생존에 대한 욕구와 같은 감정들에 휩싸이게 되고 이게 심해지면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게 전투가 벌어지면 사상자가 나오고 그게 자신이 되지 말라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금처럼 누가 봐도 큰 전투가 일어날 게 분명해 보이는 상황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 때문에 이런 경우 지휘관들은 병력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고기와 술을 풀어 병사들의 배를 든든히 채우는 한편, 혹독하고 엄정한 군기로 그들의 정신을 다잡고 때로는 승리에 대한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기도 했다.
전장에서 늘 영웅이 나오는 건 그런 정책의 일환이었다. 한 발자국만 더 앞으로 내디딜 용기가 있다면 인생을 역전할 수도 있었으니까.
종종 전장에서 공을 세운 이가 기사가 되거나 작은 마을의 영주가 되는 이야기는 병사들의 의욕을 고취시키기에 충분했다.
사람은 누구나 성공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평민인 그들에게 영주와 귀족이라는 말이 주는 울림은 이성을 마비시키기에 충분했으니까.
거기에 자신들을 지휘하는 건 불패로 이름 높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였기에 연합군의 사기는 덴마크군에 비하면 훨씬 더 높았다.
자신들을 이끄는 장군이 명장이라는 건 승리할 확률이 높다는 거였고 이는 곧 자신이 살아남을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였으니까.
하지만 하랄 블로탄은 완벽한 승리를 원했고 아군의 사기를 최대로 끌어 올리기 위해 본인이 직접 나서기로 했다.
라그나르는 언제나 전쟁터에서 최선두에 나섰고 꽤 오랜 기간 그를 옆에서 보다 보니 하랄 역시 그에게 감화된 것이다.
수하들은 위험하다며 말렸지만, 당사자인 자신이 목숨을 걸지 않는다면 그 누가 자신을 위해 목숨을 걸어주겠는가?
“후우….”
깊게 심호흡을 한 하랄은 말 위에 올라 홀로 적진을 향해 나아갔다. 언뜻 보면 무모하고 멍청해 보이기까지 하는 행위였지만 상대측의 지휘관도 수하를 단 하나만 대동한 채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의 말이 들릴 만한 거리를 넘어 얼굴을 알아볼 거리까지 가까워지자 약속이라도 한 듯 하랄과 적의 지휘관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오랜만이구나. 하랄.”
그녀의 말대로 오랜만에 보는 군힐드의 모습에 하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이 아는 군힐드라면 이런 도박을 하지 않을 테지만 이쪽이 필사적인 만큼 저쪽도 필사적이라는 얘기겠지.
이런 평원에서 한번 패배하면 끝이다. 전장에서 싸우다 죽는 수보다 퇴각 시에 사망하는 병사의 수가 몇 배나 더 많은 걸 생각해보면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한 번 맞붙어서 싸웠다고 수천, 수만이 죽는 경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애초에 다들 갑옷을 입고 있기에 한 번 찔린다고 죽는 것도 아닌 데다 온종일 싸우는 것도 아니잖은가.
비유하자면 줄다리기와 같은 것이다. 처음에는 팽팽하지만, 한번 끌리는 순간 탄력을 받아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전투도 그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랄, 내 말이 들리지 않는 것이냐?”
생각에 잠겨있던 하랄을 깨운 건 분노한 듯한 군힐드의 목소리였다. 그제야 하랄의 눈동자는 군힐드에게 향했고 그는 피식 웃으며 사과했다.
“아, 미안하오 누님. 잠시 딴생각을 하느라고.”
“감히 날 앞에 두고 딴생각을 하다니, 너도 제법 머리가 커졌구나.”
“머리야 진작에 컸지. 오랫동안 못 봐서 내 나이도 잊어먹었소?”
유들유들하게 대꾸하는 하랄의 모습에 군힐드는 표독스럽게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하긴, 겁쟁이처럼 성안에 틀어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기어 나온 걸 보면 제법 성장하긴 했구나.”
“오랜만의 가족 상봉인데 나와봐야지.”
“가족… 그래. 우린 가족이었지. 하랄. 가족의 정으로 경고하마. 목숨만은 살려줄 테니 모든 걸 내려놓고 돌아가라.”
“푸하하하, 누님. 뭔가 착각하고 있지 않소?”
“무슨 말이지?”
“그건 누님이 할 말이 아니라 내가 누님에게 할 말이오.”
누가 봐도 이쪽의 상황이 유리했다. 유틀란트반도의 반이 자신의 영향력 아래 들어왔으며 신성 제국과 폴란드가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뭣보다 자신의 친우이자 제국의 용담공이며 오딘의 대전사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자신과 함께하고 있지 않던가.
어디를 어떻게 생각해봐도 자신이 패배할 건덕지는 없었다.
“하, 내가 정당하게 쟁취한 것을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재밌는 농담이구나 하랄. 덴마크는 네 것이 아니다. 나의 것이지.”
“누님은 그 나이를 먹고도 정당이라는 단어가 뭔지 모르는 거요? 그래도 어릴 적에는 영리하다는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역시 나이를 속일 수는 없나 보구려.”
“….”
뜬금없는 나이 얘기에 군힐드는 입을 다물었다. 안 그래도 최근 예언가와의 일로 나이에 민감해져 있는 상황이었는데 하랄이 갑자기 그를 찔러 들어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물론 하랄은 그를 노리고 얘기한 게 아니었기에 의표라도 찔린 것처럼 부들거리는 군힐드를 기묘한 눈초리로 쳐다보면서도 말을 이어나갔다.
“한 번만 설명해줄 테니 잘 들으시오. 아버지께서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적장자이자 왕위 계승서열 1위인 내게 왕위를 물려주셨소.”
“그건 아버지의 멍청한 선택일 뿐이다. 실제로 네게는 왕국을 다스릴 여력이 없지 않았나?”
“글쎄… 내 생각에는 그래도 나름 합리적으로 왕국을 다스렸던 것 같은데.”
“흥, 네가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것뿐이겠지. 네 말대로라면 왜 야를들이 네가 아닌 나를 지지했을까?”
“상식적으로 모든 인간과 친하게 지낼 수는 없는 거고 내게 불만이 있던 이들을 누님이 꼬드긴 게 아니오?”
당시 덴마크의 혼란은 왕의 갑작스러운 급사와 그 후계자라는 인물이 검증되지 않은 어린아이였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경우 어린 왕이 쓸데없는 똥볼만 차지 않는다면 1~2년 내에 대부분 안정되는 게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군힐드는 정확히 그 틈을 파고들었고 왕위 찬탈에 성공한 것이다.
“글쎄, 네가 뭐라고 짖건 너는 왕위에서 쫓겨났고 나는 덴마크의 여왕으로 군림하고 있지 않더냐? 과정이야 어쨌든 결과가 모든 걸 말해주는 법이다.”
“누님. 우리는 그걸 왕위 찬탈이라고 부르기로 합의했소. 정당한 게 아니라.”
“어렸을 때는 내 눈도 못 마주치더니 혀가 제법 길어졌구나, 하랄.”
“원래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고 하지.”
“왕의 자리까지 내려놓고 허겁지겁 도망친 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군힐드의 말에 하랄은 분노가 치밀어올랐지만 애써 화를 눌러 담았다.
분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있을 때 무기가 되는 법이다. 통제하지 못하는 분노는 스스로를 좀먹을 뿐이다.
거기에 이런 말싸움에선 흥분하는 순간 말리게 된다. 머리에 피가 쏠리는 순간 말이 헛나오게 되고, 논리가 사라지며, 상대의 말에 제대로 된 반박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하랄은 심호흡을 하며 이성을 되찾은 뒤 군힐드의 치부를 공격했다.
“애초에 누님도 날 이기지 못할 것 같으니 에릭에게 쪼르르 달려가 도와달라고 한 게 아니오? 솔직히 추하다고 생각하오만.”
“누가 들으면 너는 당당한 줄 알겠구나. 신성 제국도 모자라 폴란드까지 끌어들이지 않았더냐? 에릭에게 들으니 스웨덴까지 꼬드긴 모양이던데 참 대단하구나. 그 입으로 그들의 엉덩이라도 핥아준 것이냐?”
“글쎄… 그래도 하나 확실한 건 난 창녀처럼 다리를 벌려서 도와달라 하진 않았소.”
“하, 그러면 엉덩이라도 대줬나 보군. 그 이름 높은 야만공이 니스를 버리고 네놈을 위해 여기까지 기어 올라온 걸 보면 네놈도 제법 명기인가 보구나.”
“그 걸레를 문 듯한 입담은 여전하구려 누님. 천박하고, 상스러우며, 기품이라곤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지.”
“그게 너한테만 그러는 거라곤 생각 못 하는가 보구나.”
뻔뻔한 군힐드의 대답에 하랄은 질렸다는 얼굴로 말에서 내렸고 그 모습에 군힐드의 옆에 서 있던 호위병도 하마했다.
“백날 얘기해봤자 제자리걸음이겠군. 예로부터 미친개는 몽둥이가 약이라고 했었지. 내 누님을 위해서 눈물을 머금고 사랑의 매를 들겠소.”
하랄은 자신의 애검을 뽑아 들었고 그런 하랄을 보며 군힐드는 조소했다.
“동생아.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더냐?”
“난 여기서 죽을 생각 없으니 유언은 누님이나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소. 내 특별히 매형에게 누님의 목과 함께 직접 전해주리다.”
사뭇 오만하기까지 한 하랄의 말에 군힐드는 표정을 구겼지만, 이내 미소를 지었다. 굳이 여기서 하랄을 죽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자신을 대신해서 싸우는 저 대전사에게 강화 마법을 걸어준 데다 그의 무기에는 극독이 발려 있었기에 작은 상처만 나도 하랄은 고통스럽게 죽어갈 것이다.
물론 대전사는 그런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저 명예와 영광을 위해 대전사로 나선 것뿐이었고 만약 이 일이 세간에 알려지면 비난을 피할 수 없을 테지만 일단은 급한 불부터 꺼야 했다.
결국, 이러나저러나 당사자인 하랄이 죽는다면 적들의 명분도 사라질 것이며 반란에 대한 동력도 사라질 테니까.
* * *
일기토. 본래라면 그 격이 맞는 이들끼리 맞붙어야 할 테지만 지금 하랄은 이름 모를 잡졸과 맞서 싸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이쪽의 손해가 더 컸지만 이기면 모든 게 해결될 문제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왔다는 사실은 병력들의 사기를 충천시키기에 충분했으니까.
그 때문에 하랄은 빠르게 일기토에서 승리한 뒤 진격할 생각이었지만, 의외로 상대 대전사의 실력이 제법이었다.
“흐아압!”
하랄은 기합 소리와 함께 울프베르트(바이킹소드)를 휘둘렀지만 상대는 가볍게 도낏자루로 하랄의 공격을 막아냈다.
그는 이런 공격에 익숙한 듯 도낏자루를 빙글 돌리며 하랄의 검을 쳐낸 뒤 그대로 도끼를 휘두르며 반격에 들어갔다.
데인 액스 특유의 긴 리치를 이용해 가속도를 붙인 그는 하랄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도끼를 내리쳤다.
후우웅!!
공기를 가르다 못해 찢어발길 듯한 파공음이 울려 퍼졌고 본능적으로 방패로 막을 공격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하랄은 몸을 던져 그 공격을 피해냈다.
얼마나 힘을 줘서 내리친 건지 도끼는 땅을 뚫고 박힐 정도였는데 과연 군힐드의 대전사로 나온 만큼 그 나름대로의 실력은 갖추고 있었다.
그 일격에 겁을 집어먹을 만도 하지만 오히려 하랄은 웃음을 터뜨렸다.
“흐흐흐, 이제야 싸울 맛이 조금 나는군.”
그래. 이런 싸움이야말로 자신이 원하던 싸움이었다. 지근거리에서 서로가 서로의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결투.
거기에 상대의 실력이 제법 놀랍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자신은 그간 오딘의 대전사인 라그나르와 검을 맞대며 수련해왔다.
스스로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하랄이었지만 그는 라그나르와 검을 맞댈 때마다 좌절을 맛봐야 했다.
그렇기에 눈앞의 상대가 휘두르는 도끼는 라그나르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힘이 넘치기는 했지만 기술과 기교가 없었고 너무 정직했으며 도끼를 휘두르는 게 아니라 도끼에 휘둘리는 모양새였다.
그렇기에 방패를 바짝 끌어당겨 시야를 확보한 하랄은 상대의 다음 공격을 피해내자마자 그대로 달려 나가 방패로 상대의 몸을 밀쳐냈다.
콰아앙!
생각지도 못한 방패 밀치기에 상대는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고 하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상대를 압박하며 밀어붙였다.
그렇게 뒤로 밀려나던 상대는 발을 헛디뎠는지 그 자리에 벌러덩 나자빠졌고 노련한 검사이자 사냥꾼이었던 하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오딘이시여!!! 저에게 힘을!!!!!!”
쩌렁쩌렁 울릴 정도로 사자후를 내뱉은 하랄은 검을 그대로 내려찍었다. 상대는 넘어진 와중에도 들고 있던 도끼로 그의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하랄의 일격은 상대의 도낏자루를 베어 넘겼다.
그의 검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늑대가 사냥감을 물어뜯듯 상대의 연약한 살과 근육, 뼈를 찢어발겼다.
푸화학!
검이 심장까지 뚫고 들어간 건지 상대의 몸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뿜어져 나왔고 아무런 여과 없이 하랄에게 튀었다.
의도치 않게 상대의 피로 샤워를 했지만, 하랄은 오히려 만족스러운 얼굴로 경악한 표정을 짓고 있는 군힐드를 향해 경고했다.
“그 자리에서 목 닦고 기다리고 계시오. 다음 차례는 누님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