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각자에게 걸맞은 임무를 맡긴 나는 적의 이동 경로에 맞춰 병력을 끌고 천천히 북상했다. 사실 하랄은 이 기세를 몰아 유틀란트반도를 아예 손에 넣을 생각이었지만 나는 그를 뜯어말렸다.
일단 적을 유틀란트로 끌어들이기 위해선 적에게 승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불어넣어 줌과 동시에 탈환할 여지를 남겨줘야 했다. 상식적으로 사지에 병력을 들이붓는 지휘관은 없지 않은가.
물론 한반도 역사상 최고의 독립군이자 최후의 명장이라고 불리던 모전구렴야 장군님 같은 분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것 이외에도 유틀란트반도를 전부 점령하는 건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굳이 아군의 공세 종말점을 들먹일 필요도 없었다.
유틀란트반도는 넓이만 따지면 남한의 1/3쯤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땅이었고 그런 땅을, 진창이 된 보급로를 끼고 몇 달 안에 전부 점령한다? 차라리 낙타를 바늘구멍에 집어넣는 게 더 쉬울 것이다.
만약 신들린 컨트롤로, 사람은 풀만 먹어도 살 수 있다는 무다구치 렌야 센세의 지론에 따라 어찌어찌 유틀란트를 손에 넣었다고 해도 그 이후가 문제였다.
점령한 영토가 많아진다는 건 수비를 해야 할 범위도 늘어남을 의미했다. 만약 우리가 셀란섬에 상륙하기 위해 군사를 집결하거나 상륙한 틈을 타서 노르웨이의 지원군이 뒤를 급습한다면?
셀란섬의 덴마크군이 우주방어를 하는 동안 지원군이 유틀란트반도에 상륙해 차근차근 영토를 점령해 나간다면?
더 무서운 건 우리에게 항복을 하는 야를들이 진심으로 항복하는지 아니면 배신의 추진력을 얻기 위해 무릎을 숙이는 건지 우리는 구분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거짓말탐지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많은 이들을 일일이 검증할 수는 없는 법 아니던가.
물론 야를들을 죽어라고 감시하면 할 수도 있겠지만 그들의 반발과 불만도 감내해야 하는 데다 그 수하들까지 감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때문에 나는 하랄이 커버할 수 있는 범위만큼만 진군하라 명한 것이다. 물론 서두르고 싶은 하랄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괜히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칠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적을 끌어내기에는 충분했다. 조심성 많고 교활한 에릭은 우리가 파놓은 함정을 무시했지만, 이곳에 지지 세력을 두고 있는 군힐드는 아니었다.
그녀는 우리의 도발을 참지 못했고 난 어렵게 기회를 얻은 만큼 이곳을 그녀의 무덤으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를 위한 열쇠는 례셰크가 끌고 온 기병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본인의 갑옷을 정비 중인 례셰크에게 다가갔다.
“례셰크. 이번 유틀란트 탈환전에서 자네가 큰 활약을 했다고 들었네.”
“과찬이십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하게. 하는 김에 이것저것 많이 배워가고.”
“예. 하랄 경의 배려 덕분에 실질적으로 군 운용에 대한 경험을 쌓고 있습니다.”
“그보다 어떤가? 북부는 자네가 생각하던 것과 많이 다르지 않던가?”
내 물음에 례셰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치며 썰을 풀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대롭니다. 처음에는 폴란드 북부를 생각하며 기병을 운용했는데 큰 낭패를 볼 뻔했습니다.”
뭐, 폴란드 북부라고 해봤자 발트해 연안일 테고 그 부근이면 그래도 한겨울을 제외하곤 타 지역과 크게 다를 게 없다.
“질척질척한 땅 때문에 기동력이 죽는 건 물론이고 일교차도 커서 매일 밤마다 말이 얼어 죽지 않게 돌봐줘야 하는 데다 건초를 구하기도 힘들더군요. 체력적으로 부치니 장기간 운용도 힘들고요.”
당연하겠지만 동물도 추위를 타고 몸 상태가 안 좋으면 질병에 걸린다. 그리고 그렇게 병에 걸린 동물들의 열에 아홉은 도살되어 병사들의 한 끼 식사가 되어버린다.
키우기도 힘들고 오랜 기간 훈련받은 데다 혈통도 좋은 군마를 한 끼 식사로 먹어버리다니… 참 호화로운 식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힘든 상황에서도 크게 활약을 하지 않았나? 그런 자네의 능력을 믿고 내가 하나 부탁할 게 있는데 괜찮겠나?”
“명령만 내려주십시오. 목숨을 걸고 수행하겠습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목숨까지 걸 필요는 없네.”
나는 막대기로 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그가 해줘야 할 역할에 대해 설명했고 례셰크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뭐, 설명으로 들었을 때는 긴가민가하겠지. 그래도 나름 역사에서 증명된 방법이었던 만큼 충분히 효과를 발휘할 것이다.
* * *
<유틀란트반도 북부 – 항구도시 오르후스>
“어서 오십시오. 여왕 전하.”
자신을 맞이하는 야를에게 적당히 손을 흔들어준 군힐드는 지친 얼굴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두 눈을 감았다.
쾨벤하운은 덴마크라는 나라는 기준으로 극동에 위치해 있었기에 서쪽에 위치한 유틀란트반도로 오기 위해선 꽤 긴 거리를 빙 돌아서 와야 했다.
“전하. 혹시 피곤하시다면 오늘은 푹 쉬시고….”
야를의 배려에도 군힐드는 손을 내저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피곤해도 보고 정도는 들을 수 있네. 현재 내 귀여운 남동생과 그 밑에 빌붙어 있는 근육 덩어리는 어디서 뭘 하고 있나?”
배 위에 있으면 바다에 고립된 거나 마찬가지였기에 정보의 갱신은 요원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군힐드는 피곤한 와중에도 야를에게 현재 상황을 캐물은 것이었다.
“일단 하랄은 며칠 전부터 진군을 멈추고 콜링에 머물고 있습니다. 또한, 용담공 역시 하랄 블로탄에게 합류한 걸로 보여집니다.”
“쥐새끼 같은 놈이 거기 숨어있었군. 자네는 왜 하랄이 거기에 처박혀 있다고 생각하나?”
“속하의 생각으로는 식량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퓐섬의 주도권은 저희에게 있고 함선으로 식량과 물자를 수송할 수 있는 최고점이 콜링이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도 그렇다네. 아마 그놈은 남부에서 가져오는 물자를 쌓아두며 그곳에 처박힐 생각이겠지. 하랄 입장에서는 유틀란트의 남부를 점거하고 있기만 해도 이득이니까.”
하랄답지 않게 교활한 행동이었다. 이전의 하랄이라면 뇌가 없는 것처럼 무지성으로 유틀란트를 집어삼켰을 것이다.
헌데 똘똘한 참모가 붙은 건지 아니면 본인이 성장한 건지 까다롭게 굴고 있었다.
“혹시 공성을 할 여력은 있나? 하랄의 입지가 확실하게 굳어지기 전에 공격하는 것도 나쁘진 않을텐데.”
“물론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 역시 그런 생각으로 정찰을 해봤는데 거의 뭐 요새를 만들고 있더군요.”
야를의 대답에도 군힐드는 실망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오는 것과 별개로 콜링은 퓐섬으로 가는 교두보이니 그것을 강화하는 건 당연한 얘기지. 우리가 먼저 그곳을 점령했다면 전방위로 압박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군.”
“죄송합니다. 하랄의 등장으로 유틀란트 전체가 흔들려서 쉽사리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딱히 자네를 힐난하는 게 아니니 자책할 필요 없네. 원인을 따지자면 제때 그를 처단하지 못한 내 잘못이니까.”
그렇게 말을 마친 군힐드는 팔짱을 낀 채 지도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국 전투는 유틀란트반도 서쪽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서쪽에 비해 동쪽은 도시의 규모도 별 볼 일 없는 데다 북해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바다도 지랄맞았고 함대를 상륙시킬만한 곳도 마땅치 않았다.
“일단 호르센스로 진군한다. 그곳을 전진기지로 삼고 가볍게 탐색전을 겸해 적과 한번 부딪혀봐야지.”
“언제 진군하시겠습니까?”
“다른 야를들이 어디쯤 오고 있다고 했었지?”
군힐드의 질문에 사내는 멋들어지게 난 수염을 쓰다듬으며 잠시 침묵하더니 기억을 더듬듯 천천히 이야기했다.
“어… 홀스테브로와 비보르는 진작에 출발했다고 했고… 란데르스도 사흘 전에 출발했다고 했으니 늦어도 사흘 안에는 전부 도착할 겁니다.”
야를의 답변에 군힐드는 잠시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병력을 끌고 진군하고 싶었지만 이번 전투는 최적의 상태로 전투에 임해야 했다.
“노잡이들과 병력들이 많이 지쳤고 지원군들이 쉴 시간도 필요하니 일주일 뒤에 이동하겠네.”
“알겠습니다. 기한에 맞춰 준비를 끝마쳐두겠습니다.”
“아, 그리고 노르웨이의 지원군은 어떻게 됐다던가?”
“오고 있다고는 하는데 별다른 소식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적당히 관망하다가 개입하려는 게 아니겠습니까?”
야를의 말에 군힐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 멍청한 놈들은 덴마크 다음은 자기들이라는 걸 모르는 게 분명했다. 그도 아니면 에릭이 오랜 기간 덴마크에 머물다 보니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것일지도 몰랐다.
이번 전쟁이 끝나는 대로 에릭에게 이야기해서 노르웨이도 한 번쯤 손을 봐야겠다. 물론 그 전에 자신의 귀여운 남동생을 손봐줘야 할 테지만.
* * *
<유틀란트반도 호르센스 ― 초원 지대>
호르센스 인근에 넓게 펼쳐진 초원은 군힐드에게나, 하랄 블로탄에게나 최적의 전장이었다.
군힐드에게는 혹시 모를 적의 복병과 후방의 적을 경계할 수 있는 전장이었고 하랄에게는 기병을 활용할 수 있으며 적의 추적 및 섬멸을 손쉽게 해낼 수 있는 전장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렇게 시야가 탁 트인 전장은 그 어떤 기교도 통하지 않는, 오직 힘과 힘이 맞부딪히는 전장이었다.
그렇기에 대규모 병력이 회전을 벌이기에 최적의 장소였고 이곳이 전장으로 낙점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병력들이 이렇게 나열해 있는 모습은 언제 봐도 장관이야. 그렇지 않나?”
라그나르는 일렬로 진을 만든 채 대기 중인 병력들을 보며 감탄을 터뜨렸다.
“동감이야. 다만 이들 중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살아남을지 모르겠군. 나 때문에 원래라면 흐르지 않아도 될 피가 흐르는 게 아닌가?”
하랄은 씁쓸한 눈으로 옆에 나열한 병력들과 자신의 앞에 있는 적들을 바라보았다. 덴마크의 왕인 하랄에게 있어 동족상잔의 비극만큼 끔찍한 건 또 없겠지.
“비 온 뒤 땅이 굳는다고 하지 않던가. 덴마크는 이 시련을 딛고 일어날 때 더 강해질 걸세.”
“그래. 나도 그럴 거라 믿네. 그런 믿음이 없다면 이 자리에 서지 못하겠지.”
하지만 말을 하는 것과는 다르게 여전히 심란한 표정이었기에 나는 그를 위로해줄 겸 이야기를 하나 들려주기로 했다.
“하랄. 자네 혹시 농사를 지어본 적 있나?”
뜬금없는 내 질문에 하랄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성실하게 대답해주었다.
“남들이 짓는 건 본 적이 있지만 내가 직접 지어본 적은 없네.”
“난 가끔 취미 삼아 토마토를 기르는데 이게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작물이더군.”
“그야 뭐… 그렇지 않겠나? 애초에 농사가 쉬울 리가 없잖나.”
“하하, 맞는 말이야. 근데 그거 아나? 이 토마토가 크는 걸 방해하는 요인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힘든 건 잡초를 솎아내는 일일세.”
“잡초… 잡초라….”
“이 잡초라는 것들은 원치도 않는데 토마토의 곁에 자라면서 성장을 방해하고 영양분을 빨아먹더군. 참으로 나쁜 놈들이 아닌가?”
“그래. 참 나쁜 놈들이구만. 그런 질 나쁜 놈들은 하나도 남김없이 솎아내야겠지.”
하랄은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주먹을 불끈 쥐며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충분히 전해진 것 같았기에 난 굳이 더 이야기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툭 쳐준 뒤 뒤로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