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또 진군 준비를 하고 있다고?”
“예. 그리고 떠도는 소문으로 보아 주치의께서 숙청을 당하신 것 같습니다.”
“그게 죽었다는 얘기는 아니겠지?”
얀의 대답에 나는 설마 하면서도 되물었다. 숙청이라고 하면 대개 죽는 걸 의미하니까.
“조용히 은퇴하셨다고 합니다. 아마 사전에 얘기한 대로라면 한동안은 추적이 붙을 수 있으니 퓐섬에 머물다가 적당한 틈을 타서 복귀할 것 같습니다.”
얀의 보고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솔직히 긴가민가했는데 이비는 자신의 할 일을 깔끔하게 끝냈고 이제 남은 건 나와 하랄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뿐이다.
“지난번처럼 군힐드와 에릭이 같이 진군한다던가?”
“아뇨.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지난번에 주군께서 수도를 급습한 기억 때문인지 에릭과 그의 정예병인 허스칼들은 방어를 위해 쾨벤하운에 남을 것 같습니다.”
“그렇구만. 고생했네. 그래도 적들의 기만책일 수 있으니 계속 감시를 하게.”
“예. 다만 배신자를 색출하기 위해 감시가 강화됐다고 하니 이전처럼 많은 정보를 얻는 건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뭐, 에릭 입장에서 도시의 방어체계, 그것도 수도의 방비가 뚫렸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실제로 이비가 스파이 짓을 하기도 했고.
“알겠네. 그리고 뭐 더 보고할 게 있나?”
“어… 보고라기보다는 저희는 추후에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우리도 정비를 마치고 이동할 테니 하랄에게 전령을 보내두게.”
본래는 한 번쯤 더 괴롭힐 생각이었지만 에릭도 남아있고 적들도 똑같은 수법에 두 번 당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테니 그냥 예정대로 합류하기로 했다.
그 숫자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도 나와 힐데, 이비 같은 동료들의 진가는 대규모 난전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사망자 수를 줄여주고 부상 확률을 낮춰주는 이비의 패시브가 아쉽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히 에릭의 의심을 살 수는 없으니 이번에는 별수 없이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얀은 원래도 능력이 좋았었는데 니스에 박아두고 고드프리를 통해 이것저것 교육을 시켜놨더니 빠릿빠릿하게 내 명령을 수행하는 게 아주 맘에 든다.
역시 유능한 수하를 들여야 내 몸이 편하단 말이야.
덕분에 잠깐의 짬이 난 나는 내 가족이나 다름없는 힐데를 보러 가기로 했다. 최근 들어 일이 바빠 그녀에게 신경을 못 써주다 보니 이렇게 짜투리 시간이 남을 때마다 보러 가는 편이다.
“힐데!”
벌컥 방문을 열어제끼자 책상 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적고 있던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맞아주었다.
“노크 좀 해주면 안 됩니까?”
“에이, 너랑 나 사이에 왜 그래.”
내가 히죽 웃으며 그녀의 목덜미에 거칠게 난 수염을 비비자 그녀는 질색팔색하는 눈초리로 날 밀어내며 한숨을 쉰 뒤 펼쳐져 있던 책을 덮었다.
“책 읽고 있었어?”
“아뇨. 수기 좀 쓰고 있었습니다.”
“오, 좀 봐도 돼?”
“별로 재미는 없을 겁니다.”
그녀는 책을 건네주었고 나는 훌렁훌렁 페이지를 넘기며 안의 내용을 쓱 훑었다. 그녀의 말마따나 수기라기보단 보고서와 같은 형태의 글이었다.
몇 월 며칠에 무슨 일이 있었고 신도들에게 설교를 했다든가, 몇 명에게 세례를 했다든가 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나중에 이것도 포함해서 정화교단에 보고해야 한다고 했던가?”
“까먹고 있는 줄 알았는데 의외군요.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정화교단 소속의 수녀로서 파견을 나와 있는 거니까요.”
“흐음, 그럼 언젠가는 다시 정화교단으로 돌아가야 되는 거야? 난 계속 옆에 있어 줬으면 좋겠는데.”
내 물음에 힐데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처음 당신을 찾아갔을 때는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왜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습니까?”
“어? 싫어했다기보다는 그 뭐냐… 내 딸이나 다름없는 네가 위험한 일을 하는게 싫어서 그런 거지. 사실 용병이라는 게 생존율이 높은 일은 아니잖아.”
“그렇기는 하죠. 그나저나 딸이라… 흐으음.”
힐데는 더욱더 묘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품속에서 고급스럽게 포장된 편지 봉투를 한 장 꺼내서 내게 건넸다.
“아, 그리고 당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편지가 한 통 왔습니다.”
“편지? 누구지? 혹시 칼리나야?”
“촉 하나는 기가 막히는군요.”
그녀는 혀를 내두르며 내게 편지 봉투를 건네주었고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조심스레 인장을 뜯고 내용물을 꺼냈다.
[오랜만이야 라그나르. 어떻게 추운 북부에서 잘 지내고 있나 모르겠네.
근데 당신은 원래 북부의 바이킹 출신이니 걱정할 필요도 없이 잘 지내고 있겠지.
사실 당신이라면 어디에 데려다 놓든 잘 지내고 있을 것 같긴 해. 아무튼, 음… 뭔가 할 말이 굉장히 많았는데 막상 쓰려니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네.
그래, 뭐 일단 차근차근 얘기해볼게. 일단 아쉽게도 나와 당신의 사랑의 결실은 열매를 맺지 못했어.
이름까지 미리 지어놨는데 참 안타까운 일이야. 그래도 뭐, 시간은 많이 남아있으니까 상관없겠지? 내가 없다고 당신이 헛짓거리를 하지 않을 거라 믿을게.
음, 그리고 두 번째로… 이미 전해졌을지 모르겠는데 황제가 쓰러졌어. 솔직히 당신이 떠나기 전에 황제가 쓰러질 거라는 얘기를 비롯해 이것저것 말해줬는데 솔직히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거든.
아, 그런데 내 탓은 하지 말아줘. 솔직히 당신한테 깔려서 앙앙거리고 있었는데 그런 걸 들을 정신이 있었겠어?
지금에서야 하는 얘기지만 난 그런 게 뱃속에 들어올 거라곤 상상도 못 했어. 내가 듣기로는 조금 더 사이즈가 음… 앙증맞다고 들었거든.
거기에 내가 안 된다고, 멈추라고 울면서 애원해도 듣지도 않고 날 짓누르면서 내 뱃속을 당신 걸로 가득 채우며 마킹을 하는데… 기절하지 않은 것만으로 칭찬해줘야 하지 않을까?
아무튼, 그래서 준비가 안 돼 있다 보니 대응이 좀 늦긴 했는데 당신 말대로 일단 필리프에 대한 지지를 공개적으로 표명했어.
이미 중부는 개판이 났고 필리프와 하인리히의 파벌 간에 알력 다툼이 심각하다고 하더라. 다만 필리프가 밀리는 모양새라 곧 이쪽에서 지원 병력과 물자를 몰래 보내줄 생각이야.
다만 다른 선제후들의 눈치를 봐야 돼서 노골적으로 밀어주지는 못하고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만 그치고 있어. 아마 본격적인 경쟁은 황제가 죽는 그 순간 벌어지겠지.
아무튼, 그것 이외에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어. 조금 더 편지를 쓰고 싶지만 오늘만 날이 아니니 이쯤에서 줄이도록 할게.
사랑하는 당신에게, 깊은 애정을 담아서.
칼리나 디 카노사가]
“음… 어쩐지 떠날 때 허리를 계속 붙잡고 있더라니.”
사실 나로서도 빙의를 하고 나서 처음으로 허리를 놀려봤기에 라그나르의 정력을 실감한 건 처음이었다. 애초에 힐데가 눈에 불을 켜고 날 감시하는데 어떻게 딴짓을 하겠는가.
그런데 라그나르의 정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어쩐지 떠날 때도 허리를 계속 붙잡고 있더라니 그게 다 이유가 있었군.
아무튼 그것과는 별개로 편지에는 정확히 내가 알고 싶은 내용이 담겨있었기에 나는 미소를 머금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좋은 내용이라도 담겨 있었습니까?”
“황제가 쓰러졌다더라.”
세계가 뒤흔들 대사건을 담담히 이야기하는 내 모습에 힐데는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 설마 죽었답니까?”
“죽었으면 난리가 났겠지. 다행히 아직 숨은 붙어있는 모양이야.”
뭐, 슬슬 갈 때가 되긴 했지. 생각해보면 원래 나이보다 10년은 더 살았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나마 프리드리히 입장에선 십자군 간다고 설치다가 강에 빠져서 익사하는 것보단 이게 훨씬 더 편안하고 안락한 죽음이 될 것이다.
“그럼 슈바벤에선 지금 물밑에서 암투가 오가고 있겠군요.”
“그러겠지. 하인리히는 황제가 살아있을 때 슈바벤의 공작에 오르고 싶어 할 테고 필리프는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 황제가 죽기를 기다릴 테니까.”
내 경험상 프리드리히가 노환으로 쓰러지고 나면 일 년 안에 반드시 사망했다. 즉, 그 말인즉슨 나는 일 년 안에 이 원정을 마무리 짓고 다시 뤼벡으로 복귀해야 함을 의미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군힐드와 에릭의 목을 벤다고 다 끝나는게 아니라 잔당을 소탕하고 안정화시키는 시간도 필요하니 실제로 내게 남은 시간은 반년도 되지 않았다.
“거 시발, 난이도 참 지랄맞네.”
결국 나는 이 불합리한 상황에 욕설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뭐든지 타이밍이 중요했고 내가 늦어서 필리프가 하인리히에게 암살이라도 당했다간 제국은 긴 내전을 겪어야 할 테니까.
* * *
[유틀란트반도 중부지점 ― 콜링]
나는 서둘러 하랄이 기다리고 있는 유틀란트반도로 향했고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만나야 했다.
“오토? 자네가 왜 여기에 있나? 함부르크는 어쩌고?”
“아버지께서 지원 병력을 보내면서 용담공 전하를 도우라 하셨습니다.”
“사자공 전하가 날 도울 여력이 있기는 한가?”
말을 마친 나는 자칫 잘못하면 오해를 살 수 있겠다 싶어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 황제 폐하가 쓰러져서 시국이 어수선하지 않나? 이 상황에 북쪽으로 지원 병력을 보낼 여력이 남아있느냐 이 말일세.”
“이번 사태에 대해 아버지께서는 개입하지 않기로 결정하셨습니다. 괜히 권력 다툼에 끼었다가 본전도 못 찾을 우려가 있고… 이미 용담공 전하께서 수를 써놓지 않으셨습니까?”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짬밥을 먹으니 오토도 제법 눈치가 빨라졌다. 개인적으로 현명한 처사라고 생각한다.
“글쎄… 아무튼 와줘서 고맙네. 솔직히 자네가 와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거든.”
“대의를 위해 함께 피를 흘린 혈맹인데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론 저건 핑계에 불과하다. 아마 사자공은 팔짱 끼고 관망하다가 내가 쾨벤하운도 성공적으로 기습하고 하랄이 유틀란트에서 무서운 기세로 진격해나가자 그걸 보고 참전을 결심했겠지.
1차 세계대전에서 진짜 전쟁 막바지에 일본이 숟가락을 얹어서 승전국의 지위에 오른 것처럼 숟가락이라도 얹으려면 무언가 전공이 있어야 했고 그 때문에 부랴부랴 오토를 보낸 것이다.
“그래. 안 그래도 추가로 병력 차출을 할 생각이었는데 다행이군.”
내가 옆에 서 있는 얀에게 손짓하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에 지도를 펼쳤고 오토는 새롭게 내 부관이 된 얀을 묘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한 번만 설명해줄 테니 집중하게.”
“알겠습니다.”
그의 주의를 환기한 나는 지도의 한 곳을 콕 집으며 이야기했다.
“내가 함선을 빌려줄 테니 자네가 데려온 병력을 이끌고 이곳 에테보르로 떠나게.”
“예? 어… 전하. 여기는 스웨덴의 영토가 아닙니까?”
“맞네.”
“헌데 왜….”
“가보면 알게 될 걸세. 내가 설마 자네에게 사지로 가라고 하겠나? 가면 고드프리가 자네를 맞이해줄 테니 자세한 건 그에게 듣도록 하게.”
“어…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나중에 전장에서 보세나.”
오토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준 나는 다른 이들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여전히 촉박했고 내게 남은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