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9화
“오늘 나는 충신을 잃었구나.”
이런 일을 벌일 수 있는 것은 군힐드뿐이다. 자연스레 군힐드에 대한 분노가 솟구쳤지만, 그녀의 행동을 마냥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불안함. 그게 군힐드를 압박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아내를 잃었을지도 모르지.”
사실 자신과 그녀의 관계는 정략결혼치고는 썩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처음 그녀를 마주하고 느낀 감정은 호기심이었다. 이제 갓 스무 살을 넘었을 법한 여인이 홀몸으로 노르웨이의 오슬로까지 와서 덴마크를 되찾게 도와달라 얘기하는데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호기심은 시간이 지날수록 애정으로 탈바꿈했고 결국 자신은 그녀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노르웨이의 군사력을 이용해서 그녀가 덴마크를 되찾는 걸 도와주었다.
물론 사랑에 눈이 멀어 간이고 쓸개고 다 바친 건 아니었다. 자신은 평상시 척박한 노르웨이에 더 이상 희망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교두보가 필요하던 찰나에 그녀가 방문한 것이다.
덴마크의 분열은 노르웨이에게 있어서 기회나 다름없었다. 결국, 하랄 블로탄의 왕위가 흔들리는 틈을 타서 자신은 병력을 끌고 덴마크를 급습했고 그는 그렇게 무너졌다.
어렸던 하랄 블로탄은 야를들을 규합하지 못했고 평상시 그에게 불만이 있던 야를들은 군힐드의 깃발 아래 결집했다.
결국 그는 간신히 목숨을 건진 채 자신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이끌고 바다 건너 저 멀리, 노르웨이보다 척박한 땅인 탈린으로 도망쳤다.
그렇게 군힐드는 덴마크의 여왕이 되었고 그녀의 남편이었던 자신 또한 공동 국왕이 되었다.
물론 자신이 노르웨이를 비운 틈을 타서 형제들이 반기를 들기는 했지만 전부 자신의 손으로 헬헤임에 보내주었기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녀는 덴마크를 되찾았고 자신은 남부로 내려갈 교두보를 얻었으며 모든 불만과 반란은 종식되었다.
이게 동화였다면 남은 건 해피엔딩이었을 테지만 현실은 냉담했다. 생각해보면 하랄의 숨통을 끊기 위해 리가로 출진했을 때부터 톱니바퀴가 어그러졌던 것 같다.
온 힘을 끌어모아 대규모 원정을 떠났지만,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하랄이 세력을 더 키우고 라그나르와 폴란드라는 새로운 동맹을 얻는 꼴을 얌전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원정에 처참히 실패하고 돌아오자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서운한 마음이 들었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본인이 나라는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여 왕위를 되찾은 만큼 그녀는 자신의 동생이 또 다른 외부의 세력을 끌어들이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그녀는 하랄이 커가는 걸 두 손 놓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다시 한번 병력을 끌어모아 원정을 나가고 싶었지만 군대의 이동에는 돈과 물자가 든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긴 내전을 거치며 덴마크의 재정은 거덜 났고 그때의 원정이 모든 걸 긁어모아 떠난 원정이었기에 더 이상의 원정은 스스로의 목을 죄는 행위였다.
아마, 그때부터 군힐드의 불만은 조금씩 누적되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스스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으며 정치에서 점차 날 배제해나갔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내가 못 미더웠을 수도 있고, 시간이 흐를수록 약해져 가는 자신의 세력을 결집시키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고, 그도 아니면 자신의 손으로 하랄을 끝장내기 위함이었을 수도 있겠지.
그렇게 덴마크는 군힐드의 파벌과 자신의 파벌로 갈라졌고 긴장감이 감돌던 그때, 하랄 블로탄이 동맹군을 등에 업고 유틀란트반도를 침공했다.
대처 방안에 대해 격렬하게 토의가 오갔고 자신은 노르웨이의 지원군과 함께 싸우자고 얘기했지만, 그녀는 유틀란트가 넘어가기 전에 하랄의 진격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결국 그녀의 뜻대로 됐고 군힐드는 그녀의 이름을 걸고 군사를 일으켰지만, 쾨벤하운의 습격으로 싸우기도 전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궁지에 몰린 그녀는 떨어진 지지를 결집하고 본인의 실패를 덮기 위해 눈엣가시였던 예언가를 제물로 삼고자 했을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었고 예언가가 나를 홀렸다는 식으로 소문을 내면 나와 내 파벌을 억누를 수 있음은 물론 주도권이 다시 그녀에게 넘어갈 테니까.
그걸 알기에 예언가는 자신을 떠났고 자신은 떠나는 예언가를 붙잡지 못했다.
“가서 붙잡아 올까요?”
대놓고 실망하는 자신의 모습에 옆에서 눈치를 보던 부관이 조심스럽게 이야기했고 에릭은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럴 필요 없네. 애초에 붙잡는다고 얌전히 붙들려올 이도 아니니까.”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그녀의 몸에서 넘쳐흐르는 엄청난 신성력은 가볍게 볼 게 아니었다. 하긴, 그러니 군힐드의 저주를 받았음에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겠지.
“내 살아생전 예언가를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
* * *
“여왕 전하. 예언가가 성을 나섰다고 합니다.”
“나섰다는 게… 내가 원하는 말이 맞나?”
군힐드의 말에 그녀의 첩보관은 싱긋 웃으며 그녀가 듣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예. 국왕 전하께 마지막 인사까지 남겼다고 합니다.”
“혹시 에릭이 붙잡던가?”
“아니요. 그냥 아쉬운 듯 바라보더니 그대로 보내줬다고 합니다.”
“흐음….”
하는 걸 보면 붙잡을 만도 한데 그냥 보내줬다는 걸 보면 그녀를 포기했다고 보는 게 옳았다. 하긴, 자신과 예언가를 저울질하면 당연히 자신을 택할 터였다.
“추적대를 보낼까요?”
“아니, 됐다. 하야하는 이를 굳이 건드릴 필요가 어디 있겠나.”
본래라면 후환을 남기지 않는 게 자신의 일 처리 방식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애초에 예언가를 죽일 생각으로 저주를 걸었지만, 자신의 힘이 약해진 건지 아니면 진짜 신의 힘을 쓴 건지 그녀는 살아서 제 발로 성을 걸어 나갔다.
즉, 본인 나름대로 숨겨둔 비장의 한 수가 있다는 거고 그런 상대는 굳이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거기에 알아서 사라지겠다는데 괜히 잘못 건드려서 실패하기라도 했다간 긁어 부스럼이었다.
원하던 결과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에릭에겐 미안하지만, 그에게 악의적인 소문을 통해 지지를 결집시켰고 전쟁에 대한 여론을 끌어모았다.
하지만 여전히 상황은 이쪽에 불리했고 결과적으로 하랄을 붙잡아 참수하지 않으면 내전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하나 남은 가족을 죽인다는 상황에 거부감이 들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랄의 정통성은 자신과 비교할 바가 아니었고 그가 살아있는 한 자신의 지위는 계란 위에 만든 집처럼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이번 기회를 통해 단번에 하랄을 사로잡을 작전을 짜내고 있던 군힐드에게 뜻밖의 인물이 방문했다.
“군힐드. 그대도 보고 받아서 알겠지만, 오늘 예언가가 떠났소. 이제 만족하시오?”
“에릭. 당신이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변명을 듣자고 온 게 아니오. 아무튼, 그대가 원하는 대로 됐으니 어디 한번 마음대로 해보시오. 얼마나 잘하나 지켜보겠소.”
할 말을 마친 에릭은 군힐드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방문을 나섰고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군힐드는 입술을 씹었다.
자신이라고 에릭과 대적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을 따르는 야를들과 덴마크인들의 불안과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은 에릭의 아내인 동시에 덴마크인들과 야를들의 충성을 받는 군주였다.
그리고 에릭은 그들에게 있어서 외부인이자 침략자였으며 정당한 계승자인 하랄을 쫓아낸 찬탈자였기에 많은 이들이 그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이면 말도 안 하련만 갑작스러운 노르웨이인들의 이주로 덴마크는 긴 과도기와 혼란을 겪어야 했다.
같은 북방민족이라지만 북해를 사이에 두고 있기에 문화도 달랐고 종종 그들에게 유틀란트반도의 해안선이 약탈당했기에 많은 이들이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노르웨이는 토르를 섬겼으며 덴마크는 대체적으로 오딘을 섬겼다. 이런 문화와 종교의 차이는 극복하기가 힘들었는데 실제로 저 아래에서는 같은 신을 섬기면서도 종교전쟁을 벌인다고 하지 않던가?
하물며 다른 신을 모시는 이들끼리는 더 말할 게 있을까? 그나마 지금까지는 공공의 적이 있었기에 불만이 있어도 참고 인내해왔다.
어쨌거나 에릭은 자신의 남편이었고 노르웨이인들의 왕이었으니까. 하지만 국가가 안정되고 공공의 적들이 사라져가면서 불만이 조금씩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원래 두 개의 집단이 합쳐지면 불만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건 불변의 진리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 불만은 에릭이 국고를 탕진해가면서 나갔던 원정에서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왔을 때 절정에 달했다.
결국, 군힐드는 그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자신이 나서야 함을 깨달았고 그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인 건지 모르겠네.”
하지만 잘못된 건 고치면 그만이고 꼬인 건 풀면 그만이다. 길게 얘기할 것도 없이 하랄만 사로잡으면 끝이다.
물론 신성제국의 용담공.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를 사로잡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겠지만 주변의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 그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결국 하랄을 잡아야 하는데 그가 죽는 순간 내전의 명분은 사라질 테고 신성 제국과 폴란드의 병력들은 외세의 침략자들로 변모될 터였다.
그리되면 하랄에게 협조했던 야를들도 자신들의 영지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일어설 테고 적들은 퇴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 필요한 건 단 한 번의 완벽한 승리였다.
“집행관.”
“예. 여왕 전하.”
“병력을 소집하라. 내 이번에야말로 하랄의 목숨을 거둘 것이다.”
그녀의 명령이 떨어지자 군은 분주하게 재출정 준비를 시작했고 그 소식을 들은 에릭은 기가 차다는 얼굴로 다시 군힐드를 방문했다.
“당신 미쳤소?”
“그렇게 보이십니까?”
태연하게 대꾸하는 군힐드의 모습에 에릭은 헛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왜 그렇게 서두르는 거요? 조금만 기다리면 노르웨이의 지원군이 올 텐데 그들 없이 출진할 생각이오?”
“하, 대체 그 지원군은 언제 온답니까? 온다 온다 말만 해놓고 벌써 한 달이 넘게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건 알고 있습니까?”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소. 각개격파를 막기 위해선 이쪽과 동시에 진군해야 하는데 그동안 이곳에서 출정을 미루고 있지 않았소?”
그렇다고 노르웨이 단독으로 유틀란트에 상륙할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군을 움직인다는 건 물자와 식량을 사용해야 한다는 얘기였고 덴마크는 그들의 물자를 지원해줄 정도로 자원이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으니까.
거기에 최근 스웨덴과의 국경에서 그들이 대규모 기동 훈련을 한다는 얘기가 들려와서 그런지 함부로 병력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노르웨이는 땅은 넓지만, 태반이 얼어붙어 있었고 불모지였기에 부동항이자 수도인 오슬로에 대부분의 기능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오슬로가 점령당하면 노르웨이의 8할이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하는 말입니다. 어중간하게 연합을 하느니 이쪽에서 단독으로 진군하는 게 낫습니다. 애초에 두 개의 군대가 연합 훈련을 시행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리고 노르웨이의 도움을 받으면 받을수록 덴마크의 입지는 줄어들 것이다. 거기에 노르웨이와 덴마크 간에 남아있는 해묵은 감정이 문제였다.
동군연합이 됐다지만 수십, 수백 년간 이어져 온 앙금이 고작 몇 년 사이에 해소될 리가 없잖은가.
“그건 그렇소만….”
“중립을 지키는 야를들도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일어설 테니 걱정할 건 없습니다.”
다행히 자신과 물밑으로 접촉한 야를들이 몇 있었고 그들은 자신들이 진군하는 순간 하랄을 배신한다 약조했다. 그 혼란을 틈타 진격한다면 단숨에 적군을 분쇄할 수 있을 것이다.
“허면 나도 함께 출진하겠소.”
“당신은 여기 남아서 라그나르의 공격을 대비해주세요. 수도가 다시 한번 습격당하면 그땐 끝입니다.”
그 말에 에릭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번 습격으로 재미를 봤으니 아군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또 수도를 급습할 가능성도 있었다.
그 때문에 에릭은 애써 불안함을 감추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상황에선 그녀의 말대로 하는 게 최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