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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48화 (148/205)

▣ 148화

쾅!

자신의 문을 박차고 들어온 군힐드는 들고 있던 서류를 바닥에 집어 던지며 씨근덕거렸다.

“그 천박하고 음탕한 년이 감히….”

생각해보면 뜬금없이 에릭이 예언가라는 년을 데려온 것부터가 이해가 안 됐다. 애초에 에릭은 예언이나 신탁 같은 종류의 미신을 믿는 남자가 아니었다.

물론 수하들을 시켜 뒷조사를 해보니 꽤 예전부터 마녀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고 그 소문을 들은 에릭이 그녀를 불러들였다지만… 그걸 마냥 믿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자신과의 잠자리가 줄지 않았던가. 자신이 비록 남자는 아니지만, 남자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남자의 허리 아래로는 믿지 말라는 말이 있듯,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사랑하지만 그가 자신만을 바라보는 남자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인정하긴 싫지만, 확실히 미인이었지.”

어디가 어떻고 저렇고 묘사할 것도 없이 그녀는 그냥 한눈에 봐도 미인이었다.

대체 왜 그런 얼굴을 가지고 가면을 쓰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애초에 그런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여러모로 문제가 생길 테니 가리고 다니는 거겠지.

아무튼, 가면에 감춰진 그녀의 얼굴은 같은 여자인 자신이 봐도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런 미인을 에릭이 뜬금없이 예언가라며 끌어들임은 물론이고 과할 정도로 싸고돈다? 싫어도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을 마친 군힐드는 자신의 앞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여전히 빼어난 얼굴의 미인이 앉아 있었지만, 거울 속의 그녀는 표독스러운 얼굴로 이를 악물었다.

아무리 미인이라도 결국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순 없는 법이었다. 자신의 나이는 어느덧 40을 넘겼고 몸에는 세월의 자국이 새겨져 있었다.

늙어서 주름이 새겨진 자신의 얼굴. 화장으로 가리려 하지만 가려지지 않는 눈가의 잔주름과 푸석푸석한 피부까지.

반면 예언가는 탱글탱글한 피부는 물론이고 옷 위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큰 가슴과 잘록한 허리, 보석처럼 빛나는 눈동자, 그리고 달빛처럼 일렁이는 머리칼을 가지고 있었다.

세상 그 어느 남자가 그녀를 마다할 수 있을까? 만약 그 천박한 년이 몸으로 에릭을 유혹이라도 하는 순간… 아니, 어쩌면 진작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

군힐드는 질투라는 감정으로 가슴이 일렁이면서도 냉철하게 현 상황을 파악했다. 오늘 자신의 행동 때문에 예언가의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에릭의 아내인 자신조차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이런 생각을 하는데 다른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할지는 뻔하다.

사람 세 명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든다고 일단 염문설이 퍼지게 되면 없던 사실이 진실이 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혼으로 맺어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동맹은 그 뿌리부터 흔들릴 테고 교활한 하랄은 그 틈을 절대 놓치지 않겠지.

“그렇게 둘 순 없지.”

의도치 않게 일이 꼬이긴 했지만 여전히 덴마크는 굳건했다. 라그나르의 공격은 격퇴했고, 혼란은 수습했으며, 하랄 블로탄의 진격도 슬슬 그 기세를 잃어가고 있었다.

다만,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면 현 상황 그대로 판이 굳어질 수가 있었고 예언가의 말이 옳았다는 게 입증되었기에 자신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흔들리는 입지를 다지기 위해선 빠른 시일 안에 판을 뒤집어야 했다. 하지만 예언가의 말이 틀린 것만도 아닌 게 이대로 병력을 들이부어봤자 상황이 호전될 거라는 보장은 없다.

그럼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의외로 답은 간단했다.

이 상황을 만들어낸 원인이자 원흉을 없애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하랄과 라그나르를 저주로 죽이는 건 힘들 테지만 예언가 행세를 하는 마녀 하나쯤은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일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죽는다면 에릭은 자신을 의심할지라도 결국 권좌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내민 손을 잡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예언가가 마녀라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상관없었다. 자신 역시 신의 힘을 받아들인 마녀였고 본인에게 힘을 내려준 신은 오딘조차도 죽이지 못했다는 굴베이그였으니까.

* * *

“흠… 이제 슬슬 뭔가 대처를 할 때가 됐는데.”

이븐 시나는 자신의 방 소파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언젠가 가면을 벗을 생각이긴 했지만 좀 더 시간을 들여 보여줄 생각이었는데 군힐드 덕분에 자신의 계획을 망치고 말았다.

물론 타이밍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 쾨벤하운에는 자신과 에릭 간의 관계에 대해 여러 염문설이 돌기 시작했고 이븐 시나는 의도적으로 그 소문을 부추겼다.

한눈에 보기에도 군힐드는 독점욕이 강해 보였고 자신의 외모에 대해 굉장히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여자였다.

그런 여성이 자신보다 더 예쁜 여성을 보고, 그 여성이 자신의 남편과 가까운 관계라는 걸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나올까?

아마 질투와 열등감에 휩싸일 테고 그녀의 성격상 열에 아홉은 그 원흉을 제거하려 들 터였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실시간으로 자신의 피부에 새겨진 낙인이 사라지고 있었다.

죽음과 관련된 힘을 활성화시키고 아포피스의 힘을 받아들일수록 자신에게 새겨진 낙인은 사라진다. 반면 이 힘을 쓰지 않고 저항할수록 이전처럼 흉물스러운 모습을 가지게 된다.

자신이 아무런 힘도 쓰지 않았는데 낙인이 벗겨지고 있다는 건 누군가 자신을 저주하고 있다는 얘기밖에 더 되겠는가?

하지만 그녀에겐 안타깝게도 이런 어설픈 저주와 주술로 자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에 물을 끼얹으면 꺼지지만, 물에 물을 끼얹는다고 물이 사라지던가?

차라리 칼이나 창으로 찌르는 거라면 모를까 이런 저주로 자신을 죽일 순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사실 자체는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것이다.

생각을 정리한 이븐 시나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가면을 뒤집어쓰고 팔에 붕대를 감은 뒤 전신을 가리는 로브를 걸친 채 에릭을 만나기 위해 그의 집무실로 찾아갔다.

최근 몇 달간 에릭의 옆에 붙어 다니며 그의 참모로서 활동했기 때문인지 경비병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비켜주었고 나는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전하.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노크를 한 지 채 10초도 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리더니 에릭이 직접 자신을 맞아주었다. 그는 본인에게는 와인을, 그녀에게는 뜨거운 차를 건네는 배려를 보여주었다.

“어서 오게. 예언가여. 그래, 오늘은 내게 어떤 지혜를 빌려주기 위해 찾아온 건가?”

활짝 웃으며 이야기하는 에릭을 향해 이븐 시나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하고, 감정 없는 목소리로 사직을 통보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사직을 청하기 위해서 왔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더 이상 전하의 곁에서 조언을 해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일신상의 사유로 더 이상 전하의 곁에 머무는 게 힘들 것 같습니다.”

“대체 그 일신상의 사유가 뭔데 그런가? 그대가 그대 입으로 세 번의 예언을 해줄 때까지는 내 곁에 있겠다고 하지 않았나?”

추궁하듯 묻는 에릭의 모습에 예언가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밖에 떠도는 소문을 전하도 들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 말에 에릭은 움찔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래. 들었다. 허나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소문을 잠재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내가 결백하고 그대가 결백함을 하늘이 알고 땅이 알며 신들께서 알고 계시는데 두려울 게 어디에 있겠나?”

“세상 이치가 그렇게 단순하게 돌아가는 게 아님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예언가의 말에 에릭은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말대로 정치판이라는 게 그렇게 단순히 돌아갈 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종종 아무 생각 없이 전장에서 도끼를 휘두르던 때가 그립기도 했다.

“전하. 제가 전하의 부름에 응한 것은 이 땅에 사는 백성으로서 전하께서 인과 의로써 세상의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에릭은 인과 의는 물론이요 정의와도 거리가 꽤 멀었지만 예언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허나 저의 존재가 전하의 앞길을 방해한다면 제가 사라지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에릭은 차마 뭐라고 대답하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말도 안 되는 염문설은 궁을 넘어 쾨벤하운 외부에까지 퍼지고 있었다.

심지어는 쾨벤하운이 공격받은 게 자신이 예언가의 손에 놀아나느라 헛짓거리를 해서 제대로 된 방비를 안 했기 때문이라는 괴소문까지 퍼지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그게 진실인 양 호도되고 있다는 점이었다. 에릭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지만 예언가의 말대로 세상일은 단순하지 않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게 불가능했다.

“내 토르께 맹세코 그대가 내게 방해된다 여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다네.”

“전하의 믿음과 신뢰를 믿고 있지만 지금은 제가 물러나야 하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그 말과 함께 예언가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에릭은 그녀를 잡기 위해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다 실수로 그녀의 앞에 있던 차를 엎지르고 말았다.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차는 예언가의 옷을 적셨고 그녀는 작게 신음 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 이런… 미안하네. 팔은 괜찮은가?”

에릭은 서둘러 그녀의 로브 안에 감춰져 있던 팔을 쥐며 상처를 확인하려는데 예언가는 거칠게 에릭의 손길을 뿌리치며 왼손으로 자신의 오른 손목을 움켜쥐었다.

“괜찮습니다. 전하. 반쯤 식어있던 차니 화상을 입을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을 하는 그녀의 양쪽 팔에는 붕대가 칭칭 감겨 있었다. 다치지도 않았는데 붕대를 감고 다닐 이유가 없었기에 뭔가 이상함을 감지한 에릭은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이건 어떻게 된 건가? 왜 팔에 붕대를 감고 있는 거지?”

“별거 아니니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별일이 아닌 게 아님을 감지한 에릭은 솟구쳐오르는 의심과 불안을 애써 억누르며 얘기했다.

“그 붕대를 풀어보게.”

“그럴 수 없습니다.”

“허면 그 쓰고 있는 가면이라도 벗어보게.”

“죄송하지만 그것도 안 됩니다.”

“내 마지막 부탁일세. 세 번째 예언을 해주지 않은 대신이라고 할 수는 없겠나?”

자신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예언가는 굳건하게 고개를 가로저었고 자신의 의심이 확신으로 변해가는 걸 느끼며 에릭은 군힐드가 그랬듯 그녀가 방심한 틈을 타 예언가의 가면을 잡아챘다.

그리고 드러난 그녀의 모습에 에릭은 헛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에 봤던 아름다운, 아니 그걸 넘어서 경외감마저 느껴지던 모습은 어디 가고 신마저 고개를 저을 추녀가 눈앞에 있었다.

아니, 이건 추녀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기도 힘든, 그야말로 추악한 괴물과도 같은 모습이었다. 며칠 사이에 사람 얼굴이 이렇게 바뀔 리는 없으니 이건 분명….

“…저주인가?”

“전하.”

“예언가여. 내게 사실을 고하라. 누군가가 그대에게 저주를 걸은 것인가?”

예언가는 침묵으로 일관했고 에릭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절대 입에 담고 싶지 않았던 이름을 올렸다.

“군힐드인가?”

“전하. 지금 와서 누가 저주를 걸었는가가 중요하겠습니까? 어차피 저는 물러날 생각이었고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요양을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녀의 말에 에릭은 차마 그녀의 눈동자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지금 그녀의 올곧은 눈동자를 봤다가는 죄책감에 삼켜져 버릴 것만 같았다.

“…날 원망하지 않는가?”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하를 끝까지 모시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끝까지 자신을 걱정하는 예언가의 모습에 에릭은 탄식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를 막을 명분도 이유도 사라졌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떠나려는 이를 어떻게 막는단 말인가?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니 전하께 세 번째 예언을 드리겠습니다.”

“…경청하겠네.”

“모든 걸 의심하십시오. 어쩌면 배신자는 가까이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말을 마친 예언가는 테이블 위에 있던 가면을 뒤집어쓴 뒤 방을 나섰고 에릭은 천천히 멀어지는 그녀의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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