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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47화 (147/205)

▣ 147화

“이런 쥐새끼 같은 놈.”

에릭은 배 위에 올라 도망치는 라그나르를 바라보며 허탈하게 웃었다. 예언가의 말을 따라 반신반의하며 이곳까지 내려왔는데 그녀의 말이 옳았다.

라그나르는 이곳에 머무르며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그 때문에 전쟁을 끝낼 수 있다는 사실에 눈이 돌아가 급습을 했지만 실패하고 말았다.

“생각보다 머리가 좋군요.”

“쯧, 저깟 재물에 눈이 돌아가다니….”

예언가의 말에 에릭의 시선은 라그나르가 두고 간 재물에 눈이 멀어 희희낙락하고 있는 병사들로 향했다.

마음 같아선 자신의 명령을 무시한 병사들을 모조리 참수해버리고 싶었지만, 저들은 자신의 직속 병력이 아니었다.

쾨벤하운은 습격을 당했고 라그나르의 도끼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은 명백히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런 시기에 왕인 자신이 자리를 비우면 그들이 동요할 염려가 있었기에 에릭은 자신의 정예병들을 그곳에 두고 왔다.

자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라도 정예병들이 주변을 돌아다니며 순찰을 하고 민심을 다독인다면 혼란은 빠르게 수습될 테니까.

그 때문에 자신의 직속 병력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들 중 그나마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 놈들만 추려서 왔는데 결국 일을 망쳐버렸다.

“어쩔 수 없습니다. 눈앞에 평생 만져보지도 못할 재물이 굴러다니는데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래, 자네 말대로 그럴 수 있지. 하지만 나는 그를 예측했어야 했어.”

만약 자신이 조금만 더 신경을 썼더라면,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접근했더라면 라그나르를 붙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어려울 것도 없었다. 단순히 일부 함선을 반대편으로 보내 적의 함선을 불태우거나, 하다못해 출항하지 못하게 시간을 끄는 것으로 충분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에릭은 닭 쫓던 개가 되어 도망치는 라그나르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뿐이면 말도 안 하련만 자신에게 잘 있으라며 손까지 흔드는 꼬라지를 보니 복장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자신을 놀리듯 예언가가 입을 열었다.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전하.”

“승리? 하, 이것도 승리라고 해야 하나?”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가장 고결하고 고귀한 승리가 아니겠습니까?”

“바이킹에게 출진해서 도끼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는 건 수치나 다름없네.”

“하지만 그 대가로 많은 것을 얻지 않았습니까? 실수를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다만 이번 일을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긴다면 전하께서는 더 위로 올라가실 수 있을 겁니다.”

“다른 건 모르겠지만, 그대의 말은 꼭 가슴속에 새기도록 하지.”

그녀의 말대로 지금와서 후회한다고 바뀌는 일은 없기에 에릭은 일단 라그나르가 남기고 간 물자부터 수습하기로 했다.

그는 이곳에서 약탈한 것들을 정리하고 있던 건지 온갖 물자들이 바닥에 깔려있었는데 내용물을 보아하니 돈이 되는 것만 쓸어 담은 게 아니라 그냥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다 쓸어 담은 모양이었다.

물론 배 위에서 정리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쪽 구석에 붕대와 약통으로 보이는 것들이 나뒹굴고 있는 걸 보면 이곳에서 머물며 부상자들을 치료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생각보다 수하들을 아끼나 보군.”

만약 자신이었다면 최대한 빨리 배를 몰아 안전지대로 퇴각했을 텐데 굳이 이곳 묀섬에 상륙해서 수하들의 부상을 돌본 걸 보면 수하에 대한 사랑이 극진한 모양이었다.

“그야 당연히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가?”

“고작 천 명으로 덴마크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쾨벤하운을 노렸습니다. 어지간한 신뢰와 믿음이 없다면 선상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겁니다.”

“하다못해 라그나르가 탄 기함을 제외하고 나머지 배들이 도망쳤을지도 모르는 일이겠군.”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둘러봐도 그런 흔적이 없는 걸 보면 적들은 라그나르가 이끄는 정예병이 아니겠습니까? 그런 이들이니 당연히 아낄 수밖에 없겠지요.”

급조해낸 것치고는 그럴듯한 추리였기에 에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 때문에 아무런 망설임 없이 물자들을 내팽개치고 도망쳤을 겁니다. 어차피 라그나르에게 있어서 최우선 순위는 덴마크의 본대가 하랄 블로탄에게 향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고 그걸 달성한 이상 빼앗은 물자는 어디까지나 부수입에 불과하니까요.”

“자네 말이 맞아. 그리고 저 멍청한 놈들은 눈앞의 재물에 눈이 멀어 대업을 망쳤지.”

생각해보면 라그나르 역시 조급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대로 덴마크의 본대가 언제 되돌아올지 모른다는 압박감에 시달려야 했을 테니까.

그러니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꽤 과격한 방법으로 공성을 시도했을 테고 그 과정에서 부상자들이 많이 나왔을 것이다.

중상자들은 실시간으로 상태가 안 좋아지니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상륙해 부상병들을 돌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겸사겸사 필요 없는 물건들도 정리해서 배도 가볍게 만들고 말이다.

“젠장. 마냥 남 탓을 할 것도 아니군.”

만약 자신이 불타오르는 쾨벤하운과 아군의 시체만 볼 게 아니라, 상대의 사정을 꿰뚫고 그 즉시 추격대를 편성해 그 뒤를 쫓았다면 라그나르를 사로잡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줄 수 있지 않았을까?

에릭은 자신에 대한 혐오감과 자괴감을 느꼈으며 그와 동시에 이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자신에게 조언을 한 예언가에게 경외심이 들었다.

“그대는 그 짧은 시간에 이 모든 걸 꿰뚫어 봤단 말인가? 대단하단 말밖에 나오지 않는군.”

“과찬이십니다. 이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며 결국은 전하께서도 저와 같은 생각에 도달하시지 않았습니까?”

“아니, 명확히 다르다. 그대는 선지자가 되어 길을 개척했고 나는 그대가 걸어간 길을 보고 나서야 그대와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지.”

평상시 에릭을 알던 사람이라면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극찬이었지만, 예언가는 담담하게 대꾸했다.

“전하께서는 많은 것을 생각하셔야 했기에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저야 적군과 그들의 수괴인 라그나르의 심리에 대해서만 생각했지만, 전하께서는 아군이 입은 피해와 그로 인해 무너지게 된 균형, 이후의 대처 등 많은 것들을 생각해야 하셨을 테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처음에 불타고 있는 쾨벤하운을 봤을 때 라그나르에 대한 추적보다는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는가가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올랐으니까.

“그리고 그게 곧 왕이 가져야 할 태도가 아니겠습니까? 오히려 전하께서 곧장 추격을 명하셨다면 저는 전하께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자네 사람을 띄워주는 능력이 출중하구만. 아무튼, 앞으로도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비록 기회는 한 번밖에 안 남았지만요.”

애써 외면하던 사실을 드러내며 칼같이 계산하는 예언가의 모습에 에릭은 입맛을 다셨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에게 줄을 대려 하지만 오히려 예언가는 칼같이 선을 그었다.

어떻게든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재물도 내려보고 진귀한 보석을 줬지만, 그녀는 사양하거나 자신의 시중을 드는 이들에게 전부 다 나눠주었다.

“크흠, 그보다 이제 내가 어떻게 해야겠나?”

“더 이상 추격을 해봤자 의미도 없을 테니 일단 돌아가시지요. 비록 쾨벤하운이 급습을 당하긴 했지만 전하께서 돌아가실 때쯤에는 수습이 되어있을 겁니다.”

“그 뒤에는?”

“전하의 공적을 널리 알려야 합니다. 비록 적들을 사살한 건 아니지만, 물자의 노획만으로도 큰 공적이 아닙니까?”

“뭐, 그렇다고 해도 결국은 원래 우리 걸 되찾은 것에 불과하지만 말일세.”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어쨌거나 라그나르를 상대로 승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그리고 왜 이런 사태가 벌어졌는지에 대해 확실히 밝혀야 합니다. 그래야 전하께서 발언권을 얻고 정국을 주도해나가실 수 있습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지만 에릭은 차마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하면 모든 원망의 화살은 군힐드와 그녀의 파벌에게 향할 것이다.

비록 지금 군힐드와 대립하고 있다지만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아내였고 자신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녀는 덴마크의 적법한 계승자였고 자신은 그녀와 결혼을 했기에 덴마크의 국왕도 겸하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

지금보다 더 그녀와 대립각을 세운다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었기에 군힐드를 더 몰아세우는 건 에릭에게도 큰 부담이었다.

“그 부분은… 일단 조금 더 생각해보도록 하지. 일단은 돌아가서 쉬도록 하세나.”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 * *

[셀란섬 쾨벤하운 ― 회의실]

거대한 회의실에는 수많은 이들이 모여있었지만 하나같이 입을 다물고 있었기에 기묘한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이런 불편한 침묵을 깬 건 덴마크의 여왕. 군힐드 코눙가모디르였는데 그녀는 특유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으며 입을 열었다.

“왜 다들 이렇게 처져있습니까? 누가 보면 우리가 패배하기라도 한 줄 알겠군요.”

“그녀의 말대로요. 라그나르를 격퇴함은 물론 그가 가지고 있던 물자를 전부 다 뺏었으니 한동안 출진은 꿈도 못 꿀 것이오. 군힐드. 수도의 혼란은 다 수습됐소?”

“물론입니다. 당신이 라그나르가 흘린 물자를 줍고 있는 동안 제가 깔끔하게 처리했지요.”

일반적인 대답이라기에는 날이 서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에릭에게 자신이 바쁘게 뛰어다니는 동안 당신은 뭘 했냐고 힐난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물론 군힐드도 이렇게까지 얘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이대로 가면 주도권이 에릭에게 넘어갈 테니 어쩔 수 없이 강하게 얘기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기분이 상해있었는데 면전에서 저런 말까지 듣자 에릭은 참지 않고 받아쳤다.

“애초에 내 말을, 예언가의 말을 들었다면 수도가 공격받을 일도 없었겠지. 안 그렇소?”

“하, 신분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예언가를 그렇게 싸고돌다니, 누가 덴마크의 여왕인지 모르겠군요.”

“군힐드. 말조심하시오. 그리고 인정할 건 인정하시오. 그대가 일을 서둘러서 그르쳤고 우리는 굉장히 어려운 상황에 처했소.”

“그게 전부 제 탓이라는 겁니까? 애초에 에릭 당신이 리가에서 리보니아 기사단과 함께 하랄을 참수하고 라그나르를 격퇴했으면 다 끝나는 일 아니었습니까!?”

“그건 불가항력이었잖소!”

둘의 말싸움이 감정싸움으로 흘러가자 자연스레 목소리가 높아졌고 이곳에 앉아서 그걸 바라보는 야를들은 좌불안석이었다.

이대로 갈 데까지 가면 파멸이라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었지만 차마 중재에 나서지 못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니잖은가?

그런 살얼음판 같은 상황에 나선 건 에릭이 데려온 예언가였다.

“두 분 다 이쯤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지금 중요한 건 현상황을 분석하고 작전을 재수립해 유틀란트반도를 되찾고 하랄과 라그나르를 격퇴하는 일입니다.”

말이야 바른 말이었지만 이미 잔뜩 흥분해있는 군힐드에게 그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반쯤 눈이 뒤집힌 그녀는 벌떡 일어나 예언가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입 닥쳐라 예언가! 그따위 가면에 숨어서 나를 능욕하는가!!!!”

누가 말릴 새도 없이 군힐드가 예언가의 가면을 벗기자 그녀의 얼굴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그 모습에 에릭은 분노해서 호통쳤다.

“내 손님에게 이 무슨 무례한 짓이오. 군힐드!”

하지만 군힐드는 에릭이 화를 내건 말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예언가의 얼굴을 바라보며 비아냥거렸다.

“요새는 예언가도 얼굴을 보고 뽑는 겁니까? 과연, 당신이 그렇게 싸고도는 이유가 있었군요.”

“그쯤 하시오. 군힐드. 나 역시 그녀의 얼굴을 본 건 지금이 처음이고 내가 예언가를 받아들인 건 그녀의 전술적 식견과 남다른 통찰력 때문이오. 실제로 그대의 말은 틀렸고, 예언가의 말은 맞지 않았소?”

“누구의 말이 맞고 틀렸는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만약 적의 급습을 무시한 채 유틀란트반도로 진군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말을 마친 군힐드는 자리를 박차고 회의장을 벗어났다. 덴마크를 유지하는 두 개의 축 중 하나가 자리를 비우자 회의가 지속될 리가 없었고 결국 그날의 회의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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