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바이킹이 되었다-146화 (146/205)

▣ 146화

“배신자라고?”

그 순간 에릭은 전에 없이 차가운 눈빛으로 예언자를 노려보았다. 그런 살벌한 눈빛에도 예언자는 담담히 그 눈길을 받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그것도 그대의 예언인가?”

“전하라면 예언 따위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결국, 예언이라는 건 현 상황을 분석하고 재구성해서 그럴듯한 결론을 뽑아내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어찌 신도 아니고 한낱 인간 따위가 미래를 예언할 수 있단 말인가? 당장 내일… 아니, 1초 뒤의 일조차 예측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

물론 종종 신의 힘을 빌려 미래를 예지하기도 하지만 우리는 그걸 신탁이라고 하지 예언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 말에 책임질 수 있나?”

“이 세상에 100%라는 건 없습니다. 결국은 확률의 문제지요. 저는 전하께 하나의 가능성을 말씀드렸고 전하께서는 적당히 취사선택을 하시면 됩니다.”

“빠져나가는 게 능숙하군.”

“기왕이면 처세술이 좋다고 해주시지요.”

부드럽게 대꾸하는 예언자를 보며 에릭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다른 건 몰라도 저 배짱 하나만큼은 대단했다. 그 누가 자신을 상대로 저렇게 농담 따먹기를 할 수 있겠는가?

“그래. 예언자여.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 경위가 무엇인가?”

“이런 말씀은 듣기 고까우시겠지만, 전하께서는 덴마크의 왕위를 찬탈하셨습니다.”

“…예언자. 나는 정당한 후계자인 군힐드의 요청을 받았고 그녀를 도와 정당한 이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한 것뿐이네.”

물론 그 과정에서 그녀와 결혼하였기에 어떻게 보면 덴마크의 왕위를 찬탈한다는 결과는 같을지라도 과정의 차이는 있었다.

“전하의 생각은 중요치 않습니다. 다른 이들, 정확히는 하랄 블로탄을 따르는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하지요.”

그 말에 에릭은 침묵했고 그걸 더 얘기하라는 뜻으로 알아들은 예언자는 침착한 목소리로 살얼음판을 걷듯 천천히 이야기했다.

때론 알고 싶지 않은, 듣고 싶지 않은 진실도 있는 법이다. 그를 얘기할 때는 언제나 상대의 눈치를 잘 살펴야 했다.

비록 자신이 에릭의 신임을 받고 있다지만 그게 오랜 신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신임은 아니잖은가. 애초에 자신과 에릭은 얼굴을 마주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았다.

“국왕 전하와 여왕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 몇 년 되지 않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주변을 전부 정리했다고 생각하시겠지만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법입니다.”

“으음….”

뭔가 짚이는 게 있는지 에릭은 입술을 굳게 다문 채 신음했고 예언가는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의심을 싹틔웠다.

“아마 전하께선 하랄 블로탄을 내쫓기 위해 꽤 관대한 조건으로 야를들을 받아들이셨을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협조할 리가 없을 테니까요.”

“…맞네. 당시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기 위해 나는 중립을 유지하고 있던 야를들에게 많은 것을 약속할 수밖에 없었지.”

늘 그렇듯 공신 세력은 함께할 때는 가장 든든했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는 눈엣가시였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들을 내치는 건 불가능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울 때 자신을 도와 함께해 준 이들을 헌신짝 버리듯 내친다면 그 누가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겠는가?

설사 충성을 맹세하더라도 그건 거짓에 불과하며 지금 같은 상황에 처하면 얼굴을 바꿔 자신을 배신할 터였다. 한 번 배신한 자가 두 번 배신하는 게 어렵겠는가?

“다만 전하께선 그들에게 넘어간 주도권을 찾고 싶으셨겠지요. 그 과정에서 그들과 마찰이 있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줬다 뺐는 걸 제일 싫어한다. 차라리 몰랐다면 저항하지 않겠지만 이미 한번 권력의 맛을 본 이상 그들은 결코, 손에 쥔 권력을 놓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정말 모든 걸 내려놓을 거라 생각하십니까? 거기에 때마침 하랄 블로탄의 기세가 드높으니 딴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지요.”

짝. 짝. 짝.

무미건조한 얼굴로 예언가의 말을 들은 에릭은 기계처럼 박수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말은 뱀처럼 달콤하군. 그러면서도 굉장히 교묘해. 내 나약함과 의심을 정확히 파고들고 있어.”

“그렇게 들리셨다면 죄송합니다.”

“아니, 아니야. 확실히 그대의 말이 맞아. 외면하고 싶지만, 진실이란 마냥 부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사실 그대의 말대로 배신자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런 참패를 겪는 게 정상일 리가 없잖은가?”

아무리 라그나르가 뛰어난 전사에 오딘의 선택을 받은 대전사라고 할지라도 그 역시 인간이었다. 한낱 인간의 몸으로 수백, 수천 명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했다.

“허면 예언가여. 내가 어찌해야 하겠나?”

“제게 두 번째 조언을 구하시는 겁니까?”

칼같이 계산을 요구하는 예언가의 모습에 에릭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그녀는 농담으로 한 얘기가 아니었겠지만 기분이 좋아진 에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예언가여. 내게 두 번째 조언을 해주게.”

“좋습니다. 왕이시여. 지금 바로 병력을 수습해서 움직일 수 있는 병사들을 끌고 라그나르를 추적하십시오.”

“뭐라? 진심인가? 지금 수도가 이 모양이 됐는데 라그나르를 추적하라고?”

“그렇습니다. 무릇 기습이라 함은 상대의 의표를 찌르는 행위입니다. 라그나르가 도망친 게 채 이틀이 되지 않았으니 서두른다면 그의 뒤를 잡을 수 있을 겁니다.”

“흐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만….”

에릭이 망설이는 듯한 모습을 보이자 예언가는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그를 충동질했다.

“상황을 보아하니 라그나르는 단순히 이곳을 습격하고 도망친 게 아니라 약탈한 물품들을 들고 간 걸로 보이는데 배가 무거워지면 자연스레 배의 속도도 느려지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지금쯤이면 퇴각하지 않았겠나?”

“야밤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해안선을 따라 항해를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비록 제가 항해에는 문외한입니다만, 두 눈을 감고 길을 걷는 게 얼마나 멍청한 짓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에릭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알고 예언가도 알고 있는 걸 라그나르라고 모를 리는 없지 않겠나.

“이미 전쟁의 흐름은 적에게 넘어갔습니다. 지금 필요한 건 그 흐름을 끊을 무언가입니다.”

“그래서 내게 추적을 권하는 건가?”

“예. 사실 굳이 라그나르를 잡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그저 적과 싸워 작은 승리라도 거둔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여왕 전하께서는 하지 못한 일을 전하께서는 이뤄내셨으니까요. 어차피 지금 전하에게 필요한 건 명분이 아닙니까?”

예언가의 말에 에릭은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그녀는 지금 자신의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 라그나르라도 붙잡는다면 이 전쟁은 끝날 겁니다. 이 강대한 왕국도 전하께서 죽으면 무너지듯, 적의 연합군도 라그나르가 죽으면 무너질 겁니다.”

“자세히 얘기해보게.”

“라그나르가 죽는다면 폴란드는 발을 뺄 것이며, 신성 제국은 병력을 물릴 겁니다. 그렇게 하랄이 혼자 남게 되면, 그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녀의 말을 곱씹으며 가만히 생각하던 에릭은 그녀의 제안이 꽤 현실적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이번 수도 습격으로 인해 군힐드의 발언권은 힘을 잃을 터였다.

그녀의 말대로 이 상황에서 자신이 라그나르를 몰아붙이는 데 성공한다면 주도권을 완벽하게 이쪽으로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잡을 수 있겠나?”

“그건 전하의 능력에 달려 있겠지요. 아시다시피 예언이 100% 맞는 건 아니니까요.”

“푸흐흐흐, 좋아. 그대의 말대로 지금 즉시 추적대를 편성하도록 하지.”

* * *

[묀섬 – 라그나르의 임시 주둔지]

“흐음, 수도를 털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수입이 쏠쏠하군.”

“이쯤 되면 그냥 다 때려치고 해적 선장을 하는 게 어떻습니까? 지중해에서도 그랬지만 당신에겐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군요.”

“뭐, 내가 재능이 넘쳐흐르긴 해. 괜히 오딘의 가호가 함께하는 게 아니지.”

“오딘께서 해적질에도 조예가 있으신지는 몰랐군요.”

뿔이 돋친 듯한 힐데의 말에 나는 피식 웃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북유럽의 신들은 일반적인 신들과 다르게 꽤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가장 입체적인 신이었던 로키는 둘째 치고 주신인 오딘도 꽤 음흉하고 음침한 면모를 보여주지 않던가. 실제로 잃어버린 물건을 되찾기 위해 도둑질을 하기도 하고 교활하게 꾀를 써서 거인들을 골탕 먹이기도 하니까.

“그나저나 정말 여기서 이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에릭이 오는 게 맞습니까?”

“반드시 올 거야. 이비는 의외로 설득력이 좋거든. 말주변도 좋고.”

이비는 뛰어난 의사였고 그녀의 의술은 비단 외과적인 측면에만 국한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정신적인 병을 치료하는 기술도 뛰어났는데 그녀의 통찰력과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 보는 능력은 나조차 감탄할 정도였다.

괜히 그녀의 초기 스탯에 언변과 설득이 들어가 있는 게 아니었다.

“거기에 이건 침략 전쟁이 아니라 내전이야. 내색은 안 하지만 에릭도 속이 타고 있을걸?”

지금 하랄은 두 차례의 전투를 제외하면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북부로 쾌속 진군 중이었다. 아무리 군힐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라지만 에릭도 이 상황이 마냥 달갑진 않을 것이다.

만약 하랄 블로탄 없이 신성로마제국의 군대와 폴란드의 병사들만을 이끌고 북상했다면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유틀란트반도를 점령하는 건 불가능했을 것이다.

바이킹들은 적과 맞서 싸워야 한다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테지만, 상대가 자신들의 왕이자 적법한 계승자라면 당연히 그들의 무기에 망설임이 깃들 수밖에 없다.

“용담공 전하. 적들이 오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빠른데? 이비가 생각보다 잘해주고 있나 보군.”

기다리던 소식이 왔기에 나는 엉덩이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명령했다.

“얀. 미리 얘기했던 대로 약탈했던 물품들을 전부 다 여기에 내려놓게. 물론 얌전히 쌓아두는 게 아니라 갑작스러운 적의 습격에 당황해서 가져가지 못한 것처럼 꾸미라는 말일세.”

지금껏 몇 번이나 작전의 개요를 설명했기에 얀은 눈치껏 병사들을 독촉했고 준비가 되자마자 나는 함선에 올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각했다.

그런 우리를 뒤늦게 따라온 에릭이 뭐라 고함치는 게 들렸지만 난 그런 그를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장 뛰어내려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니 차선책으로 그들을 천천히 늪으로 끌어들일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걸 위해 에릭에게 여러 선물을 건네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내가 건넨 사료에 토실토실하게 살이 오르게 되면 그들도 알게 될 것이다. 자신들이 벗어날 수 없는 함정에 빠지게 됐음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