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5화
한차례 목을 가다듬은 예언가는 모두가 똑똑히 들을 수 있도록 선언했다.
“반드시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그녀의 대답에 군힐드는 기대도 안 했다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에릭이 데려온 예언자이니 당연히 그가 원하는 대답을 내뱉지 않겠는가?
“예언가여. 그대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뭐지? 지금껏 우리가 얘기한 것들을 듣지 못했나?”
“들었습니다. 여왕이시여. 과연 한 나라의 여왕다우신 통찰력이었습니다.”
지나친 아부에도 불구하고 군힐드는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냉혹하게 예언가를 몰아붙였다.
“들었는데도 이곳을 지켜야 한다 주장하는 건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가 없군. 혹시 그대의 그 잘난 예언에 우리 덴마크가 망할 거라고 나와 있기라도 하던가?”
“여왕 전하. 제가 알고 있는 것이 맞다면 용맹한 노르웨이 왕국의 지원군들이 이곳을 향해 오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왕 싸울 거라면 그들과 힘을 합쳐 싸우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하, 대체 언제 그 지원군이 온단 말인가? 유틀란트반도가 다 넘어간 뒤에? 아니면 하랄과 라그나르에게 나와 에릭의 목이 잘린 뒤에!?”
흥분한 기색으로 대놓고 비아냥거리는 군힐드의 말에도 예언가는 차분하게 대꾸했다. 가면을 쓰고 있긴 했지만 그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흔들림이 없었다.
“여왕 전하. 굳이 예언이 아니더라도 현재 유틀란트반도가 혼란에 휩싸여 있다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 그러니 그 혼란을 서둘러 수습해야….”
“여왕 전하께서는 현시점에서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군인지 판단하실 수 있습니까?”
최근 유명세를 떨치고 있다고는 하지만 길거리의 예언가 따위가 여왕의 말을 중간에 끊는 건 굉장히 무례한 행위였다.
자칫 잘못하면 목이 잘리거나 감옥에 처박힐 수 있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군힐드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른 걸 다 떠나 그녀의 말이 정곡을 찌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자신의 편이라 생각했던 야를들이 앞다퉈 하랄 블로탄에게 항복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구를 믿고 출정을 한단 말씀이십니까?”
“그건….”
“설마 모든 걸 이곳의 보급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씀은 아니시겠지요? 전쟁을 수행할 때 현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건 저보다 여왕 전하와 국왕 전하께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논리정연하게 압박해 들어오는 예언가를 보며 군힐드는 입을 다물었다. 괜히 대꾸를 해서 꼬투리를 잡히느니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그 침묵을 수긍으로 받아들인 건지 예언가는 신나서 날뛰기 시작했다.
“저는 전쟁을 알지 못하지만 믿지 못할 친구가 남보다 못하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등 뒤를 맡겼더니 비수를 꽂는 경우를 종종 봤으니까요.”
“그러니 진군은 언제나 신중해야 합니다. 차라리 현재의 상황을 고수하고 있다면 모를까 이대로 병력을 끌고 섣부르게 유틀란트반도로 들어가는 순간 후퇴는 불가능할 겁니다.”
예언자는 지도 위를 손가락으로 쓱 훑으며 자신의 의견에 확실을 더하듯 몇 마디 더 덧붙였다.
“아니, 후퇴는 가능하겠지요. 하지만 그 순간 유틀란트반도의 모든 야를들은 저희에게 등을 돌릴 겁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국왕 전하께서는 기나긴 모멸과 인내의 시간을 견디며 노르웨이의 지원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계시는 게 아닙니까?”
말을 마친 예언자는 고개를 힐끗 돌려 공을 에릭에게 건넸고 멍하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에릭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예언자가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아주 조리 있게 잘 해주는군.”
국왕까지 지원사격을 해주자 예언자는 한층 힘 있는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거기에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는 매우 용맹하며 타고난 힘 하나로 제국의 공작위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그건 저보다 직접 그와 마주한 국왕 전하께서 더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에릭은 리가에서 라그나르와 마주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대의 말대로 평범한 놈은 아니었네. 제법 배짱이 두둑했지.”
그 누가 감히 자신에게 술이나 한잔하자며 초대할 수 있겠는가? 어지간한 담력으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허나 예언자여. 그대는 이대로 지켜만 보자는 얘기인가? 그대의 말대로 지켜본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네. 오히려 상황만 악화되는 것 아닌가?”
“물론 두 손 놓고 지켜볼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한동안은 저들에게 합류하는 병력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관망해도 상관없을 겁니다.”
“자세히 얘기해보게.”
“유틀란트반도는 생산력이 좋은 땅이 아닙니다. 저쪽이 물자를 얼마나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장기간 보급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할 겁니다. 그러니 이쪽에서 군대를 움직인다는 소문을 내서 저들의 진군에 제동을 거는 정도면 충분합니다.”
예언자의 말에 에릭은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확실히 유틀란트반도는 황무지도 많고 작물을 심어도 노력 대비 수확량이 바닥을 치는 질 나쁜 땅이었다.
지금이야 하랄 블로탄이 번지는 들불처럼 기세를 올리고 있지만 겨울이 오기 전에 그 광활한 유틀란트반도를 통제하는 건 불가능했다.
“계속해보게.”
“예. 그렇게 적들이 비정상적으로 몸집을 불리고 있을 때 이쪽에서 노르웨이의 지원병력과 함께 적의 군대를 포위해서 공격한다면 일거에 소탕할 수 있을 겁니다.”
“흐음, 그게 생각처럼 쉽게 되겠나?”
“물론 일부 야를들을 포섭해야겠지요. 정황상 어쩔 수 없이 하랄의 편을 든 야를들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들 모두를 적으로 돌리면 절대 유틀란트를 탈환하지 못할 겁니다.”
그 말에 에릭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예언가의 조언은 전쟁을 경험해보지 못한 자 특유의 망상적인 생각이 드러나는 작전이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현실적이면서 근거가 있는 주장이었기에 에릭은 그녀의 작전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반면 자신의 부인이자 덴마크의 여왕인 군힐드는 예언가의 조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히려 광대가 씰룩거리고 눈가가 일그러져 있는 게 누가 봐도 분노한 모습이었다.
“예언가여. 이게 그대가 한 예언의 전부인가?”
“그렇습니다. 여왕 전하.”
“내 에릭이 데려온 예언가라 하여 무슨 이야기를 하나 들어봤는데 그럴듯한 이야기를 섞은 헛소리와 망상이나 늘어놓고 있구나. 이래서야 더 들을 것도 없겠어.”
사실 군힐드가 이렇게 필사적으로 유틀란트를 탈환하려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덴마크의 여왕이었지만 그녀의 지지 세력은 셀란섬과 유틀란트반도에 골고루 뿌리내리고 있었다.
만약 유틀란트 내에서 자신을 따르는 파벌들이 다 떨어져 나간다면 세력은 순식간에 반 토막 날 터였다. 위급한 상황에서 자신을 지켜주지 않는 왕에게 그 누가 충성을 맹세하겠는가?
반면 에릭 입장에선 어느 정도 군힐드의 세력을 짓눌러두는 게 좋았다. 물론 군힐드와 결혼을 했고 그녀에게 딱히 불만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권력은 그것과 별개였으니까.
결국 이비의 예언은 묻힌 채 군힐드와 에릭 간의 힘 싸움 양상으로 상황이 전개되었다.
예언이 통찰의 부류라는 걸 알고 있는 에릭은 예언가의 말이 맞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군힐드는 자신의 지지 세력들이 공격받고 있다는 소식에 귀를 틀어막고 공격할 것을 요청했다.
공동 국왕이라고 해도 이곳은 덴마크였고 이러니저러니 해도 군힐드의 입김이 강했기에 결국, 에릭은 군힐드가 하자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군힐드의 말대로 해서 승리하면 좋은 거였고 패배한다면 힘의 균형추가 자신에게 쏠릴 테니 손해 볼 건 없었다.
그렇게 회의가 끝나자 에릭은 뒤에 서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예언가에게 가서 사과했다.
“미안하네. 이곳에 눈뜬장님들이 많아 그대의 천금과 같은 조언을 바닥에 내팽개쳐버렸군.”
반역을 꾀한다면 자신의 형제마저 죽여버리는 잔인한 심성을 지닌 에릭이었지만 그는 의외로 학식 있고 배운 자들에게는 꽤 관대한 왕이었다.
“왕이시여. 왕께서는 제게 조언을 구했고 저는 전하의 요청에 따라 지혜를 나눠주었습니다. 전하께서 제 조언을 따를지 말지는 온전히 전하의 자유이지만 기억해 주십시오. 전하께서는 지금 첫 번째 기회를 날렸다는 것을.”
그러니, 다소의 건방짐쯤은 감수할 생각이었다. 이곳 북부에서 자신과 말이 통하는 상대는 몇 없었으니까.
“알고 있네. 하지만 걱정하지 말게. 오늘 그대의 통찰력을 보니 세 번째까지 갈 필요도 없이 두 번째 조언만으로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을 테니까.”
* * *
“용담공 전하. 적의 병력이 대거 쾨벤하운을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듣던 중 기쁜 소식이군. 반응이 늦어도 한참 늦어서 불감증이 아닌가 생각하고 있었는데.”
얀의 보고에 내가 섹드립을 섞어서 대답하자 옆에 서 있던 힐데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음, 생각해 보면 저런 눈빛도 오래간만이군. 왠지 감회가 새로운데?
“누가 총대장이라던가? 군힐드? 에릭?”
“군힐드와 에릭 둘 다 나섰다고 합니다. 아마 이쪽에서 재미를 보는 동안 그쪽은 웅크린 채 두들겨 맞기만 했으니 이를 갈고 있지 않겠습니까?”
“그럼 슬슬 우리한테도 불똥이 튀겠군.”
이미 이쪽에서 동원한 병력의 규모도 다 들켰을 테고 우리가 뭘 노리는지도 다 알아챘을 것이다. 비록 흐름이 우리 쪽으로 넘어오긴 했지만, 전쟁의 흐름은 언제든 뒤바뀌기 마련이었다.
“이비는 어쩌고 있다던가?”
“안 그래도 편지가 도착했습니다. 읽어보시지요.”
얀은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내게 건넸고 그곳에는 내가 이비에게 가르쳐 준 한글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굳이 한글을 쓴 이유는 혹여 이 편지가 다른 누군가에게 넘어가게 됐을 때를 위함이었다. 이 편지가 에릭에게 걸리는 순간 이비의 목숨이 위험해질 테니까.
물론 그녀가 아포피스의 힘을 받아들인 이상 그녀를 해칠 수 있는 이들은 얼마 안 되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죽음의 힘을 사용한다고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건 아니었으니까.
“흐음… 꽤 상세하게 적어놨네. 나름대로 신임을 받고 있는 모양이야.”
그녀는 주변의 지리나 병력들의 배치 상태, 순찰 루트, 지휘관, 성벽의 보수 여부 등 이쪽이 원하는 정보들을 정확히 간추려서 보내주었다.
“예. 듣기로 가면을 쓴 인물도 함께 종군하고 있다고 했으니….”
이비가 종군하고 있다면 얘기는 쉬워진다. 그녀가 보내준 정보를 토대로 쾨벤하운을 습격해서 혼을 쏙 빼놓으면 그만이다.
“좋아. 그럼 우린 다른 것 신경 쓸 거 없이 가서 빈집털이나 한번 해주면 되겠군.”
“예. 최대한 가볍게 준비시키겠습니다.”
사실 이 병력을 끌고 쾨벤하운을 습격한다고 유의미한 결과를 내기는 힘들었다. 설사 어찌저찌 도시를 함락시킨다고 해도 회군해서 돌아오는 에릭의 본대를 막아내는 건 무리였다.
다만 기습 자체는 적들에게 심리적으로 큰 압박감을 줄 터였다. 자신들의 수도가 언제든지 공격받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저들의 행동에 제약을 줄 수밖에 없었다.
“어디 벨튀나 한번 해볼까.”
* * *
“이런 빌어먹을!”
에릭은 사실 원정을 나서면서도 뒤가 싸했다. 본래는 자신이 쾨벤하운에 남아있을까 했지만 군힐드는 자신의 남편이 셀란섬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거기에 에릭 본인도 군힐드가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고 폭주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그를 억제하고자 함께 출병했다.
이게 패착이었던 걸까? 셀란섬을 떠나 퓐섬의 오덴세에 도착해 물자를 보충한 뒤 복부로 떠나려던 찰나 쾨벤하운에서 전령이 도착했다.
자신들이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남부에 똬리를 틀고 있던 라그나르가 쾨벤하운을 급습했고 실시간으로 공격당하는 중이라고 보고했다.
물론 그 소식은 자신뿐만 아니라 군힐드와 그녀를 따르는 파벌에게도 전해졌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고작 천 명으로 대체 뭘 할 수 있겠는가? 쾨벤하운은 지중해의 콘스탄티노플만큼은 아니어도 그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한 요새였다.
지형 자체가 해협을 끼고 있기에 공격할 수 있는 위치가 제한되는 데다 함선을 끌고 올라온 만큼 썩 대단한 공성 병기를 들고 오지도 못할 터였다.
그렇기에 그냥 무시한 채 진군하려 했지만 그 뒤로 줄줄이 달려오는 전령이 전하는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 적들이 성벽 일부를 점령했다. 생각 외로 적의 기세가 대단하다.
― 적들이 외성을 점령했다. 지원이 필요하다.
― 적들이 내성까지 공격 중이다. 버티기 힘들다.
결국, 군힐드와 에릭은 철수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진군해서 유틀란트의 하랄을 몰아낸다고 한들 수도인 쾨벤하운이 적의 손에 떨어지면 끝이었다.
그리고 황급히 쾨벤하운으로 돌아온 에릭의 눈에 들어온 건 처참하게 망가진 도시였다.
대체 뭔 짓을 한 건지 사흘 만에 다시 본 쾨벤하운은 성벽의 일부가 박살 나 있었으며 성 내부의 집들은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되어있었고 죽어있는 병사들의 시신은 아직도 수습되지 못한 채 땅에 널브러져 있었다.
“이게… 이게 무슨….”
그렇게 황망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릭의 곁으로 예언자가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악마가 유혹하듯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전하. 제가 생각할 때… 이곳에 배신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