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콰직! 콰직! 콰지직!
불타고 있는 마을의 한복판에서 거대한 도끼를 든 라그나르가 쉴 새 없이 창고를 두들겼고 그 무자비한 공격에 결국, 창고의 외벽은 힘없이 부서졌다.
“흠. 뭐 없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끌어모은 물자들이 제법 많네.”
라그나르는 안을 쓱 살펴보며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지만 옆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얀 3세 소비에스키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섬기는 주군이 말도 안 되는 괴물인 건 알고 있었다.
용담공, 공포공, 야만공, 도살자, 오딘의 대전사, 광전사, 농부.
이 수많은 칭호들은 전장에서 깔짝깔짝 활약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애초에 인종 차별이 만연한 이 제국에서 오직 실력 하나로 공작위에 오르지 않았던가? 물론 자신이 볼 때는 무력뿐 아니라 정치질도 수준급이었지만 말이다.
그런데 오늘 옆에서 바라본 그는 이미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괴물이었다. 어쩌면 동족일지도 모르는 이들을 상대로 라그나르는 무자비했으며 그의 도끼날이 번뜩일 때마다 적들의 목이 바닥을 굴렀다.
왜 그를 부르는 칭호 중에 농부 같은 뜬금없는 별명이 붙었는가 했는데 직접 싸우는 걸 옆에서 보니 알 것만 같았다.
농부가 수확물을 거두듯 도끼로 목이라는 전리품을 뎅겅뎅겅 베면서 수확하는데 그 모습이 농부가 아니면 뭐란 말인가?
애초에 수많은 전투의 최전선에 나가 싸우면서 아무런 상처도 없이 돌아올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일반인이라면 상처는 둘째 치고 살아 돌아오는 게 기적이 아니던가?
“얀.”
“옛! 용담공 전하.”
라그나르의 부름에 얀은 생각을 멈추고 긴장한 얼굴로 절도있게 대답했다.
“나는 전리품을 끌고 먼저 퇴각할 테니 자네는 휘하 기병들을 이끌고 뒷마무리를 끝마친 뒤 따라오게.”
말을 마친 라그나르는 손을 탁탁 털며 창고 밖으로 나온 뒤 기지개를 켜며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리고 가급적이면 우릴 추적하는 적과 맞서 싸우지 말게. 우리의 목표는 어디까지나 적의 후방을 교란하는 거니까. 내 말 이해했나?”
“물론입니다!”
물론 대답을 하는 얀은 과연 이게 교란일까 아니면 초토화 작전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자신은 군인이었기에 의문을 접어둔 채 칼같이 대답했다.
라그나르는 생명의 은인이었고 자신은 이미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현재 받고 있는 대우에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거기에 그는 신상필벌이 확실했으며 전리품의 분배에도 옹색하지 않았고 자신을 요긴하게 써주고 있었기에 굳이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 때문에 대답하는 얀의 목소리에는 충성심이 녹아들어 있었고 그 모습을 만족스러운 얼굴로 바라본 라그나르는 얀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며 격려해주었다.
“그래, 조금만 더 고생해주게.”
말을 마친 라그나르는 사로잡은 포로와 재물들을 들고 정박한 함선을 향해 이동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얀은 라그나르의 모습이 사라지자 쭈그려 앉아 바닥에 묻은 핏자국과 어지럽게 찍힌 발자국을 흉흉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발할라로 보내줘야 할 영혼들이 생각보다 많군.”
본래 얀은 도망친 이들은 뒤쫓지 않았지만, 라그나르와 함께하는 동안 오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고 그런 그에게 전장에서 도망친 이들은 전사라고 불릴 자격조차 없는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그들에게 명예로운 죽음을 선사해주기로 했다. 현세에서 구차하게 삶을 연명하는 것보단 명예롭게 죽어 발할라에 가는 게 더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건 전사의 이름을 내다 버린 그들에게 얀이 내려줄 수 있는 최대한의 자비였다.
* * *
[유틀란트반도 – 항구도시 킬]
“전하. 이 죄인을 죽여주십시오.”
유틀란트반도의 항구도시인 킬을 다스리는 야를(jarl≒백작)은 하랄 블로탄이 온다는 소식에 성문을 열고 허름한 옷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그를 맞이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쇼에 하랄은 코웃음을 치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직접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주었다. 물론 그와 함께 따뜻한 말을 한마디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서 일어나게. 내 그대가 합류한다고 하니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구만. 내 반드시 그대를 귀히 쓰도록 하겠네.”
물론 귀히 쓸 생각은 없었다. 상대도 이게 립서비스라는 걸 알 테고 그냥 자신의 자리만 보전해도 충분히 만족할 것이다. 거기에 의례적으로 적당히 돈과 물자나 좀 뿌리면 되겠지.
어쨌거나 눈앞의 야를은 언제나 중립을 지키던 인물이었다. 자신이 누이인 군힐드와 노르웨이의 왕인 에릭에게 공격받을 때도, 에릭이 왕위를 차지한 뒤에도 그는 중립을 지켰다.
하지만 이젠 그도 알게 됐을 것이다. 더 이상 중립을 지키는 건 무의미했고 선택해야 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물론 바로 밑에 있는 로이뮌스터의 야를이 내게 대적하다가 영혼까지 박살 난 소식이 그가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그나저나 다른 야를들에 대해 들은 소식이 있나?”
“지금 바로 렌츠부르크와 슐레스비히로 사람을 보내보겠습니다. 전하께서 돌아오셨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모두가 쌍수를 들고 전하를 맞이할 것입니다.”
동문서답이긴 했지만 굳이 싸우지 않고 그들을 휘하로 들일 수 있다면 빠르게 유틀란트반도를 장악할 수 있을 테니 하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이참에 전하가 돌아오셨음을 모두에게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따로 생각해둔 방안이라도 있나?”
사실, 자신이 살아있고 복수의 칼을 갈며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덴마크인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헌데 저렇게 새삼스럽게 나의 귀환과 복수를 천명해야 한다고 얘기하는 걸 보면 그럴듯한 책략이라도 있는 모양이었기에 일단 들어나 보기로 했다.
“오딘의 이름으로 전쟁을 선포하십시오. 유틀란트반도 내부의 이들은 대부분 오딘을 믿고 있지만 노르웨이의 왕은 토르를 믿고 있습니다.”
“흠… 계속해보게.”
“대놓고 억압을 하지는 않았지만 토르를 최고신으로 섬기는 그 행태에 불만을 품고 있는 야를들이 꽤 있습니다. 그들을 품으신다면 빠르게 유틀란트반도를 점령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랄은 눈앞의 야를이 한 제안이 제법 구미가 당기는 얘기라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덴마크인 대부분이 오딘 신앙을 믿고 있는 만큼 하랄과 에릭이라는 구도보다 오딘과 토르라는 식으로 프레임을 잡으면 에릭으로서도 대처하기가 난감할 것이다.
하랄은 눈앞의 야를에 대한 평가를 한 단계 상향 조정했고, 며칠 뒤 하랄 블로탄의 성전 선언과 함께 그가 내건 기치가 덴마크 전역을 뒤흔들었다.
― 천공신 오딘의 의지와 함께 진정한 바이킹의 왕이 귀환했노라. 거짓된 선지자를 따르는 이들이여. 부정한 믿음의 대가를 치를 때가 도래했노라. ―
* * *
[셀란섬 코펜하겐 – 에릭의 거처]
“전하. 지난번에 말씀드린 예언가를 불러왔습니다.”
안 그래도 골치 아픈 일들 때문에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았던 에릭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왔다.
“어서 오게. 예언가여.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해줘서 고맙네.”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께서 부르시는데 당연히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면 밖으로 울리는 여린 목소리에 의외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에릭은 내색하지 않았다. 눈앞의 인물은 마녀라는 칭호도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자신의 아내인 군힐드도 그렇지만 마녀라는 족속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 지금이야 사근사근하게 자신의 말을 듣고 있지만 수틀리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래, 이곳에 오는 데 큰 불편함은 없었나?”
“배려해주신 덕분에 편안히 올 수 있었습니다.”
“허면 예언가여. 내가 그대를 뭐라 불러야 하겠는가?”
“전하께서 원하시는 대로 부르시면 됩니다. 마녀, 예언가, 점성술사, 역병의사, 주술사 등등. 전하께서는 이 수많은 호칭 중 제게 어떤 모습을 바라고 계십니까?”
“…그대를 예언가라 부르도록 하지.”
“좋습니다. 허면 감히 예측하건대 전하께서는 제 예언을 듣고 싶으신 모양이군요. 정확히는 라그나르와 하랄 블로탄에 대한 예언을 듣고 싶으시겠지요.”
“정확하네.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퍼졌나? 퓐섬에서 칩거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칩거한다고 귀를 닫아놓고 사는 건 아니니까요.”
자신만만한 예언가의 말에 에릭은 굳이 말을 빙빙 돌리지 않고 정면 돌파하기로 했다.
“흠… 예언가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그대의 힘으로 나를 도와줄수 있소?”
“왕께서 명하신다면 이 땅의 백성으로서 당연히 따라야겠지요. 하지만 왕이시여. 저는 오직 세 번의 예언을 할 것이며 그때까지만 당신의 곁에 머물 것입니다.”
“세 번이라… 내 억지로 그대를 데려왔으니 그 정도 요구는 들어줘야겠지.”
사실 에릭도 눈앞의 예언가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여론이 분열된 지금 이름난 예언가의 예언을 바탕으로 의견을 하나로 통합할 목적으로 그녀를 데려왔을 뿐이었다.
애초에 이 중요한 사안을 고작 예언가의 말을 듣고 결정할 리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과는 별개로 예언가들의 말은 마냥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그 권위가 높았다.
물론 그것도 그럴듯한 예언을 하고 제대로 된 미래를 예측하는 이들에게나 통용되는 말이었지 사이비들에겐 국물도 없었다.
그리고 눈앞의 예언가는 마녀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그 이름과 권위가 높았다. 퓐섬에 거주하는 이의 이름이 이곳 셀란섬까지 퍼져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허면 이후 있을 회의에 참관인으로서 함께 참석해주게.”
“외부인인 저를 그런 중요한 회의에 데리고 가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대도 내게 예언을 하려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나?”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예언가는 더 이상 토를 달지 않았고 에릭은 그녀를 이끌고 회의장으로 향했다.
이미 회의는 지겨울 만큼 진행했고 서로 간의 의견차를 몇 번이나 확인했지만 에릭은 회의의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일부러 시간을 질질 끌고 있었다.
그 때문에 군힐드를 비롯한 그녀의 파벌들은 오늘 반드시 확답을 받겠다 이야기했고 이 이상 결정을 미룰 수 없기에 회심의 카드로 예언가를 데려온 것이었다.
“에릭. 생각보다 늦었군요.”
아내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에릭은 내색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답변했다.
“우리에게 조언을 해줄 예언가를 모셔오느라 좀 늦었소.”
그제야 군힐드의 시선이 에릭의 뒤로 향했고 가면을 쓴 여성의 모습에 군힐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에릭이 무슨 의도로 저 예언가를 데려왔는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중대사를 예언 따위에 의지하겠다는 겁니까?”
“그건 아니오. 하지만 조언을 참고할 정도는 되지 않겠소?”
“참고라… 좋습니다.”
굳이 시간을 끌기도 싫고 쓸데없는 일로 말다툼을 하며 힘을 뺄 생각이 없었던 군힐드는 곧바로 회의를 진행했다.
“몇 번이나 얘기했듯 지금 당장 병력을 이끌고 유틀란트로 병력을 파견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늦장을 부리는 순간에도 반역자는 북부로 진군하고 있을 겁니다.”
“허나 생각해보시오. 라그나르 로드브로크가 롤란섬에 자리를 잡고 그 주변을 초토화시키고 있소. 괜히 병력을 끌고 원정을 갔다가 이곳 셀란섬이 점령당하면 어쩔 생각이오?”
“그들의 수가 얼마 되지 않는 건 몇 번이나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고작 천 명을 조금 넘는 인원들에게 이곳 쾨벤하운이 점령당할 거라는 얘기입니까?”
“그건 선발대일지도 모르오. 우리가 자리를 비운 순간 본대가 이곳을 급습하면 어떻게 방어할 생각이오?”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 때문에 적들을 토벌할 시기를 놓칠 생각입니까? 지금 눈앞에 드러난 진실은 라그나르가 이끄는 병력의 숫자가 고착 천 명 언저리라는 점이며, 하랄 블로탄이 이끄는 병력의 숫자는 수천에 육박한다는 겁니다.”
얘기만 들으면 군힐드의 말이 정론이었기에 에릭은 입을 다물었고 군힐드는 기회라는 듯 에릭을 몰아붙였다.
“그에게 동조하는 이들이 늘어나면 그 수가 무려 일만에 이를 텐데 그 꼴을 두고 보겠다는 겁니까? 산불이 커지기 전에 막는 게 왜 잘못됐다는 건지 전 이해할 수가 없군요.”
논리가 제법 그럴 듯했기에 많은 이들이 군힐드의 말에 동조했고 에릭은 입맛을 다시며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예언가를 바라보았다.
“예언자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에릭의 말에 회의장에 있는 모든 이의 시선이 예언가에게 향했고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