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그런 내 표정을 읽은 건지 이비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바라보았다. 물론 나는 여전히 긴장을 놓지 않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시 그녀의 얼굴에 낙인과 흉터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굉장히 기묘해서 마치 뱀이 허물을 벗는 듯한… 아니, 지금은 다시 허물을 뒤집어쓰는 모양새였다.
시발, 낙인 자체가 허물이었을 줄이야. 왜 뱀의 신이라고 불리는 아포피스의 낙인이 저따위였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주군께서 뭘 염려하고 계신지는 알고 있습니다.”
말하는 걸 보아하니 아직까지 제정신을 붙들고 있는 모양이다. 아마 지금 내가 신성중독을 겪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물론 수년간 시달려온 만큼 이비의 진척도는 훨씬 더 높지만 말이다.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거나 계기가 생기면 그녀는 아포피스의 화신이 되어버릴 것이다.
“이비. 어떻게 된 거야?”
“글쎄요. 목소리가 들리더군요. 처음에는 환청이라 생각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리는 더 선명해져 갔습니다.”
이건 전조다. 내가 오딘의 환영을 보고 그의 힘이 내게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이비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아포피스는 이집트의 최고신인 라와 맞서 싸우던 악신이라는 게 문제지.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렇게 됐더군요.”
그녀는 천천히 손을 뻗었고 이내 그녀의 손아귀에는 죽음이 형상화된듯한 시커먼 기운이 손아귀에 아른거렸다.
이비는 그 상태로 와인잔을 집었고 유리로 만들어진 와인잔은 그 즉시 가루가 되어 허공에 흩날렸다.
“못 보는 사이에 악력 운동이라도 한 거야? 혹시 이게 실전압축근육인가?”
말이야 장난스럽게 했지만 이건 꽤 심각한 상황이었다. 평범한 사람이 단순히 와인잔을 잡았다고 가루가 될 리가 없잖은가.
사람이 죽으면 육신이 썩고 뼈는 흙이 되어 사라지듯 와인잔 역시 그녀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고 그 결과 모래가루가 되어버린 것뿐이었다.
“역시 주군께선 이런 제 모습을 보고도 동요하지 않으시는군요. 하긴, 제 흉측한 모습을 보고도 유일하게 아무런 편견 없이 바라봐주셨었죠.”
“뭐, 네가 어떻게 바뀌건 너는 너잖아. 그래서 몸 상태는 좀 어때?”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습니다. 이 힘도… 원래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다룰 수 있게 되었고요.”
아포피스. 어둠과 혼돈, 죽음의 대명사이며 전염병을 일으키는 이집트 신화의 악신이자 최고신 라와 맞서 싸우는 절대 악.
왜 그런 아포피스가 이비의 몸에 깃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문제는 그녀가 구원받지 못하면 아포피스의 힘에 집착하게 되고 그러면 뭐… 아포피스의 화신이 되는 배드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저만한 힘을 별다른 대가 없이 다루는 걸 보면 그녀는 이미 심각한 상태라는 얘기였다. 애초에 신의 힘을 빌려서 사용하는 신성력은 대가 없는 힘이 아니다. 그건 천신이건 악신이건 뭐건 간에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법칙이었다.
내가 오딘의 힘을 빌려오면 그 대가로 신성력에 중독되는 것처럼 그녀 역시 아포피스의 힘을 사용하게 되면 정신력을 좀먹히며 자아를 잃어버리게 된다.
그리고 이비가 본인의 몸에 새겨진 흉터를 지우는 건 당연히 신성력이 필요했다. 그녀로서는 태어날 때부터 저 낙인을 달고 살아온 만큼 저 흉터를 지우는 것에 광적으로 집착하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이는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얼굴의 흉터를 지우기 위해 아포피스의 힘을 사용하고, 그 대가로 정신은 피폐해져 가며 그렇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는 타락하게 되고 결국에는 자아를 상실한 꼭두각시가 되는 게 그녀의 운명이었다.
“그래서, 이제 날 떠날 생각이야?”
내 물음에 그녀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는 듯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처음 주군께 충성을 맹세할 때 저는 저의 몸과 영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바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설사 주군께서 절 버리신다 해도 저는 주군을 따라다닐 겁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흡족하게 미소 지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이비를 동료로 받아들였을 때 1년 만에 그녀가 떠나는 건 그때쯤 아포피스의 힘이 발현되기 때문이었다.
얼굴의 흉터를 지울 방법을 찾았으니 굳이 플레이어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어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것이었다. 다만, 그녀는 내게 영원한 충성의 맹세를 한 상태이기에 아직까지 내게 붙어있는 거였다.
“그리고 이 힘으로 제가 주군을 조금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비,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그 힘은 널 좀먹을 거야. 오딘의 힘이 나를 좀먹는 것처럼.”
내 말에 그녀는 피식 웃으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사 그렇게 된다 해도 주군께서 절 다시 구해주실 거잖습니까?”
“…당연하지.”
“그럼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그리고 전 주군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이 목숨을 바칠 수 있습니다.”
저건 그냥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그녀는 의사라는 걸 차치하고서라도 과할 정도로 플레이어에게 헌신적이었으니까.
그게 이비가 이 게임의 모든 NPC를 통틀어서 제일 많이 사망한 이유겠지. 나는 착잡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고 이비는 내 눈초리가 부담스러웠는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을 이었다.
“크흠… 큼. 아무튼 주군. 제가 주군을 도와드릴 방법을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일단 얘기해봐.”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한 얘기를 할 것 같았지만 일단은 그녀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대부분의 국가들이 그렇지만 특히 이곳 북부는 마녀와 예언자, 현자… 뭐 그런 부류에게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뭐, 그렇지?”
당장 에릭 블러드엑스의 부인인 군힐드 코눙가모디르도 마녀로 소문이 나 있고 에릭은 그런 그녀의 아름다움과 힘에 반해서 결혼을 결심했다고 하지 않던가.
“그리고 지금 제 모습은 마녀에 걸맞지 않습니까?”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비의 모습은 이단심문관들이 본다면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할 정도로 마녀의 모습 그 자체였다.
그녀의 약초학과 의학은 주술로 변질될 것이며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사람을 현혹시키는 사술로 포장될 것이고 모든 걸 죽음으로 이끄는 아포피스의 힘은 끔찍한 저주로 둔갑할 터였다.
본래의 흉한 얼굴을 감추고 미녀로 둔갑할 수 있음은 물론 사람을 살리는 것도, 죽이는 것도 가능한 그림으로 그린듯한 마녀. 그게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이비의 모습이었다.
“…계속 얘기해봐.”
“주군께서 공격을 하는 동안 저는 홀로 퓐섬으로 갈 겁니다. 그곳에서 마녀로서 명성을 쌓아야겠지요. 계속된 패배에 마음이 다급해진 에릭은 인간의 힘을 넘어선 무언가를 원할 겁니다.”
그녀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사람이라면 그런 경향이 있다. 평상시라면, 머리가 냉정한 상태라면 하지 않을 행동과 말도 급박한 상황에 처하면 절로 튀어나오게 된다.
도박으로 큰돈을 잃은 사람은 한탕을 노리고, 주식으로 큰돈을 잃은 사람은 한 방을 노리며 한 주식에 가진 돈을 몰빵하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런 경우 대부분 처참한 결말을 맞게 된다.
“그래서?”
“에릭의 신임을 얻은 뒤에 그를 독살하든, 아니면 내부에서 역병을 퍼뜨리든 할 수 있는 걸 해야겠지요.”
“위험하지 않겠어?”
“그 누가 저를 위협할 수 있겠습니까? 제 목숨을 거둘 수 있는 건 오직 주군의 명령입니다.”
이비는 자신감에 가득 찬 목소리로 얘기했고 나는 차마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그녀의 말대로 되면 일이 쉽게 풀리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의 뒤처리도 훨씬 간편해질 테니까.
결국, 나는 이비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그녀는 기쁜 마음으로 내 명령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비.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한 거야?”
내 물음에 그녀는 지금까지의 자신만만한 표정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우물쭈물거리더니 다시 가면을 뒤집어쓰면서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주군께서는 제 저주를 풀기 위해서 이곳까지 올라오시지 않았습니까? 그런 주군을 위해서 저도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이들이야 내가 뭔가를 노리고 북부로 왔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국 내가 북부로 올라온 진정한 이유는 이비의 말대로 나와 그녀의 치료를 위해서였다.
그걸 정확히 꿰뚫어 본 이비는 부채감과 죄의식에 휩싸였고 나를 도울 방법을 생각하다가 아포피스의 힘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정말 고마워. 네 헌신을 절대 잊지 않을게.”
나는 이비를 끌어안으며 감사를 표했고 그녀는 몸을 흠칫 떨면서도 날 밀쳐내지 않았다. 잠깐의 포옹을 끝마친 나는 다시 한번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녀가 나를 위해 헌신한 만큼 나 역시 그녀를 위해 움직일 것이다. 이 전쟁이 끝나면 그녀는 자신을 옥죄던 저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진정한 의미로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다.
* * *
그렇게 이비를 내보내고 난 뒤 나는 지도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비라는 새로운 변수가 추가된 만큼 작전을 다시 한번 정밀하게 조정해야 할 것이다.
이비의 말대로 그녀가 에릭의 신뢰를 얻게 된다면 굳이 복잡하게 돌아갈 것도 없었으니까.
그렇게 머리를 굴리며 고민하고 있는데 뜬금없이 힐데가 노크도 없이 방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녀는 밖에 나갔다 왔는지 머리에 눈이 내려앉아 있었는데 신경질적으로 눈을 털어내며 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거참, 대체 누가 가정교육을 한 건지 모르겠네.”
어떻게 보면 셀프 패드립이 될 수 있는 내 말에도 힐데는 코웃음치며 나를 힐난했다.
“교육은 저보다 라그나르 당신이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뭐? 내가 왜?”
“제가 당신을 대신해 열심히 순찰을 돌고 포교를 위해 뛰어다니는 동안 당신은 이븐 시나를 꼬시고 있지 않았습니까?”
힐데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이비가 나에 대한 호감도 만땅을 찍고 있긴 한데 그게 내가 이비를 꼬셔서 그런 건 아니잖은가.
하지만 그녀의 나에 대한 충성심과 과할 정도의 애정을 생각해보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라그나르 당신을 바라보는 이비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는 게 여자 꼬시는 솜씨가 제법이더군요. 그녀의 본판이 그렇게 예쁘다는 걸 알고 수하로 받아들였던 겁니까?”
“아니, 어… 보고 있었어?”
“순찰 다 끝나서 보고하려고 했더니 로맨스를 찍고 있는데 들어올 수가 있어야지요.”
“음… 수하에 대한 애정을 그렇게 호도하면 곤란한데.”
“그런 것치고는 꽤 자주, 그것도 노골적으로 이비의 가슴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합니까?”
힐데가 하는 말 하나하나가 팩트였기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대체 왜 라그나르는 힐데를 팩트폭력배로 키워놓은 걸까?
힐데는 콧방귀를 뀌며 내 앞에 놓인 와인을 벌컥벌컥 들이켰고 이대로 가면 분위기가 어색해질 게 뻔했기에 나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내 옆자리를 팡팡 치며 얘기했다.
“아무튼, 순찰 고생했어. 여기로 와서 몸이라도 좀 녹여.”
내가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자 힐데는 매서운 눈초리로 날 쏘아보면서도 이내 얌전히 내 옆에 다가와서 앉았다. 거참, 진짜 행동하는 게 고양이 같네.
“아직도 눈이 내리고 있어?”
“겨울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내리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봄에 눈이 내리는 광경은 처음이라서 신기하군요.”
“너 어렸을 때 자주 보지 않았어?”
“거긴 프랑스 인근이었지 않습니까?”
“어… 그랬나?”
북부 어딘가에 자리를 잡았던 것 같긴 한데 정확한 위치까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사실 빙의하지 않아도 과거의 기억이 희미한데 빙의를 하면 얼마나 더 흐릿하겠는가.
“생각해보면 예전에도 그랬습니다. 전 당신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힐데는 평소의 그녀답지 않게 조잘조잘 과거의 이야기를 늘어놓았고 나는 얌전히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러다 피곤했는지 말이 줄어드는가 싶더니 어느새 잠에 들었고 나는 조심스럽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그녀는 이전에도 종종 과거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왜 그녀가 기억의 편린으로 사라졌던 이야기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고아였던 힐데에게 과거는 단순히 과거가 아니라 나와 자신을 이어주는 매개체였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