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화
[슈바벤 공국 뉘른베르크 – 황궁 내부]
“흐음, 처음에 뭔 지랄 맞은 신탁 얘기를 꺼냈을 때는 별 희한한 핑곗거리를 준비했다 생각했는데 하는 꼬라지를 보니 진짜인 모양이군.”
황제는 소파에 앉아 탁자에 다리를 올린 뒤 거만한 표정으로 서류를 읽어내려갔다.
거기에는 세작들이 최근 라그나르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조사한 내용이 적혀있었는데 자신이 라그나르에게 직접 들었던 말과 크게 상반되는 내용은 적혀있지 않았다.
“하긴, 다른 건 몰라도 자기가 내뱉은 말은 지키는 놈이었지.”
그는 오딘이 내린 신탁에 의거해 하랄 블로탄의 왕위를 되찾아주겠다 천명했고 실제로 그를 위해 남부에서 이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북부로 올라갔다.
처음에는 이게 뭔 지랄인가 싶었지만 그게 지랄이 아니라 진실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는 망치로 맞은 것마냥 머리가 띵 하고 울려왔다.
어쩌면, 라그나르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았던 야만인이기에 그렇게 쉽게 자기가 가진 것들을 포기할 수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그의 능력이라면 언제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 테고.
“폴란드에서 지원병력이 출정했고 라트비아의 하랄 블로탄도 병력을 끌고 집결 중이라고?”
“예. 아마 지금쯤이면 집결을 완료했을 겁니다.”
“서로 만나서 술이나 마시려고 모인 건 아닐 테니 진짜 전쟁을 하긴 할 모양인가 보군.”
교역을 위해 잠시 내려왔던 필리프의 대답에 황제는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겼다. 혹여 이번 전쟁을 통해서 이쪽에서 뭔가를 얻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어떻게 관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북부는 자신의 세력이 닿지 않는 곳인 데다 사자공의 영역이기도 했다. 비록 그의 이빨과 발톱이 뽑혔다지만 그래도 그는 여전히 사자였다.
건드리지 않으면 스스로 죽어갈 텐데 굳이 찔러서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거기에 전쟁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병력이 상하고 국력이 깎일 수 밖에 없다.
물론 라그나르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고 언제나 승리를 거둬왔다지만… 애초에 승리한다고 해도 북부는 먹을 게 없는 땅이었다.
농사도 안 되고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며 본인들도 먹을 게 없어 해안선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약탈이나 하는 놈들인데 덴마크나 노르웨이를 점령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는가?
땅이라고 다 같은 땅이 아니잖은가. 얼어붙은 북부의 땅은 재활용도 안 되는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아마 라그나르가 그곳을 점령한다고 해도 그곳의 인원들을 부양하다가 파산하고 말 것이다.
그걸 막기 위해선 바이킹들처럼 해안가를 약탈하거나 남의 걸 빼앗아야 할 텐데 이건 외교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럼 자신은 그걸 가지고 명분을 얻은 뒤 라그나르를 압박할 수 있겠지.
어떤 결과가 나오든 자신과 호엔슈타우펜에서는 그다지 손해 볼 게 없는 상황이었기에 황제는 지금의 상황을 그냥 묵인하고 넘어갈 생각이었다.
“필리프. 네 생각은 어떠냐?”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요?”
“라그나르 말이다. 그가 전쟁을 하는 틈을 타서 우리가 뭘 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당분간 힘을 키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원론적인 답변이지만 그렇기에 정답에 가까웠다. 힘이 있어야 모든 걸 지킬 수 있을 테니까.
“힘이라… 틀린 말은 아니지. 알겠다. 나가보거라.”
가볍게 인사한 뒤 방문을 나서는 필리프에게 황제는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한마디 툭 던졌다.
“아, 그러고 보니 최근 널 찾는 사람들이 많더구나.”
물론 필리프를 찾는 이들이나 그의 세력이라고 외치는 놈들 중 실권을 가진 이들은 없다. 애초에 권력 싸움에서 밀려난 쭉정이들이 필리프에게 달라붙은 것뿐이다.
다른 선제후들이 그의 세력에 합류하면 위험할 테지만, 그들이 아무리 최근에 자신과 사이가 멀어졌다고 해도 자신과 적대하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인리히라는 능력 있고 검증된 패가 있는데 굳이 역배당을 걸 이유가 없잖은가?
“제가 절 찾아오는 사람을 거절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까?”
“아비로서 친구는 가려서 사귀어야 한다고 충고하는 것뿐이다.”
“말씀하신 충고.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아버지.”
말과는 다르게 필리프의 눈매에는 반항적인 기운이 깃들었지만 황제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갔다.
“내가 원망스럽겠지만 넌 현명한 아이니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 거라 믿는다. 네 형의 심기를 거스르지만 않는다면 조용한 곳에서 부족함 없이 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필리프에게 악역을 강요하는 건 미안했지만 이건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일원이라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이었다.
호엔슈타우펜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건 그런 거였으니까.
* * *
[작센 공국 뤼벡― 연합군 주둔지]
“흠, 그러니까 라그나르 자네 말은 동시에 진격을 하자는 거군.”
“맞아. 이쪽의 병력이 훨씬 더 많은데 굳이 한 곳에 매여있을 필요는 없잖나.”
내 제안에 하랄 블로탄은 팔짱을 낀 채 지도를 바라보았고 나는 긴장한 표정의 례셰크를 향해 천천히 내 작전을 풀어서 설명해주었다.
“례셰크. 내가 자네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그대가 이쪽 지형을 잘 모르기에 다시 한번 설명해주는 거니 너무 고깝게 생각하지 말게나.”
례셰크의 역할이 중요한 만큼 작전을 잘못 이해해서 병력을 엉뚱하게 운용하면 피똥을 쌀지도 모르기에 나는 재차 설명하려 했고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절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여러번 들으면 들을수록 작전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얘기해주니 고맙군. 아무튼, 례셰크 자네도 알다시피 덴마크는 유틀란트반도와 퓐섬, 셀란섬으로 이루어져 있지.”
물론 그 이외에 자잘자잘한 영토들이 있긴 하지만 그 크기도 작고 전쟁에 영향을 끼칠 정도는 아니었기에 이는 배제하고 설명을 이어갔다.
“그리고 그중에 중심지는 셀란섬이라네. 수도인 쾨벤하운(코펜하겐)이 그곳에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이건 현재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유틀란트반도보다 수도가 있는 셀란섬에 사는 인구가 더 많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섬이 국가의 중심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자네는 잘 이해가 안 가겠지만 스칸디나비아반도와 유틀란트반도, 나아가 유럽 대륙을 이어주는 구심점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편할 걸세.”
늘 그렇듯 교통의 요지에는 도시가 들어섰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통팔달이니 뭐 이런 말도 있지 않던가?
사실 교통의 중요성은 현대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과거이기에 교통수단의 부재로 인해 이동의 제약을 더 중요하게 보는 거였고 그런 관점에서 셀란섬은 최고의 요충지였다.
“음… 대강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덴마크 내에서 유틀란트반도의 지분을 무시할 수는 없다네. 그래서 나는 우리가 가진 병력의 우위를 통해 동시다발적으로 공격을 진행하며 유틀란트반도를 중심으로 공략할 생각일세.”
“굳이 유틀란트반도부터 공격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빠르게 셀란섬을 정복하면 유틀란트반도는 절로 항복하지 않겠습니까?”
“셀란섬은 수도인 쾨벤하운이 있는 만큼 현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국왕인 에릭 블러드엑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네.”
그는 덴마크의 왕위를 찬탈한 뒤 굳이 수도를 옮기지 않았고 그곳에 틀어박혀서 자신의 힘을 키우고 있었다.
초창기라면 모를까 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입지와 기반을 확실하게 다졌을 것이다.
“반면 유틀란트반도는 중심에서 소외되어 있던 데다 노르웨이와 스카레라크 해협을 사이에 두고 얼굴을 맞대고 있기에 이래저래 다툼과 마찰이 있었지.”
“아, 허면 당연히 노르웨이의 국왕이었던 에릭에게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겠군요.”
내가 할 말을 정확히 캐치해내는 례셰크를 보며 나는 칭찬의 의미를 담아 박수를 쳤다.
“정확하네! 그래서 아까 얘기했듯 나는 하랄과 자네를 유틀란트반도로 보낼 생각이네. 하랄이 있으니 다른 걱정 없이 마음껏 싸워도 괜찮다네. 어차피 단순한 내전으로 치부될 테니까.”
“어… 이쪽의 병력이 더 많은데도 말입니까?”
물론 실상은 다르지만, 명분 자체에 하자가 있는 건 아니다. 종종 멸문한 가문의 마지막 계승자나 망한 왕국의 혈육을 타국에서 받아주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다 명분을 확보하려는 거다.
그렇게 후계자를 내세워 명분을 확보한 뒤 병력을 동원해 침공하는 장면이 꽤 자주 나오지 않던가. 그럼 명분이 된 후계자는 어떻게 하냐고? 적당히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말을 안 들으면 적당한 시점에 암살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하랄의 부탁을 받고 파견 온 용병이라네. 전쟁에서 타국의 용병을 끌어들이는 일은 의외로 흔하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요.”
“그러니 자네는 자네가 끌고 온 병력을 데리고 하랄을 보좌해주게. 그곳은 평야 지대니 자네의 기병이 활약하기도 쉬울 테고 뭣보다 말을 실은 채 섬으로 이동하는 건 힘들지 않겠나?”
중장기병 하나를 배 위에 태우려면 많은 것을 희생해야 한다. 당장 무게만 따져봐도 중장기병 한 기를 빼면 쓸만한 보병 열댓 명은 태울 수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 한 마리, 그것도 중갑을 입은 병사를 태우고 달리려면 못해도 500~600kg은 돼야 할 것이다. 거기에 말을 돌볼 인원과 말과 사람이 쓸 중갑까지 포함하면 엄청난 무게가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유격전에서 중기병이 이 모든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투입할 정도로 큰 가치를 지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큰 전과를 거두기도 힘들 테고.
정찰병이 필요하면 경기병으로 대체할 수 있는 데다 북부는 말에게 먹을 건초를 확보하기가 힘든 지역이었다. 괜히 바이킹 병종 중에 기병이 없는 게 아니다.
“이해했습니다.”
“다만 진격을 하되 점령이 목표가 돼서는 안 되네. 요점은 에릭 블러드엑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야를들을 설득하는 거라네.”
그렇게 서서히 덴마크를 잠식해 나가면 에릭도 결국은 우리와 결전을 벌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간의 시선도 시선이었고 겁쟁이로 낙인찍힌다면 그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질 것이다.
사실 그가 작정하고 성에 틀어박혀서 노르웨이의 지원군을 기다리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공성전을 벌일 수도 있었지만, 공성전은 언제나 공격 측에게 큰 피해를 강요했고 어찌어찌 승리를 거둔다고 한들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해나갈 여력을 잃어버릴 것이다.
그러니 그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허면 용담공 전하께서 저희가 유틀란트반도를 휘젓고 다니는 동안 함선을 끌고 돌아다니면서 셀란섬을 봉쇄할 거란 말씀이시군요.”
“하하,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군. 물론 에릭은 나를 무시하고 진격할 수도 있겠지만 절대 그렇게 하진 못할 걸세. 나는 빈집을 털다 못해 박살 내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으니까.”
각자의 역할에 맞게 분배를 하겠다는 내 제안은 제일 합리적이었고 고민하던 하랄도 결국은 내 작전을 수락했다.
그 역시 내 제안을 곧바로 수락하지 않은 건 내 작전을 반대해서가 아니라 내가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에릭이 이끄는 병력들은 하랄의 후스카를 못지않은 정예병이었고 태생이 바이킹인 만큼 배를 다루는 솜씨도 매우 뛰어났다.
그 때문에 자칫 잘못해서 뒤를 잡히거나 습격을 당하기라도 하면 후퇴는커녕 생존 자체를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례셰크와 하랄을 설득해 작전을 채택한 나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그런 나를 가면을 뒤집어쓴 이비가 붙잡았다.
“주군.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어? 어어… 괜찮아. 내 집무실로 갈래?”
갑작스러운 면담 요청이었지만 이비가 이렇게 강하게 요청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나는 이비를 내 집무실로 이끌었다.
여전히 날씨는 추웠기에 그녀에게 따뜻하게 데운 와인을 건네며 부드러운 어조로 물었다.
“그래. 무슨 일이야?”
“잠시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자신의 가면을 벗었고 나는 헛숨을 들이켰다. 최근 많이 신경을 못 써줘서 혹시 떠나겠다는 말을 할까 봐 가슴 졸이고 있었는데 그보다 더 놀랄만한 광경이 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비 너….”
그녀의 얼굴에 나 있던 흉측한 흉터와 낙인은 애초부터 없던 것처럼 깨끗하게 사라져있었다. 하지만 오랜 경험으로 나는 이게 불행의 전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뱀이 온몸을 휘감은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아포피스의 저주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낙인과도 같았다.
이게 사라지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아포피스보다 더 강력한 신의 힘을 이용해 불태우거나 봉인하는 방법으로 아포피스의 저주를 억누르는 것이 아니면 저주에 집어삼켜졌을 때뿐이었다.
다만 나는 아직 이비를 구원할 물건을 구하지 못했고 이는 이비가 저주에 삼켜졌다는 것을 의미했기에 나는 긴장한 얼굴로 허리춤에 매여있는 도끼의 자루를 매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