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작센 공국 하노버 ― 사자공의 저택]
이제 봄이 왔다고는 하지만 북부의 봄은 여전히 쌀쌀했다. 특히나 밤은 기온이 확 내려가는 경우가 많았기에 샤워를 마친 사자공은 가운을 입은 뒤 난로 옆의 소파에 앉아 와인을 들이켰다.
와인병을 반 정도 비운 그는 <라그나르 공작의 동향 보고서>라는 제목이 적힌 서류를 진중한 표정으로 읽더니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사실 사자공 입장에서 라그나르의 이번 북부 원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북부 원정이고 나발이고 그가 남부를 떠나 북부에 온 것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 어이가 없는 건 그 행동의 원인이 오딘의 신탁이었다는 점이었다.
“신탁이라… 나는 평생 가도 그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물론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믿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그 예로 프리드리히는 지나칠 정도로 황권 강화에 집착했고 그게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처럼 라그나르에게는 오딘의 신탁이 그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주변에서 용담공이니 제국의 공작이니 하면서 치켜세워 주지만, 그도 결국은 바이킹이라는 거겠지.”
침대 위에서 편안하게 죽는 걸 수치로 여기며, 오딘과 토르를 섬기고, 전투를 갈망하는 바이킹의 피가 그의 몸속 깊은 곳에 흐르는 모양이었다.
“하긴, 평상시에 교활하면서 노회한 모습을 보여서 그렇지 전쟁에만 서면 그런 미친개가 또 없었지.”
그 때문에 그를 부르는 호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서야 용담공이라 부르며 그의 용맹을 칭송했지만, 그의 정적들은 그를 야만공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다. 또한, 전장에서 라그나르를 마주한 적군은 그를 도살자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이는 생각보다 직관적인 호칭이었는데 실제로 전쟁터에서 그의 앞길을 막은 이들은 전부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며 도축당했기에 붙여진 별명이었다.
“후우… 어쨌거나 그가 승리했으면 좋겠군.”
사자공은 보고서를 난로에 집어넣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좋든 싫든 이미 그와 자신은 한배를 탄 것과 마찬가지였다.
자신만 탔다면 그래도 중간에 손절을 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인 오토까지 함께 탄 이상 벨프가와 라그나르는 이미 운명공동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기에 그의 승리를 바라는 건 당연한 처사였다. 물론 자신이 이런 기도를 하건 안 하건 그는 언제나 그랬듯 승리할 것이다.
지금껏 라그나르는 상대가 누구든지 언제나 승리를 거둬왔으니까.
* * *
[작센 공국 뤼벡 ― 라그나르의 거점]
끊이지 않을 것만 같던 한파가 물러나자 폴란드는 약속대로 윙드후사르를 이끌고 지원군으로 왔으며 하랄 블로탄 역시 후스카를을 포함한 정예병들을 이끌고 아군에 합류했다.
특이하게도 폴란드의 총사령관은 정의공이 아닌 례셰크였는데 나는 개의치 않았다. 정의공은 정의공대로 바쁜 일이 있을 테고 례셰크도 그간의 경험을 통해 성장했으니 일군을 맡기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례셰크. 부름에 응해줘서 고맙네. 먼 길 오느라 정말 고생 많았네.”
“더 많은 병력을 데려오지 못해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니야. 최근 폴란드가 힘든 건 나도 다 알고 있네.”
사실 힘들다기보단 꾸역꾸역 먹은 것들을 소화시키느라 시간이 걸리는 거겠지만 어쨌든 그 와중에도 이렇게 병력을 보내주지 않았던가.
특히 윙드후사르를 보내준 건 정의공 나름대로 성의 표시를 한 것이기에 나는 군말하지 않고 례셰크를 띄워주었다.
“클라이페다에서 보여준 그대의 통치 능력이 뛰어나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돌고 있더군. 정의공 전하께선 후계 걱정이 없으시겠어.”
“이게 다 전하 덕분입니다. 저를 그곳에 보내라 아버지께 조언한 것도 실은 경험을 쌓는 것 이외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아버지께서 정말 기뻐하고 계십니다.”
클라이페다는 폴란드의 최대 항구 도시인 그다인스크와 라트비아 지역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리가 지역을 이어주는 중간 거점이었다.
례셰크는 그 지리적 이점을 진작에 깨닫고 이곳을 아예 중간 기항지로 탈바꿈시켰다. 나름 도박에 가까웠던 그의 선택은 정확히 들어맞았고 신성로마제국의 상단들까지 슬금슬금 무역에 참여하자 클라이페다는 호황을 맞았다.
그 기세를 타 례셰크는 대부분의 품목에서 관세를 철폐했고 제국의 상단은 물가가 비싼 그다인스크보다 클라이페다에서 무역 활동을 시작했다.
사실, 그다인스크나 클라이페다나 사나흘 거리였고 그다인스크는 기존의 상단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에 새로운 상단들이 자리를 잡기에는 클라이페다만 한 곳이 없었다.
물론 직접 리가로 가서 거래를 하면 좀 더 이윤을 남길 수 있었지만 조금 과장을 보태면 클라이페다까지 온 만큼 더 가야 했던 데다 해적과 마주할 위험성도 있었기에 그들은 클라이페다에 자리를 잡았다.
사실 해적들이 창궐하는 건 음식물에 파리가 꼬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내가 땀 흘려 돈 버는 것보다 남의 피를 흘리게 하고 뺏는 게 더 쉽게 돈을 버는 방법이었으니까.
원래의 한자동맹이 그렇듯 대규모로 소탕을 하지 않는다면 저들은 결코 소탕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이미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한 상황이기에 카리브해처럼 해적 소굴이 될 일은 없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인 점이었지만.
아무튼, 이런 이유들로 클라이페다의 입지가 커졌고 당연히 그다인스크는 반발했다. 하지만 정의공은 의도적으로 이 상황을 방관함은 물론 오히려 클라이페다의 성장을 부추겼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다인스크 지역은 병합한 지 얼마 안 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폴란드에서 유일하게 바다와 접하고 있던 지역이었기에 곧바로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건 폴란드가 북진해서 바다와 맞닿는 다른 영토와 항구를 얻은 뒤에도 마찬가지였는데 그만큼 그다인스크가 다른 항구들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가치가 높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도 수십 개의 항구가 있지만, 항구라고 다 같은 항구는 아니잖은가. 말마따나 부산항이나 평택항을 시골의 조그만 항구와 비교할 수 없는 것처럼 그다인스크도 그와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직 반항적인 태도를 가진 그다인스크의 독주는 통지자인 정의공에게 썩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 때문에 정의공은 이 기회를 통해 기강을 잡을 생각이었다. 클라이페다가 그다인스크만큼, 아니 하다못해 그 반만이라도 커진다면 그다인스크를 견제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눈앞의 례셰크는 내가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자신을 클라이페다로 보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솔직히 그런 복잡한 걸 생각한 건 아니고 적당히 발트해 무역의 이점을 알기에 보낸 거였는데 이런 나비효과를 만들어 낼 줄은 몰랐다.
하지만 나는 뻔뻔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원래 가끔은 얼굴에 철판도 깔아줘야 하는 법이다.
“생각을 하는 것과 그 생각을 실천하는 건 별개의 문제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더라도 실제로 그렇게 만든 건 자네의 능력이 아닌가.”
“전하께서 절 믿어주시고 그곳으로 보내셨는데 마땅히 행동으로 보여드려야지요. 거기에 전하의 조언과 지지 덕분에 대공의 길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 현재 후계자들 중에 자네처럼 두각을 드러낸 이가 누가 있겠나. 하지만 고작 대공에서 만족할 생각인가? 자네라면 대공을 뛰어넘어 폴란드를 다시 통일한 왕이 될 수 있을 걸세.”
왕. 현재 대공위 시대인 폴란드에게 왕이라는 단어는 묘한 울림을 가져다주는 단어였다. 꽤 많은 공작들이 왕이 되겠다고 설쳤지만 결국 그 누구도 폴란드를 통일하지 못했으니까.
실제로 지금 엄청난 영향력을 떨치고 있는 정의공도 왕국의 통일이라는 단어를 꺼내진 못한다. 아무리 그가 지닌 힘이 크다고 하더라도 다른 공작들이 연합하면 밀릴 수밖에 없으니까.
“물론입니다. 클라이페다에서 조용히 힘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이번 전쟁은 자네에게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줄 걸세.”
다시 한번 례셰크의 어깨를 두들기며 격려해준 나는 인자하게 미소 짓고 있는 하랄 블로탄에게 다가가 그를 꽉 끌어안았다. 그 역시 아무 말 없이 나를 안아주었고 우리는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이야. 하랄. 얼굴이 제법 좋아 보이는 게 살만한가 보군. 처음 만났을 때는 수척한 게 다 죽어가는 모양새였는데.”
“하하. 다 자네 덕분이지 뭘. 그러는 라그나르 자네는 못 본 사이에 머리에 흰머리가 늘었군.”
“지랄 맞은 놈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그놈들 처리한다고 골머리 좀 썩였지.”
“아, 그 베네치아 놈들 말인가?”
“그래. 이참에 볼기짝 좀 두들겨 줬으니 당분간은 조용히 찌그러져 있겠지.”
“그건 볼기짝 수준이 아닌 것 같네만….”
지중해의 여왕을 상대로 적의 함대를 두 번이나 박살 내고 도제의 후계자들을 참수했으며 굴욕적인 협약을 맺게 만들었다. 그걸 과연 볼기짝을 두들겨 줬다는 말로 표현하는 게 맞는 걸까?
“그 잡놈들 때문에 몇 개월이나 배에 올라가 있었는데 그 정도는 해줘야지.”
“하하하하. 하긴, 배에 오랫동안 타고 있는 게 썩 재미있는 경험은 아니지. 그나저나 내 예상보다 빠르게 올라왔군. 솔직히 이렇게 진심을 다해 도와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말이야.”
하랄 블로탄은 도열한 라그나르의 병력들을 보며 진심으로 감탄했다. 사실 라그나르가 도와준다고 말은 했지만 지난번처럼 혼자 올라오거나 아니면 휘하 정예병 일부만 데려올 거라 생각했다.
이미 그가 남부에 자리를 잡았고 그곳의 맹주가 된 이상 그곳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는 말 그대로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버리고 북부로 올라오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자신과 라그나르가 친구 사이라지만 친구라는 단어가 내가 가진 모든 걸 포기해야 한다는 말과 동의어는 아니잖은가?
“남부에서의 일을 다 정리했으니 자네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곳에 올라온 것뿐이라네.”
“하지만 그를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지 않았나? 고작 나와의 약속을 위해 그대가 남부에서 이룬 모든 것들을 버리고 그곳의 안락한 삶을 내팽개치고 왔단 말인가?”
“나는 전사라네 친구여. 저 남부의 따뜻하고 안락한 삶은 나를 나태하게 만들더군. 그리고 내가 자네에게 왕위를 되찾아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호의와 진심을 넘어 광기까지 느껴지는 라그나르의 대답에 하랄 블로탄은 입을 다물었다. 전사. 그야말로 오딘의 대전사에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편안함과 안락함을 멀리한 채 피 튀기는 투쟁과 전투를 찾아 헤매는 광전사. 왜 오딘께서 자신이 아닌 그를 택했으며 그가 에인헤랴르가 된 건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술이라도 한잔 걸치고 싶지만, 그건 모든 일을 끝낸 뒤에 해도 늦지 않아. 그렇지?”
라그나르의 말에 하랄 블로탄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리가에서의 여유로운 삶이 그를 둥글둥글하게 만들었다지만 여전히 하랄은 복수를 갈망하고 있었다.
“동감일세.”
“좋아. 그럼 바로 에릭을 박살 낼 작전을 생각해보도록 하세나.”
공격자에 연합체인 그들에겐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라그나르는 곧장 작전 회의에 들어갔고 그렇게 하랄 블로탄의 왕위 탈환의 시간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