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기나긴 겨울 동안 나는 뤼벡에 틀어박혀 있었다. 물론 틀어박혀서 겨울잠만 잔 건 아니고 뤼벡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온 힘을 기울였다.
물론 겨울은 시시때때로 폭설이 내리며 낮이 짧고 한낮에도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계절이었기에 많은 걸 할 수는 없었다.
기계도 없는 시기에 강풍이 몰아치는데 가서 일하라고 채찍질할 수는 없잖은가.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겨우내 흘린 땀은 우릴 배신하지 않았다.
바이킹들로 인해 무너진 다리가 다시 세워졌으며 불탄 집은 복구되었고 흙과 돌더미에 파묻힌 우물은 다시 태양빛을 마주할 수 있었다.
거기에 나는 겨우내 필리프를 끌어들이기 위해서 무던히도 애를 썼다. 사실 호엔슈타우펜을 무너뜨리기 위해선 필리프의 협조가 필수였다.
제국은 결코 외부의 적에게 무너지지 않는다. 물론 역사를 바라봤을 때 외부의 세력에게 무너진 경우도 많았지만, 그를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게 내분이었다.
기나긴 평화의 흐름 속에서 각자의 이익을 위해 사분오열된 것이든, 아니면 위대한 통치자의 자식들이 제 그릇을 가늠하지 못하고 제국을 통치하겠다는 일념으로 내전을 벌이든 뭐든 원인이야 아무래도 좋았다.
호엔슈타우펜 역시 견고한 댐과 같았고 그를 무너뜨리기 위해선 내부의 균열이 필요했다. 황제 역시 이를 알고 있기에 황제는 균열을 메꿀 희생양으로 필리프를 선택했고 반대로 나는 균열을 키울 제물로 필리프를 선택했다.
결과는 다르지만, 과정은 나나 황제나 다를 게 없었다. 다만 당사자인 필리프는 살기 위해서 내가 내민 손을 붙잡을 수밖에 없었다.
황제의 뜻대로 된다면 자신은 호엔슈타우펜의 모든 불만 세력들을 끌어안은 채 죽음을 맞이할 테니까.
그리고 반역자를 내친 호엔슈타우펜은 그를 양분 삼아 굳건해질 것이며 자신의 형이자 장남인 하인리히는 황제의 자리에 계승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내 손을 잡고 내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면 그는 황제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슈바벤의 공작이 될 수 있었다.
늘 그래왔듯 자신을 제외한 모든 후계자가 죽거나 실종된다면 작위는 마땅히 돌아가야 할 이에게 돌아가는 법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나는 공작위에 올려주겠다는 달콤한 말로 필리프를 설득하는 한편 싫어도 이미 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며 필리프를 겁박했다.
“필리프. 이쯤 되면 자네도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깨달았겠지.”
“….”
내 명령으로 뉘른베르크에 갔다 온 필리프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아무리 그가 바보라도 지금쯤이면 상황파악을 끝냈을 것이다.
이미 뉘른베르크에는 황제를 적대하는 이들이 모조리 필리프의 측근이 되어있었으며 그만의 파벌이 만들어져 있었다.
필리프는 어이가 없을 테지만, 북부에서 필리프가 오토와 함께 이민족들을 토벌할수록 그의 이름은 높아져만 갔고 아무런 전공도 없는 하인리히와 절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반(反)황제파에선 전쟁만 벌였다 하면 털리기만 하는 황제에게 학을 떼고 있던 찰나에 야만인들을 토벌하며 이름도 드높이고 내 부관으로 일하며 나와 친분을 쌓은 필리프를 노골적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아마 적절한 시점에 황제는 그들을 모조리 쓸어버리며 호엔슈타우펜을 단결시키겠지. 그리고 그때 가문의 모든 것을 하인리히에게 물려줄 것이다.
“애초에 뉘른베르크에 남지 않고 날 따라온 것도 살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때에는 직감을 믿고 날 따라나섰겠지만 이쯤 되면 확실히 알겠지.”
내 물음에 지금껏 입을 다문 채 침묵을 지키던 필리프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용담공 전하께서도 아버지처럼 절 이용만 하실 생각이십니까?”
“필리프. 자네도 옆에서 날 계속 봐와서 알겠지만 난 굳이 건드리지 않으면 찾아가서 팰 정도로 성격 나쁜 사람이 아니네. 물론 내 안위에 문제가 된다면 헬하임까지 쫓아갈 테지만 자네가 굳이 나와 적대할 이유는 없잖은가.”
내 대답에 필리프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아마 내 말을 곱씹는 모양인데 실제로 나는 먼저 나서서 두들겨 팬 적은 없다.
하이르 앗 딘은 죽일 놈이라 죽인 거고 베네치아는 그쪽에서 먼저 날 건드렸으며 황제와 대적한 것 역시 자위 차원이었다.
“용담공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헌데 전하. 만약 제가 공작 전하의 체스말이 된다면 제 가문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되나. 자네가 알아서 처리하면 되는 거지. 자네는 공작이 돼놓고도 나한테 하나하나 다 물어볼 요량인가?”
내 손으로 호엔슈타우펜을 죽이거나 감옥에 가두기는 조금 그렇지. 설사 죽인다손 치더라도 나보다는 필리프의 손을 통해서 해야 한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름대로 야심이 있던 건지, 아니면 살기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필리프는 내가 내민 손을 붙잡았고 그렇게 나는 호엔슈타우펜을 무너뜨릴 무기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겨울 동안 거둔 또 다른 성과가 있다면….
“…하여 아후라마즈다께서 말씀하시길 악은 불로써 정화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힐데는 사제복을 입은 채 정화교단의 사원 안에서 슬라브인들을 교화시키고 있었다.
솔직히 힐데가 메이스로 도적들의 골통을 깨고 다닐 때는 진짜 사제가 맞을까라는 의문이 들긴 했지만 오늘 설교하는 모습을 보니 영락없는 사제였다.
본래라면 이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여야 했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정화교단의 가르침을 퍼뜨렸다. 기독교도 나쁘진 않지만 그래도 정화교단의 세력을 키워놓는 게 저들의 협력을 받기에 더 수월하지 않겠는가?
거기에 야만인들 입장에선 기독교보다 정화교단의 교리가 더 어울리기는 했다. 기독교가 내세우는 교리는 ‘구원’이었는데 이게 굉장히 난해하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바에 따르면 모든 이는 죄를 가지고 있고 이를 사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문제는 어떤 대가도 없이 단순히 믿음만을 강요하는데 이게 야만인들 입장에선 받아들이기가 영 힘들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원역사에서도 북유럽의 바이킹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차력쇼를 하는 경우도 있었고 그들의 신앙에 예수를 섞어 예수가 헐크 저리 가라 하는 투사로 묘사되는 경우도 많았다.
아무튼, 이런 고리타분한 기독교의 교리보다야 악을 멸하고 악인들을 불로써 정화해야 한다는 단순한 정화교단의 교리가 더 와닿을 것이다.
그 때문에 정화교단은 슬라브인들의 생활에 빠르게 녹아들고 있었고 그들은 점차 교화되고 있었다. 아마, 겨울이 끝날 때쯤에는 개종이 완료되겠지.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설교가 끝마쳤는지 다소 지친 기색의 힐데가 내게 다가왔다.
“라그나르? 여기까지는 무슨 일로 왔습니까?”
“딱히 무슨 일이 있어야만 올 수 있는 건 아니잖아. 네가 보고 싶어서 왔지.”
가볍게 윙크하며 얘기했지만 힐데는 코웃음치며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냉랭하게 대꾸했다.
“이젠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을 하는군요. 거짓말을 할 거면 조금 더 성의를 가지고 해주십시오.”
“음… 사실 네가 설교하는 거나 좀 도와주려고 왔는데 그럴 필요가 없어 보이네.”
“…지난번에 도와주겠다고 했다가 어떻게 됐는지 벌써 까먹었습니까?”
힐데의 비난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힐데와 자주 붙어 다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정화교단의 교리를 이해하고 가끔 경전을 볼 정도였기에 어느 정도 통달해 있었다.
때문에 단순히 힐데에게 개종을 맡기는 것보다 공작에 용담공이라고 불리는 내가 한두 마디라도 거들어주면 훨씬 더 포교가 쉬울 거라 판단했다.
그렇게 야만인들을 모아두고 정화교단의 교리를 읊으려 했지만 내 입은 열리지 않았다. 옆에 있던 힐데가 드물게 당황한 표정으로 날 재촉했지만, 그날 내 입에서 나온 건 오딘에 대한 찬양과 찬송이었다.
‘오딘 만세!’로 시작된 내 전도는 ‘오딘이 위대한 이유’, ‘오딘을 섬겨야 하는 100가지 이유’ 등 오딘신앙을 전파하는 데만 반나절을 꼬박 썼고, 나는 그날 힐데에게 모멸에 가까운 눈빛을 받아야 했다.
사실 나도 억울했던 게 꺾을 수 없는 의지가 발동돼서 어쩔 수 없이 오딘을 찬양하는 말들이 나온 것뿐이었다. 평상시에는 안 그랬는데 북부에 와서 오딘의 영향력이 강해지다 보니 절로 그런 현상이 발현된 것 같았다.
그리고 오딘의 힘이 강해진다는 건 내 몸이 신성력에 잠식되어가고 있다는 것과 동일한 얘기였고 이게 내가 서둘러서 전쟁을 벌이는 이유였다.
그렇기에 나는 겨울이 끝나갈 때쯤 나의 오랜 동맹들에게 소집을 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아마 내 편지가 도달할 때쯤에는 기나긴 겨울도 끝나있을 것이다.
* * *
[폴란드―크라쿠프]
“흐음… 라그나르가 이번에 제대로 이를 간 모양이군.”
폴란드의 대공. 카지미에슈 정의공은 라그나르가 보낸 편지를 품속에 집어넣으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사실 폴란드 입장에서는 올해는 전쟁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한겨울에 다른 공작들을 닦달하다시피 하며 웬드족을 토벌한 게 불과 한 달 전이다.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당연히 한겨울에 출진을 강요한 만큼 수많은 물자와 병사들의 희생을 치러야 했고 한동안은 그때 입은 피해를 복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라그나르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동맹이라는 건 내가 필요할 때만 써먹기 위해 맺는 게 아니었으니까.
“콘라드.”
“예. 아버님.”
“네 형을 대신해서 네가 클라이페다로 올라가거라. 그곳에선 병력을 징발하지 않았으니 라그나르를 지원할 물량과 병력을 뽑아낼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계속된 전투로 폴란드의 덩치도 국력도 커져 가고 있었지만 이제 그것도 슬슬 한계에 달하고 있었다.
그나마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기에 간신히 현 상황을 유지하고 있는 거지 중간에 한 번이라도 패배했다면 지금껏 쌓아놓은 공든 탑이 와르르 무너졌을 것이다.
자신의 대공 지위는 흔들릴 것이며 다른 공작들은 대공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숨겨뒀던 발톱을 꺼내 들 테고 폴란드는 그 즉시 내전에 들어갈 것이다.
여러 차례의 승리를 대가로 얻어낸 막대한 부와 광활한 영토는 각 공작들이 힘을 키우기에 충분한 영양분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패배하지 않는다면 해결될 문제였다. 여전히 폴란드에서 자신의 지위는 확고했고 지금까지 라그나르와 함께 한 전쟁은 언제나 승리로 끝을 맺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도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정의공은 참전을 결심했다. 비록 위험부담이 있을지언정 거듭된 승리는 자신의 조국 폴란드를 부강하게 만들어줬으니까.
* * *
[라트비아 ― 리가]
“아버님. 라그나르 전하께서 보낸 편지입니다.”
자신의 둘째 아들 스벤의 말에 왕좌에서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하랄 블로탄은 매가 먹이를 채듯 스벤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그 안에는 하랄 블로탄이 지금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려온 내용이 담겨 있었다.
“마침내!!!”
처음 덴마크에서 에릭 블러드엑스에게 왕위를 찬탈당한 뒤로 하랄 블로탄은 두 번 다시 덴마크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그의 세력은 강대했고 자신의 세력은 미약했으며 시간이 흐를수록 그 격차는 더 커질 게 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도움으로 이곳 리가에서 힘을 기를 수 있었고 지금 이렇게 복수를 할 기회가 찾아왔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복수는 두 번 다시 꿈꿀 수 없다는 걸 알기에 하랄 블로탄은 전군 동원령을 내렸고 수많은 함선과 정예병들이 그의 명령에 따라 리가로 집결하기 시작했다.
* * *
흐르는 시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하던가. 어느덧 겨울이 지나갔고 봄이 성큼 다가왔다.
부드러운 봄바람은 모든 생명체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으며 따스한 햇볕은 지처에 쌓인 눈들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이는 전쟁을 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였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마침내 기나긴 기다림 끝에 성전의 때가 도래했다. 이 전쟁을 통해 하랄 블로탄은 잃어버린 왕위를 되찾고, 모든 바이킹들의 뇌리에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이름이 새겨질 것이며, 제 주제도 모르는 망치쟁이들은 진정한 주신이 누구인지 깨닫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