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다 좋네. 헌데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때 자네에게 언질만 들었지 진행 과정에 대해 들은 것 같지는 않은데.”
“어려울 거 없습니다. 눈앞에 정석이 있는데 굳이 딴 길을 돌아갈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가 사자공을 쳐다보며 이야기하자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눈앞? 설마 나 말인가?”
“예. 사자공 전하께서는 오만공 전하의 아들로서 어린 나이에 바이에른과 작센을 물려받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뜬금없이 자신의 과거사가 나오자 그는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성실하게 내 물음에 답해주었다.
“그런 전하께서 흔들리는 입지를 다지고 자신의 능력을 입증하시기 위해 동방식민운동을 이끄신 것 아닙니까? 실제로 엘베강 동쪽에 살고 있던 슬라브족들을 몰아내면서 작센의 영토를 넓혔고 모두의 인정을 받지 않았습니까?”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는 것. 이것만큼 빠르게 모두에게 인정받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이는 과거에도 그래왔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변치 않을 불변의 진리다.
실제로 프리드리히 역시 사자공이 어린 나이에도 능력과 수완을 발휘하자 그를 건드리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아웃로 역시 그동안 명분을 쌓고 쌓아 터트린 것에 불과했고.
“자수성가의 대명사인 자네가 그렇게 얘기하니 당황스럽군.”
물론 그렇게 얘기하는 것치고 사자공의 표정은 누가 봐도 기뻐 보였다. 사실 사자공은 나에 비하면 여러모로 조건이 좋긴 했다.
귀족, 공작, 넓은 땅, 선제후, 벨프가.
이 모든 것들은 그가 범접할 수 없는 금수저임을 알려주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업적을 평가절하할 수는 없었다.
삼국지에서 조조가 유비에 비해 시작 조건이 좋았다고 조조를 깎아내리지는 않잖은가.
사실 하인리히 사자공이 없었다면 한자동맹도 탄생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한자동맹이 성립되어 중심지가 될 도시와 영토를 점령해서 기틀을 닦아둔 건 사자공이었으니까.
난 개인적으로 사자공이 황제가 됐다면 신성로마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라는 불명예스러운 평가를 듣지 않았을 것이며 강력한 힘을 지닌 제국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실제로 사자의 비상이나 벨프가의 부흥과 같은 퀘스트를 하면서 호엔슈타우펜 가문을 실각시키고 사자공을 황제로 만들면 그렇게 되기도 했고.
어쨌건 잡설이 길어졌는데 여전히 북부에는 야만인들이 남아있었고 난 오토와 함께 그들을 몰아내며 북부를 안정시킬 생각이었다.
물론 사자공이 한번 쓸어버리긴 했지만 정복이라는 게 그냥 군대로 한번 우르르 짓밟고 깃발을 꽂는다고 온전히 자국의 영토가 되는 게 아니잖은가.
실제로 게임에서도 이민족들을 몰아내고 땅을 먹어도 일정 시간 동안 저항에 부딪힌다. 헌데 실제라면 얼마나 더하겠는가.
위촉오의 삼국지 시대도 지도상에 나오는 영토와 실제로 다스리는 범위는 달랐다. 이처럼 이 근방의 영토가 작센 공국의 땅이긴 했지만, 이는 단순히 영향력이 닿는 범위라고 생각하는게 편했다.
더 큰 문제는 사자공의 힘이 약해진 지금 도망쳤던 이민족들이 다시 슬금슬금 돌아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난 그런 영토들을 다시 한번 정복해 온전히 작센의 영토로 만들 생각이다.
“일단 오토를 함부르크로 보내서 주변부터 휘어잡도록 하십시오. 함부르크 정도면 엘베강 하구와 연결된 데다 하노버에서 그리 먼 곳도 아니니 다스리기에 괜찮을 겁니다.”
“자네는?”
“전 뤼벡으로 갈 겁니다. 일단 덴마크와의 국경선부터 확실하게 정리해놓고 야만인들을 때려잡으며 동진할 겁니다.”
“뤼벡은 더 이상 안전지대가 아니네. 언제든지 바이킹들에게 공격당할 수 있어.”
“어디는 안 그렇겠습니까?”
“그건 그렇네만 차라리 오토를 도와 함부르크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는 게 좋지 않겠나?”
“그건 사자공께서 해주셔야지요. 저는 어디까지나 보조일 뿐입니다. 작센을 저에게 가져다 바칠 생각이 아니라면 어디까지나 주체는 벨프가가 되어야 합니다.”
내 말에 사자공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마 내가 도움의 대가로 작센의 일부를 요구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솔직히 탐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작센은 지금의 내게 계륵과 같은 땅이다.
내가 공작이란 작위에다 용담공이란 별칭으로 불리며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칼리나와 검은 용군단, 그리고 제노바와 같은 혈맹들이 나를 뒷받침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 북부에서 기득권층이라고 할 수 있는 작센을 지배하기에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았다. 명분도 없는데 덥썩 삼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거기에 함대를 육성하려면 뤼벡만 한 곳이 없잖습니까?”
함부르크도 나쁘진 않지만 그쪽은 지랄 맞은 북해와 접하고 있는 데다 발트해로 넘어오려면 덴마크의 영토를 거쳐야 한다. 그러니 선택지는 오직 뤼벡뿐이다.
“설마 자네 여기서도 해적질을 할 생각인가?”
“해적질은 아니어도 덴마크의 함대를 막아낼 정도로는 육성해야겠지요.”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은 여전히 신성로마제국과 잉글랜드, 프랑스의 해안지대를 돌아다니며 마음껏 약탈하고 다녔다.
이들은 한국사에 대입해보면 고려말의 왜구와 비슷했는데 사실상 이들은 막아내는 건 거진 불가능했다.
정규군급의 전투력과 무장을 하고 있는 데다 어디로 어떻게 언제 올지 알고 방어를 한단 말인가. 애초에 제한된 병력으로 해안가 전부를 방어하는 게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다른 해안선을 포기하거나 비워두고 뤼벡에 힘을 집중시킬 생각이었다. 함대 육성이 완료되는 대로 덴마크에 상륙해서 한번 조지고 나면 저기도 느끼는 바가 있겠지.
다만 이는 아직 먼 훗날의 얘기고 당분간은 주변을 장악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여전히 정복지의 치안은 좋지 않았고 개화되지 않은 야만인들이 널리 퍼져 살고 있었으며 몇몇은 설원도적이 되어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정착은 가능하겠나? 바이킹 출신인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북부는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은 아니네.”
그 말대로 북부는 어디건 사람 살기 힘든 동네였다. 추운 날씨로 겨울에 고통스러운 건 물론이고 제대로 된 농사도 안돼서 생산량이 바닥을 치는데다 눈이라도 쏟아지면 이동 자체가 제한됐다.
괜히 조선시대에 피똥 싸며 4군 6진을 개척하고도 유지하는 게 힘들어서 폐지한 게 아니었다.
“제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습니다.”
북부의 가혹한 환경은 내게도 부담스러웠지만 이때를 위해서 남부에서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공돌이 3인방을 데려온 게 아니던가. 원래 공돌이는 갈아야 제맛이다.
거기에 소빙하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가 되면 이곳의 가치는 이전과 비교를 불허할 정도로 높아질 것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약간의 불편함 정도는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었다.
“뭐, 자네라면 그럴 것 같긴 하군. 아무튼 필요한 게 있으면 사양 말고 요청하게. 힘닿는 선에서 최대한 도와주겠네.”
“알겠습니다.”
* * *
[작센 공국 최북단 ― 뤼벡]
“허… 시팔… 참.”
처음 뤼벡에 도착해서 주변을 둘러본 내 감상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 정도로 뤼벡의 상태는 엉망이었다.
그래도 인게임에선 기본적인 시설은 있었다. 왜… 그 별들의 전쟁이라는 게임을 하면 그래도 일꾼 4마리와 커맨드 센터는 주어지지 않던가.
근데 여기는 그런게 하나도 없었다. 성은 반쯤 박살 나 있었고 성 외부의 주택들은 잿더미가 된 지 오래였으며 논밭은 실시간으로 화끈하게 불타오르고 있었고 군데군데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이 참상에 고드프리는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바닥에 널브러진 병장기들과 죽어있는 시체들에 난 상흔을 확인하고 곧장 흉수를 파악해냈다.
“바이킹들이 급습한 모양입니다.”
“돌겠군.”
내가 급습해서 적의 도시를 불태우고 조질 때는 참 신났는데 그걸 그대로 당하니 기분이 참 더럽다.
어쩐지 사자공 그 양반이 계속 함부르크로 가는 게 좋지 않냐고 얘기하긴 했는데 이게 그런 것 때문이었군.
“요한나는 살아있는지 모르겠군.”
그때 요한나가 뤼벡과 비스마르를 두고 거점을 고민할 때 비스마르를 추천해줬는데 잘한 일이었던 것 같다. 뤼벡을 털었으니 굳이 비스마르까지 털지는 않겠지.
“고드프리 경. 먼저 병력을 이끌고 내부로 들어가서 혼란을 수습해 주십시오.”
“공작 전하께서는 어쩔 생각이십니까?”
“일단 주변을 둘러보며 정황을 파악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몸조심하십시오.”
내가 대열에서 이탈하자 눈치껏 호위대와 힐데, 이비, 그리고 새롭게 부관에 임명된 필리프가 내게 따라붙었다.
“본격적인 겨울이 오기 전에 급습을 한 모양이군.”
일종의 겨울나기다. 곰이 겨울잠을 위해서 식량을 비축하고 살을 찌우는 것처럼 바이킹들 역시 그럴 터였다.
문제는 털린 쪽이었는데 다행히 내가 가져온 물자와 사자공에게 지원을 받으면 무사히 이번 겨울을 날 수 있을 것이다.
오자마자 지출에 속이 쓰렸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곳을 거점으로 삼아야 할 텐데 다 굶어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은가.
거기에 내가 바이킹인 건 지나가던 개도 알고 있을 텐데 자칫 잘못하면 주민들에게 나에 대한 적대심이 생길 우려가 있었다.
“추적하실 겁니까?”
필리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추적하면 뭐 하겠나? 흉수는 이미 명확하고 본거지를 확인한들 병력을 끌고 탈환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말의 갈기에 쌓인 눈을 가볍게 털어주며 한마디 덧붙였다.
“일단 이쪽도 월동 준비를 하면서 전열을 정비해야겠지. 복수는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네.”
세상 그 어떤 군대도 겨울에 전쟁을 치르진 않는다. 물론 정신 나간 놈들은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죄다 그 최후가 좋진 않았다.
핀란드를 조지는 데 얼마 안 걸릴 거라 생각한 소련은 겨울에 전쟁을 벌였고 수십만의 죽음으로 오판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나치 독일 역시 기세 좋게 동부로 진군했지만 소련의 추위와 라스푸티차를 이기지 못하고 패퇴해야 했다.
“어떻게 잡을 생각이십니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나만의 방법을 사용할 생각이네.”
나는 말을 마친 뒤 내 앞에 둥둥 떠 있는 퀘스트 창을 바라보았다.
[수주 가능한 퀘스트 목록]
1. 야만인 마을 약탈
2. 야만인 포로 획득
3. 야만인 부족 간 분쟁 해결
4. 야만인 교화
5. 야만인 족장 암살
솔직히 지금까지는 퀘스트를 할 필요가 없었는데 귀찮아서가 아니라 퀘스트의 효율이 더 안 좋았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연봉이 더 높은데 굳이 사장한테 가서 내 연봉을 최저시급에 맞춰달라고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여기는 최저시급도 안 나올 동네였기에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퀘스트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현재 나와 있는 퀘스트가 나름대로 효율이 괜찮다는 점이었다.
거기에 퀘스트를 깨는 방법은 자유였고 어떻게 해결하고 어떤 성과를 거두냐에 따라 보상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고인물인 내 지식을 이용하면 빠르게 북부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