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나는 일주일간 뉘른베르크가 머물며 상황을 살폈고 내가 뿌린 씨앗이 제대로 뿌리를 내린 건 물론이요, 쑥쑥 커가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사실 이런 상황을 의도한 건 맞지만 황제가 결단력이 있는 건지, 아니면 가문의 중흥을 위해서 자식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건지 황제는 거리낌 없이 필리프를 희생양으로 점찍었다.
그 냉철함에 헛웃음이 나올 정도였지만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애초에 자기 자식을 잠재적 적이라고 할 수 있는 내게 보낸 것만 봐도 견적이 나오지 않던가.
거기에 프리드리히가 황권 강화에 얼마나 목을 맸는지, 사자공의 숙청에 실패한 이후 무너져가는 호엔슈타우펜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니스에 있는 나조차도 알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아무튼, 덕분에 나는 수월하게 정국을 주도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어쩌면 황제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가 될지도 모르지.
제국의 3대 기둥이라고 불리는 사자공의 벨프 가문과 프리드리히의 호엔슈타우펜 가문, 칼리나의 카노사 가문을 내 손안에 넣고 마음대로 휘두른다면 그게 곧 황제 아니겠는가.
물론 내 태생이 야만인인 이상 올라갈 수 있는 자리에는 한계가 있고 비선실세에 만족해야겠지만 말이다.
사실 황제도 내가 하려고 하면 안 될 것도 없지만… 당장 대한민국의 대통령에 흑인이나 백인, 하다못해 일본인이나 중국인, 동남아 태생의 사람이 대통령이 된다고 하면 당장 다 들고 일어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보다 더 보수적인 중세는 말할 것도 없겠지. 아마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끊임없이 반란이 일어날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내 무덤이 파헤쳐질지도 모르고.
아무튼, 이건 먼 훗날의 얘기고 지금 당장 필리프를 통해 뭘 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북부로 데려가서 좀 키워놓을 생각이다.
창공을 날며 하늘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독수리도 어린 새끼일 때는 고양이에게 물려 죽는 게 현실이다.
다행히 본인도 여기 남아있어봤자 죽는다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는지 내가 슬쩍 내민 동아줄을 붙잡는 걸 보면 눈치는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눈치라도 없으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수도 없었겠지만.
* * *
내가 뉘른베르크에 거진 일주일이 넘게 머무르는 동안 황제는 의도적으로 날 만나주지 않았다.
물론 서로 간에 정무가 바빠서 그랬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도지사나 서울시장… 뭐 그런 급의 인물이 청와대에 왔는데 대통령이 안 만나주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던가.
그 때문에 황제는 내가 뉘른베르크를 떠나기 전날에서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안에서 무슨 내용이 오갈지 모르니 황제는 홀로 오라 얘기했고 그 말대로 식당에는 호위기사들조차 없었다.
“어서 오게. 라그나르 공작.”
정갈하면서도 진귀한 음식들로 가득 찬 식탁의 반대편에 황제는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는 자신의 잔에는 와인을, 내 잔에는 맥주를 가득 따라주었다.
“자네가 맥주를 좋아한다고 해서 특별히 맥주를 준비했다네.”
“폐하께서 제 취향까지 세심하게 고려해주실 줄은 몰랐군요.”
“하하하, 내가 내 사람을 챙기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내 사람이라… 처음부터 대놓고 무리수를 던지고 있네. 아마 저런 식으로라도 행복회로를 돌리면서 자신의 불안감을 날려 보내고 싶은 게 아닐까?
“허면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음식에 죄는 없었고 황제가 따라준 시원한 맥주는 절로 탄성이 나올 정도였다.
“제법 맛이 괜찮군요.”
“맥주 맛을 잘 모르는 내가 먹어봐도 괜찮더군. 나중에 몇 통 싸주도록 하겠네.”
“감사합니다. 실은 저도 여기에 들르는 김에 황제 폐하께 건네드릴 선물을 가져왔는데….”
그렇게 나는 황제와 술 이야기를 하며 30분 이상의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저쪽도, 이쪽도 서로 원하는 걸 아는데도 이렇게 계속 헛소리나 하는 걸 보면 시간이 아까웠지만 원래 회담이라는 게 그렇지 않던가.
그렇게 어거지로 알고 싶지도 않은 황제의 애완동물의 근황까지 알고 나서야 그는 본격적인 의제를 꺼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자네가 북부로 올라가는 것 말일세. 단순히 그냥 관광이나 여행, 아니면 임무를 맡아 올라가는 게 아니라 아예 북부에 말뚝을 박기 위해 올라가는 거라지?”
“그렇습니다.”
“괜찮다면 이유를 알 수 있겠나?”
“제가 말씀드리면 믿어주실 겁니까?”
“난 언제나 자네를 믿어 왔다네.”
믿기는 개뿔. 그렇게 믿어준다는 놈이 자기 아들을 인질 겸 스파이로 보내? 필요도 없는 공작위까지 줘서 칼리나와 반목시키려 하고?
“허면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천공신 오딘께서 제게 신탁을 내리셨고 그 신탁을 위해서 북부로 가는 겁니다.”
“…재밌는 농담이군.”
“제 말을 믿고 안 믿고는 폐하의 자유입니다만 제가 드릴 수 있는 말씀은 그게 전부입니다.”
“신탁이라니 흡사 고대 그리스 신화의 이야기라도 듣는 것 같군. 혹시 괜찮다면 신탁의 내용을 알 수 있겠나?”
“별거 아닙니다. 덴마크의 왕위를 찬탈하고 수많은 이들을 죽이며 폭정을 일삼는 에릭 블러드엑스를 발할라로 보내는 것. 그게 오딘께서 제게 내리신 신탁입니다.”
“신께서 내리시는 신탁치고는 꽤 구체적이군.”
원래 신탁은 이 새끼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싶을 정도로 난해하게 내려오는 게 대부분이다. 말이란 게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인데 신탁은 ‘우웨으엥으아’ 뭐 이런 식으로 내려오고 알아서 해석하라는 게 대부분이니까.
“물론 제가 신탁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부분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어떤 과정을 거치든 에릭을 죽여야 하는 결과는 같습니다.”
내 경우는 신탁이라기보단 메인 퀘스트이긴 했지만. 어쨌건 메인 퀘스트는 바이킹의 왕국을 건설하라 명하고 있었고 그를 위해서 에릭은 반드시 죽어야 했다.
“라그나르. 혹시 그 신탁에 사자공과도 만나라는 얘기도 적혀있던가?”
“오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건 아니지만 협약을 맺을 때 군사 및 물자 지원을 받기로 했으니 만나긴 하겠지요.”
“내가 무슨 의도로 이 말을 꺼냈는지 알고 있지 않나?”
“글쎄요. 폐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북부로 가는 건 오딘께서 내리신 신탁 때문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물론 황제는 전혀 믿는 눈초리가 아니었기에 나는 그가 기분 나쁘면서도 납득은 할 만한 이유를 대주기로 했다.
“허면 폐하. 이전에 제가 왜 폐하의 강압에 가까웠던 부탁을 들어준 거라 생각하십니까?”
“강압? 내가 자네에게 강압적으로 뭔가를 부탁했다고?”
황제는 난생처음 듣는다는 얼굴로 되물었고 그 모습에 난 그저 웃고 말았다. 이게 가해자는 기억 못 해도 피해자는 기억한다는 뭐 그런 건가?
“저를 폴란드에 보내셨던 것 말입니다. 솔직히 그때 전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이었습니다. 칼리나가 제 뒤에 있는데 제가 뭐가 무서워서 폐하의 명령을 따르겠습니까?”
그 순간 황제의 얼굴이 똥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지만 나는 모르는 척 말을 이었다.
“설마 해서 하는 얘기지만 폐하께서 명령을 내리면 제가 무조건 들을 거라 생각하신 건 아니겠지요? 그때 궁정백을 통해서 한번 말씀드린 것 같은데… 콘라드 경이 직무유기를 한 모양입니다.”
“…설마 지금 폴란드에 간 게 내 명령이 아니라 신탁 때문에 갔다고 얘기하는 건가?”
“예. 폴란드로 가서 하랄 블로탄을 구원하는 것. 그게 오딘께서 제게 내리신 신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자네 얘기를 정리해보자면… 오딘의 신탁으로 폴란드로 가서 리보니아 기사단을 쳐부수고 하랄 블로탄을 구원했으며, 이제 그의 왕좌를 되찾아주기 위해 그대가 이룩한 모든 것들을 버리고 북부로 올라간다 뭐 그런 말인가?”
“정확하십니다. 과연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폐하시군요.”
“지금 그걸 믿으라는 건가? 고작 신탁 때문에 모든 걸 포기한다고?”
“폐하의 종교에 대한 믿음 자체는 둘째 치고 이미 십자군이라는 전례가 한 번 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내 말에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십자군 자체가 멍청한 짓이긴 했다. 그놈의 성지가 뭐라고 수많은 돈과 인력을 투자한단 말인가?
물론 이 시대의 종교는 현대의 종교와는 조금 궤를 달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 자체가 정신 나간 짓이기는 했다.
“알겠네. 자네의 그 종교에 대한 믿음과 신념이 영원히 변치 않기를 빌고 있겠네.”
그런 것치고는 억지로 내 말을 믿어준다는 뉘앙스가 강했는데 어쩔 수 없었다.
황제가 내게 듣고 싶었던 건 오딘이니 신탁이니 하는 것보다 사자공과 함께 헛짓거리를 하지 않겠다는 확언이었을 테니까.
* * *
미묘한 얼굴로 자신의 아들인 필리프와 내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는 황제를 뒤로한 채, 나는 계속해서 북부로 이동했다.
슬슬 겨울이 다가오고 있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북부로 올라와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전에 비해 물씬 추위가 느껴졌다.
“그나마 눈이 안 와서 다행이군.”
“동의합니다. 가도에 눈이 와서 진창이 되면 저 짐들을 전부 손으로 옮겨야 되는 불상사가 나올지도 모르니까요.”
힐데의 말에 나는 입김을 내뿜으며 가도를 바라보았다. 도로는 깨져있었고 인도와 차도는 구분되어 있지 않았으며 관리가 안 돼 있는 건지 잡초가 무성하게 나 있었다.
본래 하노버 인근의 가도는 잘 정비되어 있던 걸로 아는데 사자공이 황제에게 영혼까지 털린 뒤로 제대로 정비를 못 한 모양이다. 아니면 혹시 모를 황제의 진군을 늦추기 위해서 일부러 정비를 안 한 걸지도 모르고.
이유가 어쨌건 눈이 와서 도로가 진창으로 변하는 순간 사기가 터지는 것은 물론이요 여기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기에 나는 행군 속도를 높였다.
다행히 눈이 내리는 일은 없었고 와도 비가 조금 내리는 정도였기에 우리는 큰 문제 없이 하노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미리 우리의 도착을 알리는 전령을 보내놨기에 사자공은 이례적으로 성 밖까지 나와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아마 나보단 나와 함께 오는 엄청난 양의 물자들이 더 보고 싶었겠지. 겨울은 모든 인간에게 가혹한 계절이지만, 북부에선 특히나 더 가혹하니까.
아무튼, 이쪽도 공짜로 주는 건 아니고 거래를 할 생각이기에 처분은 요한나 레비아탄에게 맡기기로 했다. 지금쯤 전령이 당도했을 테니 꽁지가 빠져라 달려오고 있겠지.
“날이 추운데 안에 들어가서 얘기하도록 하지.”
“아드님과 먼저 얘기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어차피 북부로 올라왔으니 한동안 계속 보지 않겠나? 그보단 라그나르 공작 전하와 만남의 시간을 가지는 게 더 유용하지 않겠나?”
생각지도 못한 그의 말에 나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사자공 전하도 알게 모르게 아부가 느셨군요.”
“어쩌겠나. 여기서 목숨 붙이고 살려면 자네에게 아부라도 해야지. 그걸 아니까 지난번에 나를 꼭두새벽에 불러낸 거 아니던가?”
“하하, 혹시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까?”
그때 그를 새벽 두 시에 불러냈던 건 누가 갑이고 누가 을인지, 그에게 확실히 알려주기 위함이었는데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확실히 각인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사자공 전하. 이전에 저와 나눈 이야기를 기억하십니까?”
“뭘 말인가? 자네는 다 좋은데 그렇게 핀트 없이 얘기를 해서 문제라네. 내가 자네와 대화를 나눈 게 워낙 많았어야지.”
“오토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 말입니다.”
그 순간 사자공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더니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고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젠장. 자네는 담이 큰 건가 아니면 생각이 없는 건가? 빌어먹을. 그러니 용담공이라는 호칭이 붙었겠지만….”
“반응을 보니 잊지 않은 모양이시군요. 그때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