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화
밀라노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계속 병력을 이끌고 북상했다.
추리고 추렸음에도 꽤 많은 수의 인원이 이동하다 보니 중간중간 물자를 보충해줘야 했는데 황제가 머무는 뉘른베르크는 물자를 보급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물론 황제가 날 초대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냥 무시하고 올라가기에는 뒷맛이 안 좋았다. 남들이 보기에도 썩 좋아 보이지 않을 테고.
“필리프. 괜찮으면 휴식도 취하고 물자도 보충할 겸 뉘른베르크에 며칠 머물 생각인데 자네가 가서 황제 폐하께 여쭤보고 올 수 있나?”
“사흘 정도 머문다고 보고하면 되겠습니까?”
“사흘… 뭐, 그 정도면 충분하네.”
“알겠습니다.”
사실 내가 가도 됐지만 아직 황제와 얼굴을 마주치기에는 조금 껄끄러웠고 틈틈이 뿌려뒀던 씨앗이 얼마나 컸는지 알아보기 위해선 필리프를 뉘른베르크에 보내야 했다.
* * *
<신성로마제국 ― 뉘른베르크>
“필리프가 전령으로 오고 있다고?”
“그렇습니다. 폐하.”
궁정백인 콘라드의 대답에 프리드리히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최근 들어 자신은 자신이 쌓아온 것들이 무너지지 않게 만드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뜬금없는 라그나르의 북상은 황제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냥 북부로 관광 겸 여행을 갔다 오는 거라면 상관없지만 그는 자신의 모든 기반을 버려둔 채 그곳에 정착할 생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물론 그마저도 야만인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흘려넘길 수 있었지만 그러기엔 북부에 머무는 사자공이 거슬렸다.
이미 하인리히는 발톱과 이빨이 빠진 사자이기는 했지만, 라그나르는 그 빠진 이빨과 발톱을 다시 나게 해 줌은 물론 날개까지 달아줄 수 있는 인물이었다.
“자네가 생각할 때 왜 라그나르가 북부로 이동한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북부에 가야만 하는 일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러겠지. 그런데 대체 거기에 뭐 주워 먹을 게 있다고 니스를 내팽개치고 올라가는지 모르겠군. 야만인 놈들도 거기서 못 살겠다고 남하하는 판국인데 말이야.”
북부가 농사도 제대로 못 짓는 똥덩어리 같은 땅인 거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반면 자신이 선심 쓰듯 건네준 니스는 그 초라했던 과거를 극복하고 지금은 제국 남부의 주요 도시로 성장하고 있었다.
제노바는 말 그대로 돈을 쏟아붓고 있었고 라그나르는 생각 외로 뛰어난 정치력을 발휘해서 도시를 끊임없이 발전시켰고 그 결과 현재 니스는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자공과 모종의 약속을 한 게 아니겠습니까? 여러 소문들이 낭설처럼 떠돌고 있지만 제가 생각할 때 그게 가장 그럴듯한 추측 같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라그나르에 관해선 수많은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바이킹, 야만인, 오딘의 화신, 하이르 앗 딘 참살자, 용담공, 야만공.
물론 야만공 같은 호칭들은 멸칭이나 다름없었지만, 요점은 제국의 모두가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얼마 전 그가 함대를 일으켜 베네치아와 전쟁을 벌일 때 제국이 얼마나 들썩였던가. 혹자는 그가 베네치아를 상대로 무리한 짓을 한다며 고개를 흔들었고, 혹자는 그가 얼마나 처참하게 패배할지를 예언했다.
하지만 그는 베네치아를 상대로 완벽히 승리함으로써 자신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그런 그의 활약을 보며 자신도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시칠리아 왕국을 점령하고 근방의 도시 국가들을 점령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허망한 꿈을 꾸었을 정도니까.
아무튼, 그런 그가 북부로 둥지를 옮긴다고 하니 수많은 소문이 떠돌았는데 그중 황제의 신경을 건드리는 소문이 한 가지 있었다.
“사자공과 손을 잡는다는 것 말이군. 하지만 왜 지금 와서?”
만약 사자공과 손을 잡을 거라면 하노버에서 대립할 때 자신을 매장시켜버리는 게 더 낫지 않았겠는가?
물론 외국의 군대를 끌어들였다면 비난이 작렬할지도 모르지만 그러기엔 그들이 동원한 병력의 숫자가 너무나도 압도적이었다.
“어쩌면 사자공이 아니라 그의 아들인 오토를 밀어주려는 것일지도 모르지요. 최근 필리프를 니스에 처박아뒀던 것과는 다르게 오토는 부관으로 임명해서 계속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라그나르가 사자공의 권력 세습을 도와주려고 한다 이 말인가?”
만약 라그나르의 목적이 오토가 작센에서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도와주려는 거라면 그를 데리고 다니며 가르친 것도 이해가 간다.
“예. 이미 폐하께 굴복하고 바이에른까지 뺏긴 사자공의 입지는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그나마 이곳 작센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펼치고 있었기에 휘하 귀족들이 이탈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만….”
“그러니 본인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동안에 라그나르를 이용해서 기반을 다시 확고히 한다 이 말이군. 북부에는 아직 야만인들도 남아있으니 오토와 함께 그들을 정벌하며 명성과 실전경험도 쌓고 말이야.”
“예. 그게 가장 그럴듯하면서도 신빙성 있는 추론이라 생각됩니다.”
말로는 추론이라 했지만 거진 확신하듯 이야기하는 콘라드의 모습에 황제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만약 오토가 작센을 확실히 휘어잡고 제2의 사자공이 된다면 호엔슈타우펜에게 있어 두고두고 걸림돌이 될 것이다.
“재정비를 마친 벨프가와 그를 지원하는 라그나르, 칼리나를 동시에 상대한다고 생각하면… 상상만으로 끔찍하군.”
라그나르야 일신의 무력으로 공작위까지 오른 인물이니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칼리나 역시 스스로의 능력으로 망한 가문을 일으켜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더군다나 이번에 선제후의 자리까지 받아냈기에 칼리나는 북부의 귀족들에 비해 더 이상 꿀릴 게 없었다.
라그나르 역시 남부에서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한 데다 칼리나와 결혼한다면 더 이상 그의 출신이 발목을 붙잡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눈앞의 콘라드 역시 자신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 모양이었다.
“만약 라그나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폐하께서도 슬슬 준비를 하셔야 합니다. 당장 폐하가 살아계실 때라면 문제가 없지만 돌아가시고 나면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당장 눈앞에 분열되는 제국과 갈가리 찢기는 호엔슈타우펜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기에 황제는 무거운 표정으로 한숨을 내뱉었다.
“슬슬 하인리히에게 권한들을 넘기라는 얘기군.”
“예. 또한 단순히 권력을 이양하는 것을 넘어서 정적들도 확실히 제거하셔야 합니다.”
사실 자신과 사자공, 벨프가와 호엔슈타우펜은 상황이 비슷하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최근 몇 년간 황제의 자리를 호엔슈타우펜이 독차지하고 있다 보니 정적들이 많이 생겼고 거기에 대한 대항마로 사람들이 벨프가를 밀고 있는 판국이었다.
그 때문에 오토라는 구심점을 필두로 재정비만 끝마치면 되는 벨프가와 다르게 호엔슈타우펜은 황제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까지 쳐내야 했다.
거기에 최근 얻어낸 바이에른은 자신에게 충성을 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지금이야 납작 엎드려서 숨죽이고 있다지만 자신이 죽은 뒤에도 그럴 거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그게 쉬운 일은 아니잖나.”
“필리프 경이 있잖습니까.”
그 말에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정적들 중에는 호엔슈타우펜 그 자체에 학을 떼는 이들도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 즉 자신을 싫어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렇다고 벨프가나 다른 이들에게 힘을 얹어주는 건 아닌, 크게 보면 범호엔슈타우펜 파벌이라고 봐야 할 이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있어 자신이 선택한 하인리히가 아닌 필리프는 굉장히 이상적인 대체품이었다. 라그나르의 휘하에서 종군했기에 능력이 검증됨은 물론 그와의 친분은 무시하지 못할 자산이었다.
거기에 최근 계속 라그나르의 휘하에 있었기에 필리프의 정치적 기반은 아무것도 없었다. 황태자로서 자신만의 세력을 키워가던 하인리히와는 굉장히 대비되는 상황이었는데 이는 훗날 필리프가 황제가 됐을 때 그들이 원하는 대로 주무르기 편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했다.
“필리프를 이용해서 그들을 싹 쓸어버리자는 말이군. 그 대가로 필리프는 하인리히를 위한 발판이자 희생양이 되어야 할 테고.”
황제의 질문에 콘라드는 대답하지 않았고 침묵은 긍정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좀 더 논의하도록 하지. 그리고 필리프에겐 라그나르 공작이 이곳에 체류하는 걸 허락한다고 전해주게.”
물론 말은 저렇게 하지만 콘라드는 황제가 어떤 선택을 할지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더 이상 조언하지 않고 조용히 그의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아마 황제가 결정을 내린 이상 필리프는 어떤 결정을 내리더라도 본인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때때로 사람은 무얼 하지 않아도 그 신분만으로 불합리함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으니까.
* * *
필리프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묘한 느낌을 받았다. 아니, 처음에는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지만 이곳에 머무는 시간이 사흘을 막 넘어가는 때부터 뭔가 찝찝함을 느꼈다.
거진 일 년 만에 복귀한 뉘른베르크다. 이전부터 라그나르 공작에게 종군한 걸 포함하면 거진 3년 만에 돌아왔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많이 보지 못했다.
물론 정무가 바빠서 그런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자식이 돌아오지 않았던가. 얼마 뒤에 이곳을 떠나면 그땐 정말 언제 볼지 모르는데도 의도적으로 자신과의 만남을 피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아버지가 의심이었다면 본인의 형인 하인리히는 확신이었다. 어떻게 틈을 내서 대화를 하거나 함께 식사를 해보려고 해도 자신의 형은 자신을 만나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와 함께 자신을 향한 적대적인 시선도 많이 느껴졌다. 물론 이랬거나 저랬거나 자신은 라그나르의 휘하에 종군하고 있으니 그런 시선이 쏟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솔직히 저런 시선을 받는 것에 대해 억울한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었다.
문제는 평생 친하게 지낼 거란 생각도 못 해본 이들이 자신과 어떻게든 만나기 위해 애를 쓰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통해 라그나르 공작과 연줄을 만들려는 속셈이 아닌가 싶었지만 그들의 목적은 자신이었다.
그들은 온갖 선물과 감언이설로 자신을 꼬드겼고 필리프는 뜬금없는 현 상황에 의문을 품었다. 대체 저들은 왜 자신과 친하게 지내려는 것일까? 이미 끈 떨어진 신세인 자신에게 대체 뭘 바라고?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필리프는 뭔가 께름칙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절정에 달했을 때쯤 라그나르 공작이 자신을 찾아왔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이 건넨 와인을 병째로 들이켰고 반쯤 비우고 나서야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필리프. 이제 나는 다시 북부로 떠날 생각이네. 그러기 전에 날 위해 고생한 그대에게 한 가지 포상을 내려줄까 하는데… 어떤가?”
“무엇을 주시든지 감사히 받겠습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내가 자네와 오토를 휘하로 두는 기간이 5년이었지. 그렇지 않나?”
“에. 그렇습니다.”
“난 그 약속을 파기할 생각이네. 내가 올라가려는 북부는 너무 위험하고 그 때문에 혹여 그대가 불상사를 당한다면 내가 그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은가.”
라그나르의 말에 필리프는 직감적으로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그리고 이게 선택의 기로임을 느꼈다.
전반적으로 일이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진 못했지만 지금 뉘른베르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로 점철된 늪지대와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섣부르게 발을 내딛느니 차라리 눈앞의 라그나르 공작을 따라다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필리프는 자신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공작 전하. 저는 아직 공작 전하를 모시고 싶습니다.”
자신이 제대로 된 답을 골랐는지 라그나르는 재밌다는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 생각이 그렇다면야… 허면 북부에서 오토를 대신해 자네를 내 부관으로 삼을 테니 그렇게 알고 있게.”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