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나는 얌전히 도제를 따라갔고 이내 두 개의 무덤 앞에 도착했다. 죽은 지 오랜 시간이 흘렀을 텐데도 그들의 무덤에는 많은 이들이 모여서 그 죽음을 추모하고 있었다.
둘 다 패배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런 대접을 받는 걸 보면 정치적인 위상이 꽤 대단했나 보다. 아니면 도제가 의도적으로 그들을 영웅으로 포장했거나.
뭐, 도제가 죽은 자들을 어떻게 써먹을지는 알 바 아니다. 나도 죽은 자들의 시체까지 이용하다 못해 능욕까지 했으니까.
아무튼, 갑작스러운 도제의 방문에 참배객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다가 그 뒤에 서 있는 나를 보고는 분노로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굳이 누군지 물어보지 않아도 살아 돌아온 이들에게 내 인상착의를 들었겠지. 교황청의 직속부대인 이단 심문관들의 호위를 받는 것만 봐도 내 정체를 유추할 수 있을 테고.
“이…이런 개자식! 여기가 어디라고 네놈이!!!!”
그리고 개중에 성격이 급해 보이는 사내는 분노를 터뜨리며 내게 달려들었지만, 그는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이단 심문관들의 주먹에 나가떨어졌다.
“쯧쯧. 묘지에선 조용히 고인을 추모하는 게 기본적인 예의라는 것도 모르나? 천박하군.”
“이, 이 야만인 자식이!!!”
내 모욕에 얼굴이 시뻘게진 사내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자 이단 심문관들 역시 검을 뽑아들었다.
사태가 여기서 더 악화되면 걷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조용히 지켜보던 도제가 슬쩍 끼어들어 우리 사이를 중재했다.
“헤르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라그나르 공작은 순수한 의도로 티에폴로와 마리노를 애도하러 온 것뿐일세. 그런 이에게 칼을 뽑아들다니! 자네 정말 미쳤나?”
“애도!? 본인이 마리노를 죽인 것도 모자라 시체를 능욕해놓고 감히 애도를 입에 담는다는 말입니까!?”
마리노와 가까운 사이였는지 사내는 처절한 목소리로 절규했지만 도제는 매서운 표정으로 그를 질책했다.
“그만하라고 했네. 어쨌거나 라그나르 공작은 평화사절로서 이곳 베네치아에 왔네. 이 이상의 외교적 결례는 전쟁을 지속하자는 얘기밖에 안 되네.”
“도제님! 마리노의 무덤이 저곳에 있지만, 관은 텅 비어 있습니다. 죽은 이의 시체조차 땅에 묻지 못했는데 종전 협정이라니요! 우리는 아직 싸울 수 있습니다!”
“헤르만! 나 역시 자식처럼 여기던 티에폴로를 잃었네. 그쯤 하게.”
특유의 카리스마로 분위기를 휘어잡은 도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라그나르 공작. 마리노 단돌로의 시신을 돌려줄 수 없나? 어차피 전쟁도 끝난 데다 솔직히 그 정도까지 했으면 충분하지 않나. 내 비록 단돌로 가문과는 정치적으로 대립했지만, 인간적으로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네.”
“글쎄… 엔리코 단돌로의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할 때 콘스탄티노플을 파괴하고 약탈하며 폐허로 만들었지. 도시 약탈도 인간적인 짓은 아니었던 걸로 아는데….”
“그래서 자네가 우리를 심판한다는 건가!?”
“그렇게 얘기한 적은 없네. 애초에 동로마가 멸망한 건 자기들이 병신 짓을 해서 멸망한 것 아닌가. 내가 하고 싶은 말의 요지는 힘이 없으면 당한다는 얘기야.”
“….”
대의를 위해 울부짖든, 자신의 신념을 주장하건 힘이 없으면 패자의 넋두리에 불과하다. 인간과 인간이 아닌,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에선 힘이 곧 정의니까.
“내 입을 닫게 하고 싶다면 말로만 떠들지 말고 힘으로 증명을 하게. 나는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승리로 나 자신의 가치를 증명했고 그대들을 하지 못했지. 그리고 지금 그대들은 패배의 대가를 감내하는 거고.”
“야만인다운 발상이군.”
헤르만인지 뭔지 하는 사내가 비아냥거렸지만 나는 들은 척도 안 하고 도제를 향해 말을 이어나갔다.
“말이 빙빙 돌았는데 시체는 내 손에 없네. 그 시체를 가장 원하는 자의 손에 들어가 있지. 나중에 재주껏 협상으로 얻어내 보게.”
“이피로스를 끌어들였나? 아니, 어쩌면 이피로스에서 먼저 손을 내밀었을지도 모르겠군. 그들은 언제나 우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썼으니까.”
“뭐 내가 그것까지 얘기해줄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충고 하나 하자면 서둘러야 할 거야. 부패한 시신을 꿰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테니까.”
차마 내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더 못 듣겠는지 사내는 들고 있던 검을 바닥에 내팽개친 뒤 신경질적으로 발을 구르며 묘지를 나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적대적인 눈빛으로 나를 보던 추모객들도 자리를 비웠고 사람들도 붐볐던 묘지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이제야 좀 제대로 추모하는 분위기가 만들어지겠군. 고인들도 기뻐하겠어.”
끝까지 비아냥거리는 내 모습에 도제는 질렸다는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용담공 자네도 그쯤 하게. 이 이상 우리를 도발하면 자네의 그 ‘순수’한 의도가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
“원한다면.”
나 역시 도발을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기에 가져온 조화를 한 송이씩 올려놓은 뒤 도제를 따라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물론 이동하는 중간에 날 알아본 시민들이 내게 욕설을 내뱉거나 계란을 투척하는 헤프닝이 일어났지만 대인배스럽게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돌 안 맞은 것만 해도 다행인 데다 저런 것까지 꼬투리 잡아서 지랄하면 그땐 진짜 평화협상이 물 건너가는 거다.
물론 싸우면 이기겠지만 이쪽의 손해도 막심할 테고 그렇게 승리해봐야 뭘 얻을 수 있겠는가.
괜히 국가들이 전쟁하면 적당히 배상금 받고 협상하는 게 아니다. 실제로 땅을 위해 싸우지만 그렇다고 거기에 사는 민간인들까지 전부 죽이는 건 아니잖은가.
그런 생각들을 하며 도제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그는 찬장에서 직접 와인병을 꺼내 빈 잔을 채워주었다.
날 옆에 끼고 다니는 것만으로 심력이 소모되는지 그는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폭삭 늙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뭐 서로 간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 필요한 말만 하지.”
“시원시원해서 좋군. 사실 우리가 그대들에게 평화협정을 위해 내거는 조건은 지난번과 크게 다를 바가 없소.”
어차피 베네치아에게 받아낼 수 있는 게 한정되어 있는 데다 이쪽에서 제노바에게 모든 협상 조건을 다 양보했기에 나나 아이유브가 할 건 없었다.
어차피 지금 내가 내거는 협상 조건도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물밑으로 협상을 한 결과물이었기에 서로 도장만 찍으면 되는 상황이었다.
따지고 보면 내가 이곳에 온 것도 정치적인 쇼에 불과하다. 베네치아인들에게 자신들이 패배했다는 것을 상기시킴과 동시에 제노바인들에게 자긍심과 고양감을 심어주는 것.
그게 이번 방문의 명확한 목적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나도 사람인데 굳이 패전국인 베네치아까지 와서 도발이나 능욕을 하고 있겠는가. 물론 반쯤은 날 이렇게 고생시킨 베네치아에 대한 분노와 복수의 의미도 있긴 했지만.
“크레타를 할양해 달라는 그 정신 나간 조건 말인가? 교역 품목을 일부 건네주거나 배상금까지는 가능하지만, 크레타 조차는 불가능하네.”
“그럼 안타깝지만 협상은 끝이야. 그리고 우리가 잡은 포로들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베네치아로 돌아오지 못하겠지.”
칼 같은 내 말에 도제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사람의 두손 두발을 묶어놓고 사인을 강요하는 걸 요새는 협상이라고 하는가 보군. 아니면 이게 바이킹식 협상인가?”
“그렇게 칭찬할 필요 없네. 원래 이런 건 그대들이 더 잘하는 거 아닌가? 그대들이 승리했다면 이런 치욕을 감내하고 있는 건 우리였겠지. 내 말이 틀린가?”
“…….”
“받아들이겠소?”
“…좋소.”
도제는 못 먹는 감 한번 찔러나 보겠다는 심정으로 트집을 잡아봤지만 본전도 못 찾게 되자 바로 꼬리를 내렸다. 처량한 표정을 짓고 있는 도제를 향해 나는 진심을 다해 위로의 말을 건넸다.
“힘들겠지만 힘내시오. 원래 사는 게 다 그런 것 아니겠소.”
“다른 건 모르겠는데 그대는 사람 신경 긁는 재주 하나는 타고난 것 같군. 혹시 날 혈압 올라서 죽이려는 게 변경백의 계획이오? 그렇다면 반쯤 성공했다고 전해주시오.”
그렇게 내가 베네치아를 방문한 지 단 하루 만에 협상은 마무리되었다. 베네치아는 우리가 내건 조건을 전면 수용하며 백기를 내걸었고 근 반년이 넘게 이어지던 전쟁은 위대한 승리와 함께 막을 내렸다.
* * *
베네치아와의 전쟁을 마무리 지은 나는 곧장 니스로 복귀해서 못다 한 일들을 마무리 지었다. 이제 이곳을 떠나면 한동안은 돌아오기가 힘들 것이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폴란드로 갔던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어느 정도 기반이 잡혀있던 니스와 주변에서 무제한에 가까운 지원을 받을 수 있던 것과 다르게 북부는 모두가 우리에게 적대적이며 제한된 지원밖에 받지 못할 테니까.
아마 거기서 제대로 자리를 잡으려면 몇 년은 걸릴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가 함부로 자리를 비우면 기반 자체가 휘청일 것이다.
물론 니스 역시 아직은 기반이 부족했다. 제대로 된 시스템이 정착되어 돌아가려면 몇 년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니스를 식물로 비유하자면 이제야 간신히 뿌리를 박고 싹을 틔운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그 때문에 고드프리와 리슐리외를 이곳에 남길 생각도 했지만 나는 그냥 그들도 데려가기로 했다.
북부같이 맨땅에서 모든 걸 이뤄야 하는 곳에서 행정력과 정치의 달인인 고드프리와 리슐리외를 놓고 오는 건 꽤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었으니까.
그 때문에 나는 날 대신해 이곳을 다스려줄 칼리나를 위해 수하들에게 인수인계를 철저히 할 것을 명령했다. 그렇게 수하들을 들들볶은 지 6개월이 흘렀고 난 마침내 겨울이 오기 전에 북부로 올라갈 준비를 끝마칠 수 있었다.
“참 길기도 길었어.”
내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이름을 이어받은 뒤 여지껏 쉼 없이 달려왔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다.
신성 중독에 걸린 몸은 여전히 날 괴롭혔고 이비의 증상 역시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덴마크와 노르웨이에는 여전히 에릭 블러드엑스가 군림하고 있었으며 메인퀘스트는 손조차 대지 못했다.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하기 위해 나는 라그나르의 고향이자 바이킹들의 근원지인 북부를 선택했고 이제 시간이 되었다.
추수를 끝마친 10월 중순. 나는 마침내 날 따르는 병력을 이끌고 북부를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사실 이전부터 내가 북상할 거라는 얘기는 제국 내에 꽤 여러 차례 떠돌았다.
내 입으로 여러 번 얘기하기도 했고 수많은 병력들이 대놓고 바쁘게 움직이는데 눈치를 채지 못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얘기겠지.
하지만 그 누구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는 못했는데 그들 입장에서 안정된 니스를 버리고 북부로 올라가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누군가는 내가 칼리나와의 권력싸움에서 밀려서 도망친다고도 했고 음유시인들은 오딘의 부름을 받아 가는 것이라 했으며 혹자는 내가 병에 걸려 죽을 자리를 찾아간다고 이야기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의 의문 섞인 눈길 속에서 나는 북부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밀라노에 도착했다.
그리고 난 그곳에서 칼리나를 만났고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내 손을 붙잡은 채 자신의 방으로 나를 이끌었다.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걷던 그녀는 자신의 방 앞에서 고개를 돌려 지긋이 날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동자에는 불안과 초조, 흥분이 담겨있었는데 그녀는 언제나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다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기 라그나르. 나 이 정도면 꽤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녀의 말에 의하면, 그리고 조금씩 돌아오는 내 기억에 따르면 칼리나는 8년, 거진 10년에 가까운 시간을 오직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걸 알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동문서답과도 같은 대답이었지만 그녀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처음 당신을 떠나보낼 때 했던 것 같은데.”
말을 마친 칼리나는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방문을 열고 나를 방 안으로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