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화
<로마 교황청>
종교적 지도자이자 신의 대리인이라는 교황은 지금 굉장히 골치 아픈 손님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자네가 한 말을 정리하면, 이제부터 베네치아를 조질 건데 도와달라 뭐 이런 건가?”
“말에 어폐가 있는 것 같군요. 교황 성하. 저는 그저 땅에 떨어진 대의와 부서진 정의를 집행하기 위해 교황청에 도움을 요청한 것뿐입니다.”
장황한 칼리나의 말이 끝나자 교황은 코웃음 치며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칼리나를 바라보았다.
“이보게 변경백.”
“예. 교황 성하.”
“지랄하지 말게. 자네가 대체 언제부터 대의니 정의니 이런 걸 챙겼나? 내가 아는 자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냉철하며 합리적인 여자였지.”
“절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으로 생각하고 계셨단 말입니까? 너무 슬프군요.”
“그래… 그런 자네가 그 라그나르인지 하는 야만인과 관련된 일에 한해서라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긴 했지만 말일세. 사랑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고 하던데 과연 진실인 것 같군.”
“무슨 생각으로 라그나르를 언급하셨는지는 모르겠군요. 교황 성하.”
순식간에 목소리를 깔며 냉기를 풀풀 날리는 칼리나의 모습에 교황은 라그나르라는 사내가 칼리나에게 있어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확신했다.
그와 동시에 후회도 들었다. 만약 그녀의 가문이 멸문했을 때 교황청에서 몰래 도움을 줬다면 그녀는 그녀의 선대인 카노사 백작이 그랬듯 교황청의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줬을 것이다.
“최근 그의 이름이 대륙을 진동시키고 있기에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일세.”
“교황 성하. 1084년을 기억하십니까?”
동문서답이라고 할 수 있는 대답이었지만 그 말에 교황은 입을 다물었다.
1084년. 노르만 출신의 정복자이자 시칠리아 왕국의 시조이며 로마 약탈자라고 불린 로베르 기스카르가 로마를 불태웠던 해.
왜 칼리나가 그 이름을 꺼내들었는지 깨달은 교황은 더 이상 라그나르에 관한 이야기는 물고들어가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지금 칼리나의 위세가 천지에 진동하고 있는데 그녀와 대립각을 세워서 좋을 건 없으니까.
“농담일세. 너무 그렇게 날 세우지 말게.”
“날이라니요. 저는 그저 로베르 기스카르가 1084년에 동로마와 베네치아의 연합함대를 격파한 일을 기억하시는지 여쭌 겁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검은 용군단과 제노바가 연합하여 베네치아를 박살 냈으니까요.”
“그래. 술탄 살라딘이 이끄는 아이유브까지 합세해서 말이지. 아주 뭐 신나게 두들겨 팼다고 하더군.”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대강 그럴 거라곤 알고 있었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저렇게 뻔뻔하게 대꾸하는 걸 보니 기가 찼다.
사실 증거가 없다 뿐이지 아이유브가 함께 싸우고 물자를 지원해주고 항구까지 대여해준 건 누구나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변경백. 내가 늙었다고 귀와 눈이 먼 건 아닐세. 정녕 발뺌할 셈인가?”
“교황 성하. 저는 분명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다고 얘기드렸습니다. 그렇게 계속 절 몰아붙이실 생각이십니까?”
여전히 모른 척하고 넘어가려는 칼리나의 모습에 호통치려던 교황은 칼리나의 귀기 어린 눈빛을 마주하고 말을 삼켰다.
저 미친년은 배알이 꼴리면 샤코 디 로마(로마 약탈)도 저지를 년이다. 아까도 1084년을 언급한 것만 봐도 그 의도가 뻔하지 않은가?
“뭐 좋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허나 기억하게. 이교도와 가깝게 지내서 좋은 꼴을 본 이는 없었네.”
“말이 안 통하는 짐승보다야 말이 통하는 이교도가 낫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번 일은 주제도 모르는 짐승을 훈육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나는 말이 통하는 기독교도였으면 좋겠군.”
진심으로 교황은 그러길 빌었다. 옆집에 통제 안 되는 살인마가 살고 있다는 건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으니까.
“오, 물론입니다. 교황 성하께선 이렇게 저와 대화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후… 알겠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그 자네의 대의니 정의니 하는 것들 말일세. 말하는 방법이야 다르지만 결과적으로 베네치아를 조지는 데 동참해달라는 얘기 아닌가?”
“교황 성하. 과거의 일이긴 하지만, 십자군이라는 이름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하고, 우리의 구원을 바라마지않던 자들을 공격한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머나먼 과거의 일일세. 과거의 이들이 행한 일에 대한 책임과 대가를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묻는 게 옳은 일인가?”
“아버지가 도둑질을 해서 불린 재산으로 그 아들이 호의호식하고 있다면 도둑질한 죄를 아들에게 묻지는 못하더라도 재산 정도는 회수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
“거기에 뒤늦게라도 그들의 죄를 단죄하고 정의를 바로 세운다면 교황청의 권위는 하늘 높이 치솟을 것이며 모두가 교황 성하의 결단을 칭송할 것입니다.”
“자네는 내가 자네의 말대로 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나 보군.”
“물론입니다. 교황 성하께서는 언제나 어려운 상황에서도 옳은 결정을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눈에 힘 좀 풀고 얘기하게. 눈빛으로 이 노인네를 죽일 셈인가?”
“존경과 경외의 눈빛입니다.”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는 칼리나를 보며 교황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네도 많이 달라졌군.”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지요.”
“그래… 그렇겠지. 허나 몇 가지 조건이 있네.”
“경청하겠습니다.”
“자네들이 가져온 협상안 이상으로 베네치아에게서 뭔가를 뜯어내거나 압박해선 안 되네. 또한, 향후 분쟁이 일어난다면 교황청이 우선적으로 중재를 하도록 하겠네.”
“교황 성하께서 합당한 중재안을 내리신다면 받아들이지 못할 것도 없지요. 애초에 이번 전쟁은 베네치아가 카노사를 급습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으음….”
“말이야 바른말이지 제가 지금껏 밀라노와 투스카니를 제외하고 남의 영토를 침입한 적이 있습니까?”
그 말에 교황은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칼리나는 가진 힘에 비하면 꽤 조용히 살고 있었다. 말은 좆도 안 듣는, 허구한 날 전쟁이나 벌이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는 다르게 말이다.
“아무튼, 자네도 약속 지키게.”
“물론입니다. 교황 성하. 그 누가 교황청과의 약속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가 그랬듯이 교황 성하는 찬란한 태양이요, 황제는 달이 아닙니까?”
대놓고 비꼬는 칼리나를 보면서도 교황은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고 손짓하며 축객령을 내렸고 칼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섰다.
* * *
결국 교황은 칼리나의 제안을 수락했고 즉각 교황청에 있는 이단심문관들과 추기경을 특사로 임명해 베네치아로 보냈다.
말이야 중재를 위해서 왔다지만 그들이 진짜 그를 목적으로 온 게 아니라는 건 3살짜리 어린아이도 알 것이다.
그에 맞춰서 제노바는 수십 척의 함선을 이끌고 아드리아해로 북상했으며 칼리나는 휘하의 용기사단과 정예병들을 이끌고 베네치아로 진군했다.
그렇게 나라 하나 정도는 가볍게 쓸어버릴 대군이 베네치아로 진군하자 베네치아의 시민들은 공포에 질렸다. 지금껏 많은 위협이 있었지만 이렇게 알기 쉽게 본토에 직접적인 위협이 가해졌던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은 추기경을 통해 자초지종을 파악했고 사신단을 보내 이쪽의 정확한 목적을 확인했다. 물론 그들은 평화협상을 위해 온 것 치고는 우리가 끌고 온 병력의 수가 너무 많았기에 우리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사실 믿든 말든 저들이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베네치아에서 협상 상대로 라그나르 당신을 지목했어. 그것도 혼자서 들어오라네.”
칼리나의 말에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그야 그렇겠지. 무슨 일이 생기면 날 인질로 잡아야 할 테니까.”
본래라면 칼리나가 방문하는 게 맞지만 실질적으로 이번 전쟁을 이끈 건 나였고 칼리나의 뜻이 곧 나의 뜻이었기에 누가 가든 상관없을 것이다.
거기에 베네치아에서도 일이 잘못돼서 이왕 죽일 거라면 칼리나보단 날 죽이고 싶어할 테고.
물론 나 역시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온 놈이라고 해도 적진에 그냥 들어갈 리는 없잖은가.
“가지.”
내 말에 이단심문관들은 투구를 쓴 상태 그대로 날 바라보더니 이내 날 감싸듯 호위했고 나는 의기양양하게 베네치아의 함선 위에 올랐다.
이단심문관들이 함께하는 한 내 안전은 절대적으로 보장된다고 해도 무방했다. 그들의 정신 나간 전투력과 바퀴벌레 같은 생존력은 둘째치더라도 일단 그들은 교황의 직속 부대다.
그런 그들이 호위하는 대상에게 위해를 가한다? 그건 곧 교황에 대한 공격이나 다름없었다. 베네치아가 제정신이 박혀있다면 교황까지 적으로 돌리는 미친 짓은 안 하겠지.
사실 합리적으로 생각하면 날 암살하는 순간 베네치아 앞바다에 정박 중인 제노바의 함대와 칼리나의 검은 용군단이 들이닥칠 게 뻔하지만 사람이 어디 합리적인 생물이던가.
아무튼, 저들이 함께한다면 암살에 대한 우려는 접어둬도 될 것이다. 그 때문에 그들은 야만인이자 교화해야 할 대상인 나를 충실히 호위했다.
참 웃긴 일이었지만, 난 그냥 즐기기로 했다. 이런 때가 아니면 언제 야만인인 내가 이단 심문관들의 호위를 받을 수 있겠는가.
“어서오시오. 라그나르 공작. 본인은 베네치아의 도제인 피에트로 치아니라고 하오. 소문이 자자한 용담공을 만나서 영광이오.”
“만나서 반갑소. 도제.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요.”
난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가볍게 악수를 했는데 웃고 있는 입가와는 반대로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오히려 살기가 가득 차 있는 게 당장이라도 날 죽여버리고 싶다는 의지가 담겨있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피곤할 텐데 숙소로 안내해드리겠소.”
“아, 그 전에 들르고 싶은 곳이 있는데 괜찮겠소?”
딴 길로 새려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도제는 탐탁잖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얘기해보시오.”
“티에폴로 야코포와 마리노 단돌로의 무덤에 가서 참배하고 싶소만 그들의 무덤으로 안내해주시겠소?”
그 순간 도제의 얼굴이 씰룩이며 눈가에 분노가 깃들었으며 살기 어린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았다. 아마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나는 이미 죽어서 바닥에 널브러져 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매서운 눈빛이었다.
“감히… 그 입으로 티에폴로의 이름을 들먹인단 말이오?”
“진정하시오 도제. 그대의 분노는 이해하나 나는 순수한 의도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자 하는 것뿐이오.”
“애도? 능욕이 아니라 애도 말이오!? 아니면 야만인들은 애도와 능욕을 같은 의미로 쓰는 것이오?”
도제의 입에서 야만인이라는 말이 나왔고 이는 충분한 외교적 결례였지만 나는 못 들은 척 말을 이었다.
“그렇소. 앞으로 협정을 맺고 양국이 평화를 증진해나가야 할 텐데 그전에 해묵은 감정은 털고 가야 하지 않겠소?”
“그딴 건 필요 없소. 협상이나 하고 꺼지시오.”
도제가 으르렁거렸지만 나는 유들유들하게 대꾸했다.
“그럴 순 없지. 내가 티에폴로의 목을 베면서 그의 무덤에 찾아가기로 약속했으니까.”
“정녕 이곳에서 죽고 싶은 것이오?”
그 말에 호위를 하던 이단심문관들이 검의 손잡이를 잡았지만 나는 그들을 제지하며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할 수 있다면 해 보시오. 장담하건대 나를 죽인다면 오늘 지도에서 베네치아는 사라질 것이오. 남자, 여자, 늙은이, 젊은이, 어린아이를 가리지 않고 살아 숨 쉬는 것 모두가 공평하게 죽음을 맞이하겠지. 그대가 과연 용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겠소?”
“언젠가… 언젠가는 반드시 이 굴욕을 되돌려 줄 때가 올 것이오.”
“대부분 내게 그렇게 얘기했지만 다들 발할라…그러니까 그대들이 말하는 천국으로 가더군. 그래도 뭐 열심히 해보시오.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면 그대가 죽기 전에는 노력의 결실을 볼 수 있을 테니까.”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꾸하는 내 모습에 도제는 분을 삭이듯 주먹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몸을 돌리며 분노가 버무려진 목소리로 얘기했다.
“…따라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