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크레타에서 정비를 끝마치고 몰타를 거쳐 니스로 돌아온 나는 엄청난 인파에게 환호를 받았다. 수많은 군중들이 꽃잎을 던지며 승전을 축하해주었고 내 가신들이 나를 맞아주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검은 용군단의 일원들이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일렬로 나열해 있는 모습은 장관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최선두에는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칼리나가 있었다. 그녀는 작정하고 왔는지 본인 휘하의 병력들을 전부 다 끌고 왔는데 그 위용이 제법 대단했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는 한쪽 무릎을 꿇고 찢겨진 베네치아의 깃발을 바쳤다.
“마이 레이디. 그대에게 이 영광스러운 승리를 바칩니다.”
“고생했어. 라그나르. 덕분에 그놈들도 나와 검은 용군단을 건드리면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할지 깨달았겠지.”
말을 마친 그녀는 이곳에 모인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나를 덥썩 끌어안았다. 뭐, 남부의 패자인 칼리나가 고생한 가신을 위로하는 행동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런 것 치고는 꽤 과한 스킨쉽이었다.
아마 모두의 앞에서 내가 자기 거라는 마킹을 하는 거겠지. 보지 않아도 힐데의 눈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지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다른 모두에게 나는 칼리나의 남편… 뭐 그런 비스므리한 걸로 인식되고 있다. 자의식 과잉 아니냐고 할 수도 있는데 내게 혼담요청이 들어오지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뭐 내가 야만인이긴 해도 능력 있는 야만인 아니던가. 칼리나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거진 자수성가의 아이콘인 데다 근래에는 황제와 사자공까지 굴복시키지 않았던가?
내게 적대적인 가문이나 귀족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사자공처럼 내 도움이 간절하거나 혈맹으로 엮이길 원하는 제노바, 그리고 날 적으로 돌리고 싶지 않은 황제 정도라면 자신의 딸을 내게 건네줄 법도 한데 아무런 얘기도 없는 걸 보면 확실하다.
“이런 미인이 눈앞에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해?”
“이런 분에 겨운 행복과 사치를 부려도 되나 고민 중이지.”
물론 칼리나는 그런 내 대꾸에 코웃음 치며 비아냥거렸다.
“아주 입말 열면 거짓말이 자동으로 튀어나오네. 그래도 뭐, 기분 좋은 거짓말이니 넘어가 줄게.”
그렇게 스킨쉽을 끝마친 칼리나는 멋쩍은 표정을 짓고 있는 총독을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대승을 축하드립니다. 총독님. 총독님께서 참전해주신 덕분에 저희가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하, 변경백께서 이 노인네의 얼굴에 금칠을 해주시는군요.”
“금칠이라니요. 총독님께서 깃발을 들고 직접 전투에 임하시지 않았습니까? 저 베네치아의 엔리코 단돌로가 그저 쇼맨십으로 보여줬던 것과는 다른 진짜 전장에서 말입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총독님이야말로 모든 귀족들의 귀감이십니다.”
엔리코 단돌로나 제노바의 총독이나 똑같이 쇼맨십이지만 결국 누가 포장을 하고 누가 말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지금도 칼리나가 몇 마디 첨언하자 총독의 행동은 고결하고 정의로우며 긍지 높은 행동으로 변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봐주시니 기쁘기 그지없군요. 허나 이 위대한 승리는 저 한 사람만의 힘이 아닌 제노바와 검은 용군단이 힘을 합쳐 거둔 것입니다.”
“저 역시 그에 동의합니다. 또한, 오늘 이 승리는 제노바와 검은 용군단의 동맹을 견고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다시 이를 말입니까. 그리고….”
그렇게 칼리나는 총독과 이야기를 나누며 성으로 귀환했다. 물론 그 성이라 함은 내가 머물던 성이었는데 한동안 이곳에서 지냈는지 그녀는 총독을 안내하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흐음. 반가운 척하는 것치고는 꽤 쌀쌀맞군요. 역시 저 여자는 당신을 이용해먹는 게 분명합니다.”
옆에서 힐데가 칼리나를 비난했지만 솔직히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애초에 맨 처음에 제노바의 총독이 아닌 날 콕 찍어서 반겨준 것도 칼리나가 무리한 것이다.
지금 이곳에 모여있는 이들 중에서 제노바의 총독보다 끗발이 높은 사람은 없다. 나이로 보나 직위로 보나 세력으로 보나 그는 나와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물론 내가 공작이라지만 중소규모 도시인 니스의 지배자일 뿐이다. 거기에 일단 명목상으로는 칼리나의 밑에 배속되어 있다.
거기에 동맹국의 수장이 정식으로 방문한 상황이다. 헌데 동맹국의 수장이 아닌 나를 먼저 반겨준다? 이건 상대측에서 외교적 결례라고 눈깔 뒤집어져서 따져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굳이 그걸 힐데에게 얘기하진 않았다. 굳이 정치적인 사안을 얘기하고 싶지도 않거니와 이런 건 본인이 직접 깨닫고 배워야 하는 법이니까.
“뭐, 그건 그렇고 참 아이러니하지 않아?”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이름난 해적이었던 하이르 앗 딘을 죽인 우리가, 다시 해적질을 성공적으로 끝마쳤다고 이렇게 환호를 받는 걸 보면 말이야.”
“으음….”
“근데 뭐 원래 인간은 그런 법이지. 원래 내가 하면 로맨스고 남이 하면 불륜이잖아?”
“당신이 그렇게 얘기하니 참 와닿는 말이군요.”
“내가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긴 하지.”
“여자만 보면 껄떡대는 변태를 잘못 말한 것 아닙니까?”
“변태라니… 너도 마사지해주면 히에엑 거리잖아. 이비랑 비교하면 너 엄청 심한 거 알아?”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옵니까!”
힐데는 버럭 소리를 지르자 이내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그 모습에 힐데의 얼굴이 시뻘게지더니 복수의 의미로 날 걷어찼다.
“죽여버릴 겁니다.”
그렇게 힐데와 투닥거리며 방까지 들어갔고 거기서 쉬고 있자니 시종이 칼리나의 명령이라며 나를 데리러 왔다.
별일 아니면 피곤을 이유로 자고 싶었지만 총독까지 불렀다고 하니 나는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하고 울며 겨자먹기로 옷을 차려입은 뒤 응접실로 향했다.
거기에는 총독뿐만 아니라 검은 용군단의 일원들까지 모여있었기에 나는 적당히 비어있는 자리에 가서 앉았다. 사실 내가 제일 늦게 와서 남아있는 자리가 하나밖에 없었지만.
그렇게 나를 마지막으로 모든 자리가 채워지자 칼리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회의를 시작했다.
“다들 갑작스러운 소집에도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피곤하실 테지만 피차간에 바쁘고 많은 분들이 오셨기에 긴 시간을 뻇을 수 없어 바로 회의를 진행하겠습니다.”
확실히 칼리나의 말대로 검은 용군단의 일원들은 각자의 영지를 다스리느라 바쁘다. 니스에서 멀리 떨어진 알본 같은 경우는 이곳까지 오는 데만 2주는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이번에 모인 건 이런 대규모 승전연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뒤처질지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일 것이다. 겸사겸사 콩고물이 떨어지면 좋은 거고.
제노바 총독이 얼마나 바쁜 사람일지는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직할지를 3개나 다스리는 칼리나 역시 매한가지고.
“…하여 우리는 이번 승리로 인해 베네치아가 전쟁 수행능력과 지속능력을 잃어버렸다 판단하고 있습니다.”
칼리나의 브리핑을 듣고 있던 총독은 손을 들며 모두의 주목을 모은 뒤 물었다.
“헌데 변경백. 이번에 베네치아는 우리에게 대패하긴 했지만 절반에 가까운 함선을 수습해서 퇴각했소. 그들은 여전히 저력있는 국가이고 오랜 기간 지중해의 여왕으로서 군림했소. 단 한 번의 전투로 전쟁의지를 상실한다는 게 본인은 이해가 되지 않소만….”
“정확한 지적입니다만 이번 전쟁으로 차기 도제로 지목받고 있던 마리노 단돌로와 티에폴로 야코포가 사망했습니다. 사자가 사라지면 기회를 노리던 늑대와 여우들이 왕이 되고자 하는 건 필연 아니겠습니까?”
총독의 태클에 칼리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답변했다. 아니, 실제로 기다리고 있었겠지. 여기 모여있는 이들 중에서 총독보다 베네치아를 더 잘 알고 있는 이는 없다.
그런데도 저런 질문을 던지는 건 이곳에 모인 이들에게 현실을 정확히 알려주려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하긴, 제국은 언제나 내전으로 망한다고 했었지. 이미 전쟁에서 패하고 티에폴로와 마리노를 잃은 집행부에 대해서 시민들도 큰 불신을 가지고 있을 테고….”
“그러니 굳이 저희가 전쟁을 더 지속해 저들이 하나로 뭉칠 구실을 주느니 이쯤에서 전쟁을 마무리 짓고 평화협정을 맺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소.”
총독은 의외로 쿨하게 수락했는데 사실 제노바도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할 여력이 없었다.
사실 이 시기에 상선과 전투선의 구분은 그닥 의미가 없었고 전투선을 많이 끌고왔다는 건 곧 상행에 투입해야 할 상선을 전투선으로 징집했다는 얘기였기 때문이다.
“전리품 분배는 라그나르 공작과 알 아딜 경, 그리고 총독님께서 잡아둔 초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겁니다.”
사실 모든 권리를 제노바에 몰아주다보니 우리가 받아야 할 건 상대적으로 간단해질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제노바는 베네치아에 크레타의 할양을 요구할 것이며 사로잡은 포로들의 몸값을 직접 협상해서 받아 낼 것이다.
아이유브는 해군력의 증진을 원했기에 제노바로부터 숙련된 선원과 함께 함선을 몇 척 증여받을 것이며 나는 내가 받게 될 금액 전부를 제노바에 재투자하기로 했다.
사실 내가 이곳에서 추가로 사업을 할 거라면 어느 정도 현찰을 가지고 있는 게 유리할 테지만 어차피 다 정리하고 북부로 올라갈 건데 캐시카우를 만들어두는 게 낫지 않겠나?
물론 내가 전부 다 먹는 건 아니고 10%는 칼리나에게, 검은 용군단의 일원들에게도 각자 5%씩 나눠주기로 했다. 이렇게 사람에게도 투자를 해야 나중에 그들의 도움을 바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무튼, 이렇게 큰 틀이 정해지고 나자 자잘자잘한 내용들은 빠르게 합의되었다. 물론 당사자인 베네치아가 들었으면 피가 거꾸로 솟을만한 내용들이 있긴 했지만, 원래 패전국의 말로가 다 그렇지 않던가.
“오늘 회의 내용은 추후 아이유브의 술탄. 살라딘에게 외교문서를 작성해 전달하겠습니다.”
“알겠소. 아이유브 역시 피를 흘렸으니 그에 대한 대가를 받을 자격이 있지.”
어차피 아이유브 역시 큰 내용은 헤어지기 전에 합의를 해놨으니 큰 반발 없이 최종 합의서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렇게 회의가 마무리되려는 찰나 나는 슬쩍 칼리나를 바라보았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바로 손을 들며 발언했다.
“그리고 이건 제가 총독님을 위해 준비한 선물입니다만….”
총독 같은 부자라도 공짜 선물은 참을 수 없는지 그는 내게 귀를 기울였고 나는 천천히 내가 세운 계획을 이야기했다.
“종전 협정은 베네치아에서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베네치아에서? 위험하지 않겠소? 자칫 잘못하면 암살당할지도 모르오.”
“물론 여러 가지 안전장치는 해둬야겠지요. 교황청에 돈을 처바른 다음 특사 파견을 요청하고 총독님께선 함대를 끌고, 변경백은 기사단을 끌고 베네치아로 진군한다던가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호오, 그것참 재밌는 생각이구려.”
“물론 협상은 제가 대표로 할 겁니다. 마리노와 티에폴로의 목을 딴 제가 베네치아의 땅을 밟는다면 제법 볼만할 겁니다. 물론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나도 탈출할 자신이 있고요.”
내 말에 총독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회의장이 떠나가라 크게 웃었다.
“푸하하하하하! 라그나르 공작. 그대는 가히 이 시대의 영웅이자 용담공이라고 불릴 만하오. 과연 그대는 온몸이 담력으로 뒤덮여 있구려.”
“용의 역린을 건드렸으면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좋소. 허면 나는 바로 제노바로 돌아가서 준비를 하겠소. 역사적인 날이 될 텐데 최대한 화려하게 준비해야 하지 않겠소?”
“물론입니다. 허면 베네치아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말을 마친 총독은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히죽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원하는 걸 얻은 영주들 역시 각자의 영지로 되돌아갔다. 물론 나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그들을 하나하나 전부 배웅해주었다.
그렇게 손님들을 보내고 나자 응접실에 남은 건 나와 칼리나뿐이었다. 단둘이었기에 나는 옷의 단추를 풀어 느슨하게 한 뒤 의자에 널브러져 있으니 칼리나가 푸념하듯 투덜거렸다.
“그거 진짜 할 거야? 완전 미친놈으로 낙인찍힐 것 같은데.”
“이미 미친놈인데 뭐 어때? 차라리 개 또라이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게 더 나아. 그래야 두 번 다시 헛짓거리할 생각을 안 하지.”
미친놈이랑은 상종하지도 말라고 하지 않던가. 나는 베네치아의 긍지와 자존심을 짓밟기 위해 기꺼이 미친놈이 되어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