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알 아딜의 함대를 이끌고 코르출라섬으로 다시 돌아가자 그곳에서는 전쟁의 뒷마무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사실 장병들이야 전쟁터에서 싸우고 나면 그만이었지만 지휘관들은 전쟁보다 그 이후의 전후처리가 더 골치 아팠다.
일단 기본적으로 소모한 물자와 사상자의 파악은 기본이었고 패배하면 패배한 대로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해야 하고 병력들을 추가로 징집하고 물자를 징발해야 했다.
승리하면 승리한 대로 기존의 부대를 재편해야 하고 물자를 점검해야 하며 새롭게 점령한 영토에 수비 병력을 주둔시키며 다스려야 했다.
물론 이건 해전이었기에 육지에서 싸웠을 때보다 고려해야 할 사항이 적긴 했지만 문제는 우리가 연합군이라는 점이었다.
연합군의 특성상 전쟁에서 수행한 역할이 상이하며 물자나 자금 등 출자 금액이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때문에 전리품 분배를 두고 내분이 일어나기도 하고 서로 죽네 사네 하는 일도 많이 일어난다.
형제, 자매, 오누이끼리도 부모님의 유산을 두고 개새끼 소새끼 하면서 싸우는데 타국과의 전리품 분배는 어떻겠는가?
이번 해전만 해도 서로가 맡은 역할은 판이하게 달랐다. 내가 미끼의 역할을 함은 물론이요 적을 분쇄하는 타격조의 역할도 했으며 힐데를 통해 적의 후방을 급습하는 포위조의 역할도 해냈다.
반면 제노바는 분쇄조와 포위조의 역할만 수행했으며 아이유브는 적의 함선을 붙들고 있기만 하는 비교적 쉬운 임무를 수행했다.
공적만 따지자면 내가 제일 많은 셈이었지만 함선의 80%는 제노바에서 끌고 온 것이었고 물과 식량, 무기, 인력과 같은 물자는 아이유브에서 공급해주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공적을 데이터와 숫자로 뽑아내서 누가 더 잘했니 못했니를 가리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었다.
케이크를 나눠 먹는 거라면 정확히 3조각 내면 되지만 이건 경우가 다르지 않은가.
그 때문에 이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였고 우리는 퇴각 전에 전리품의 분배를 확실히 마무리 짓기로 했다. 그래야 나중에 뒷말이 안 나오니까.
그래서 30분 뒤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고 난 그전에 우리가 입은 피해와 전리품의 규모에 대해서 빠르게 파악해야 했다.
“오토. 우리가 입은 피해는 얼마나 되나?”
“일단 용담공 전하의 기함인 궁니르는 반파돼서 예인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돌려 여기저기를 살펴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세계 트럭에 빙의해서 충각으로 박살 낸 적의 함선만 두 자리 숫자다.
거기에 반파된 상태로 속도를 높여 알 아딜의 함대까지 구원하고 왔으니 솔직히 떠 있는 게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힐데가 이끌던 함대는 어때?”
“예상외로 피해가 적습니다. 갑판 일부가 손상된 걸 제외하면 함선의 피해는 전무합니다.”
“선저나 용골 같은 메인프레임이 상한 부분은 없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이상하네. 적 함선 몇 척이 도망갔잖아. 그거 포위망 뚫고 튄 거 아니야? 이쪽에서 열어줬을 리는 없었을 테니 한두 척 정도는 반파되는 게 정상 아니야?”
“이쪽의 포위망이 뚫린 게 아니라 벨렌테가 이끄는 제노바 쪽의 포위망이 뚫려서 그렇습니다.”
“흠… 그건 이쪽에서 제노바를 압박할 때 쓰면 되겠네.”
내 말에 오토는 두 눈을 땡그랗게 뜨며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게 속삭였다.
“공작 전하. 그건 그렇습니다만 동맹을 상대로 책임 추궁을 하는 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분명 나중에 말이 나올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그… 마리노 단돌로의 시체를 쓴 것 때문에 조금씩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승리하면 약간의 흠결 정도에는 관대해지는 법이지. 그리고 책임 추궁이 아니라 가벼운 압박 정도로 쓸 수 있다는 얘기일세.”
영국의 제독이었던 호레이쇼 넬슨의 인성이 개폐급이었으며 결점이 많은 인간이었던 건 꽤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압도적인 능력으로 모든 불만을 짓누르지 않았던가?
나 역시 시체팔이를 한 것에 대해 말이 나올 테지만, 그건 결국 내가 거둔 이 위대한 승리 앞에 파묻히게 될 것이다.
“정 궁금하면 이따 예정된 회의에 참가하게나. 자네는 부관이니 참관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알겠습니다.”
“부상자랑 사망자는 얼마나 되나?”
“부상자는 415명에 사망자는 67명입니다.”
“사망자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은데… 이비가 내지르는 비명이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군.”
“그것도 그렇지만 아이유브에서 파견해준 의료진들의 활약이 큽니다.”
“하긴, 아이유브는 의학이 발달한 나라였지. 이비도 중동 출신이고.”
이비가 신의긴 하지만 그래봤자 몸은 하나다. 물론 의학과 관련된 버프들로 인해 병력들의 생존력을 높여주긴 했지만 그게 불사신이 된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때문에 의무관들이 필요했는데 의학이 발달한 아이유브에서 의료진을 파견해줬기에 우리는 전투력을 보존시키며 베네치아를 상대할 수 있었다.
이걸 빌미 삼아 아이유브에게 좀 더 지분을 주자고 해야겠다. 애초에 난 이번 전리품 분배 회의에서 내 몫을 둘에게 조금씩 양보할 생각이었다.
그거 조금 더 받는다고 크게 달라지는 것도 없거니와 괜히 얼굴 붉혀서 관계가 소원해지느니 그들의 마음속에 부채를 달아두는 게 더 낫다.
“고생했네. 좀 쉬다가 들어오게.”
“공작 전하께서 일하시는데 부관인 제가 어떻게 쉬겠습니까?”
“푸하하하, 자네가 그런 아부도 할 줄 알았나?”
웃으며 오토의 등을 툭 친 나는 무기를 경비병들에게 맡긴 뒤 제노바 총독의 방으로 들어갔다. 내 기함보다 더 커서 그런지 방의 크기도 더 컸고 오토와 벨렌테를 포함해 5명이 들어가 있는데도 공간이 널찍하게 남아있었다.
“이런, 제가 마지막인가 보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우리도 방금 왔으니 신경 쓸 것 없다네.”
우리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총독이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고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렌테는 내게 와인을 건네주었다.
나는 와인의 향기를 느끼며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분위기를 풀기 위해 농담을 내뱉었다.
“음, 와인의 맛이 승리의 달콤함처럼 달달하군요.”
“하하하, 자네 말하는 게 꼭 음유시인들 같구만.”
“이래 봬도 저는 문명화된 야만인이니까요. 제가 장담하건대 승리의 과실은 이 와인보다 훨씬 더 달콤할 겁니다.”
내 말에 총독뿐만 아니라 알 아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대승을 거뒀고 패퇴한 베네치아는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여력이 없을 테니까.
물론 베네치아의 저력을 생각하면 전쟁이 길어질 수도 있겠지만 그쪽도 정말 모든 걸 다 걸고 싸우자고는 못 할 것이다.
그러기에는 베네치아가 손에 쥐고 있는 게 너무 많았으니까. 원래 가진 게 많은 놈은 잃을 게 없는 놈보다 몸을 사리는 법이다.
“아무튼,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총독 각하께서 직접 전장에 나서주신 덕분에 아군의 사기가 충천했고 덕분에 악적들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내가 한 건 그저 깃발을 들고 서 있던 것뿐이네. 적들을 분쇄하고 최일선에서 싸운 건 자네잖나. 거기에 적의 총사령관이던 티에폴로의 목숨을 취한 것도 그대였지.”
“그렇습니다. 제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용담공 전하께서 적진을 다 휘젓고 다녔다고 하시더군요. 덕분에 이렇게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사실 저는 저보다 알 아딜 경의 활약이 눈부시다 생각합니다. 알 아딜 경께선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서 적의 최정예를 상대로 최선을 다했고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서로 과하다 싶을 정도로 서로를 칭찬하며 빨아주었다. 칭찬 한마디 하는 데 돈이 드는 것도 아닌데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지 않던가.
“저는 결코 아이유브와 제노바의 희생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여기서 아이유브와 제노바, 그리고 검은 용군단이 흘린 피는 훗날 우정과 신뢰라는 싹을 틔워낼 것이며 혈맹이라는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내 확신이 담긴 선언에 총독이나 알 아딜 역시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독이야 내가 직접 싸우는 걸 봤으니 적대하고 싶지 않을 테고 알 아딜은 이 일로 자신의 입지를 다질 수 있으니 좋겠지.
“그대의 말이 참으로 옳구만. 그래서 그런데 용담공 그대는 혹시 베네치아를 더 몰아붙일 생각이 있나?”
전쟁을 더 지속할 거냐는 총독의 말에 나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베네치아에 당한 게 많은 만큼 그는 좀 더 베네치아를 몰아붙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글쎄요… 일단은 전열을 가다듬고 정비를 한 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실 이 정도가 우리의 공세 종말점이다. 여기서 더 들어가면 진짜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맞는 말일세.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다만 내가 얘기하는 건 전면전이 아니라 국지전을 이어나가자는 뜻이네. 예를 들면 자다르를 습격한다든가 하는 것처럼 말일세.”
총독은 어떻게든 베네치아에게 빅 엿을 먹이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아무리 긍정적으로 행복회로를 돌려봐도 자다르 공격은 터무니없는 얘기였다.
자다르는 헝가리―크로아티아와 베네치아 간의 분쟁영토이기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참전하게 만들 수 있었다.
막말로 베네치아에서 자다르 다시 너희한테 반환해줄 테니 도와달라고 하면 어쩔 텐가? 수많은 경우의 수 중에 하나였지만 애초에 참전할 명분이나 건덕지를 주면 안 된다.
정치력 만렙에 국가 간의 정세에 밝은 총독이 그걸 모를 리가 없는데도 이런 얘기를 하는 걸 보면 베네치아와 연관되면 눈깔이 뒤집히는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은 피해가 커서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후방으로 물러난 다음 추후 행동을 생각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번에 포위전에서 제노바의 피해가 컸다고 들었는데요.”
은근슬쩍 제노바의 실수를 언급하자 저쪽에서도 내 외교적 수사를 알아들었는지 아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만. 생각해보면 아이유브의 함선들도 손해가 막심할 텐데 내가 너무 내 생각만 한 것 같구먼. 부디 용서해주게.”
“괜찮습니다. 대신 베네치아가 정전 협정을 맺기 전까진 주기적으로 함선 약탈을 하시지요. 장담하건대 베네치아에선 더 이상 이렇게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지 못할 겁니다.”
베네치아는 우두머리인 도제가 존재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근본은 공화국이었다. 즉,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모든 걸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처럼 베네치아 역시 도제 마음대로 모든 걸 처리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이미 두 차례나 해전에서 털렸는데 전쟁을 더 지속하자고 하진 못할 것이다. 물론 이쪽에서도 너무 조이진 말고 적당히 줄을 풀어줘야겠지.
만약 베네치아가 이 악물고 총력전을 걸어오면 그때는 진짜 누구 하나가 사라져야 끝날 것이다. 확신할 수 없는 도박에 판돈을 걸기에는 이쪽도 가진 게 너무 많았다.
“그러세. 허면 일단 크레타로 물러나야겠구만.”
“그래야죠.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라고 생각하십시오.”
내 말에 총독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아쉬운 표정으로 베네치아가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마 제노바의 총독에겐 베네치아가 갈망의 도시일 테지.
“그리고 전리품 분배 말입니다만… 나누기 전에 일부, 그러니까 10% 정도를 교황청에 바치는 게 어떻습니까?”
“교황청에?”
“예. 좋든 싫든 아이유브가 저희와 함께한 게 알려질 겁니다. 그러니 입을 다무는 대가로 미리 돈을 바치는 겁니다. 구엘프(교황파)였던 제노바도 저희와 함께하면서 교황청과 다소 소원해졌으니 이참에 관계 개선도 하시고요.”
말을 마친 나는 총독과 알 아딜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그들은 불만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손 하나 까딱 안 한 교황청에게 바치긴 아까웠지만 그래도 뒤탈을 막아줄 수 있다면 이 정도 투자는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실상 베네치아에 얻어낼 것들은 상권이나 포로의 몸값, 섬이나 항구의 할양 정도일 겁니다. 헌데 이건 저희 검은 용군단이나 아이유브가 써먹기는 힘들지요. 해서 전쟁 배상에 관한 모든 권한을 제노바에 일임하고 저희는 현금과 물자로 받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내 말이 그럴듯했기에 총독과 알 아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알 아딜은 현금으로 받으면 장부를 장난치기에 좋을 테고 총독 역시 상권이나 뭐 이런 것들을 나눠 가지긴 난감했을 테니까.
그 뒤로 우리는 베네치아에게서 뭘 뜯어올지 토론을 벌였고 그 열띤 토론은 달이 떠오를 때쯤 끝났다.
“다들 고생했네. 이제 우리의 요구 권한을 적은 문서를 가지고 베네치아에 보내기만 하면 되겠구만.”
“속이 쓰리겠지만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래도 나름대로 베네치아가 수용할 수 있는 한도 내로 요구사항을 적었으니 받아들이긴 할 것이다. 거부한다면? 그땐 뭐 아드리아해를 틀어막고 입구 조이기를 들어가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