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화
일반적으로 병사들에게 있어 후퇴라는 건 패배의 공포를 야기했다. 사실 승리하고 있다면 도망칠 필요가 없으니 그건 당연하다면 당연한 얘기였다.
그리고 그건 미리 합의된 ‘작전상 후퇴’여도 매한가지였다. 이게 정말 작전상 후퇴가 맞을까? 우리는 전투에서 졌는데 말만 그렇게 하는 거 아닐까?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하는 게 아닐까?
이런 사소하면서도 생존과 직결된 의문들이 머릿속에 피어오르고, 공포에 머리가 잠식돼버리면 군대는 더 이상 군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종종 역사를 보면 적을 유인하기 위해 퇴각하다 병사들이 진짜 후퇴하는 줄 알고 패닉에 빠져 패배한 전투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수많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병력들을 다시 집결시켜 전열을 가다듬은 유비가 대단한 이유이기도 했다.
말이 길어졌는데 이렇게 작전상 후퇴를 할 때 아군에게 승리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주는 방법은 뭘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나는 가장 직관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쓰기로 했다.
내가 이끄는 기함은 최후미에 있었던 만큼 반전하는 순간 최전선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우리를 추격하던 적의 함선에 충각을 시도했다.
쾅!!!!!
배의 선수끼리 부딪히면서 엄청난 흔들림이 일었고 다들 갑판에 나뒹굴고 있을 때 나는 배의 난간을 딛고 날아올라 그대로 적의 배에 착지했다.
쿠웅!
적진의 한복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 뛰어든 나를 보며 잠깐의 정적이 일었고 난 굳어있는 그들을 향해 도끼를 뽑아 들며 소리쳤다.
“오딘이시여! 날 승리의 영광으로 이끄소서!”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오딘을 향한 기도문을 외운 나는 그대로 달려들어 눈앞의 적을 베어 넘겼다. 그런 내 모습에 호응해 아군 병력들 역시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든 채 적선으로 넘어오기 시작했다.
“용담공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
“공작 전하를 따르라!!!!”
맨 처음 해적질을 할 때부터 나와 함께했던 선원들은 내가 보여주는 강한 무력과 행동력에 광적인 믿음을 보여주고 있었고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나를 필두로 적의 함선들을 하나둘 무력화시켜 나갔다. 적들 역시 강하기로 소문난 베네치아의 해군인 만큼 강하게 저항해왔지만, 압도적인 힘 앞에선 무력한 발버둥일 뿐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전장의 판도가 뒤흔들렸고 백중세였던 판도는 우리에게 넘어오기 시작했다. 난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적들을 몰아붙였다.
“계속 몰아붙여라! 여기서 승리한다면 저들이 가진 모든 것이 그대들의 것이 될 것이다!”
공작인 내가 직접 호언장담하자 병력들의 사기는 크게 치솟았고 제노바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총독 가문의 깃발을 내건 기함이 전장의 한복판에 등장했다.
광기와 공포의 공통점이 있다면 둘 다 손쉽게 전염된다는 점이다. 내게서 흘러넘치는 광기는 아군의 머릿속을 타고 흐르며 전염됐고 이는 나이가 지긋한 제노바의 총독까지 칼을 뽑아 들고 싸우게 만들었다.
그는 엔리코 단돌로가 아흔이 넘는 나이에 공성전에 참전했던 것처럼 스스로 칼을 뽑아 든 채 제노바의 국기를 들고 적의 함선으로 뛰어들며 소리쳤다.
“제노바의 아들들이여! 복수의 시간이 도래했다! 신께서 우리를 굽어살필지니 온 천하에 그대들의 용기와 용맹이 울려 퍼지리라!”
그의 행동과 외침은 병력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고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적들과 악착같이 싸워나갔다. 그렇게 승기가 거의 우리 쪽으로 기울었을 무렵, 적의 기함으로 보이는 함선이 진군나팔을 불며 베네치아의 함선들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정신들 차려라! 우리는 지중해의 여왕이자 패자인 베네치아다! 제노바와 야만인 따위에게 무릎 꿇을 셈이냐!”
“나의 형제들이여! 저 잔악무도한 약탈자들에게서 베네치아를 지키고 수호해야 한다!”
“그대와 그대의 옆에 있는 동료를 믿고 버텨라! 얼마 후면 아군의 지원군이 도착할 것이다!”
화려한 옷을 입은 사내는 병사들을 독려하며 그들에게 희망을 싹틔웠고 이는 생각보다 큰 효과를 보여줬다.
썩어도 준치라고 베네치아는 지중해의 여왕이었으며 복수를 명분 삼아 이를 갈고 나온 만큼 적들 하나하나가 최정예였다.
그 증거로 엄밀히 얘기하면 내가 있는 중앙을 제외한 나머지는 베네치아에게 밀리고 있었다. 단지 내가 중앙에서 화려하게 날뛰며 시선을 끌고 포위를 한 상황이었기에 우리가 이기고 있다고 느끼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제법이군.”
정확하고 날카로운 판단력, 병력들을 휘어잡는 통솔력. 장담하건대 몇 년만 지나면 위대한 인물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눈에 띈 게 불행이었다. 난 두고두고 귀찮은 방해물이 될 놈을 살려둘 정도로 관대하지 못하니까.
“조타수. 방향 돌리게.”
어디라고 얘기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내 몸에서 흘러나오는 살기를 읽었는지 눈치껏 적의 기함을 향해 선수를 돌렸다.
“희망. 참 좋은 말이지. 희망이 있기에 지금의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나는 저 사내를 죽임으로써 베네치아의 희망을 짓밟아 줄 생각이었다. 잔뜩 부풀어 오른 희망이 지독한 절망으로 바뀌는 순간 저들은 전의를 상실할 테니까.
지난번에 마리오인지 마리노인지 하는 놈을 죽이니 전투가 순식간에 끝났던 것처럼 이번 전투도 저놈을 잡으면 빠르게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이쪽의 생각을 읽은 건지 다른 베네치아의 함선들이 우리의 앞을 가로막았지만, 날 뒤따르는 아군 함선들이 그들을 떨쳐냈고 마침내 내 기함 궁니르는 그 이름처럼 정확히 적의 선수를 들이받았다.
콰아아앙!!
이미 수많은 충각과 적의 공격을 버티며 만신창이가 된 배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궁니르의 용도가 적을 향해 내던지는 투창이었던 것처럼 이 함선 역시 적들을 향해 최선두에서 나아가는 창이 되어야 하니까.
쿠웅!
무사히 적의 함선에 착지한 나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도끼를 손이 으스러지도록 꽉 쥐며 그들에게 죽음을 선포했다.
“이교도들이여. 마리노처럼 순교할 준비는 됐나?”
* * *
티에폴로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베네치아에서 출항할… 아니, 자다르에 있을 때만 해도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다소 불협화음이 생기겠지만 자다르에서 버티고 있기만 해도 적들은 아무런 소득도 거두지 못하고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버티기를 시전하는 도중 적이 마리노 단돌로의 시체를 이용해 자신들을 도발했고 자신들은 안락한 자다르를 버리고 뛰쳐나와 이곳 코르출라섬까지 쫓아왔다.
여기까지도 큰 문제는 없었다. 적들이 쳐놓은 덫은 너무 허술했고 그들은 자신들을 피해 도망치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그 순간 이미 자신들은 적들이 쳐놓은 덫에 걸려있었다.
함대를 나눈 건 스스로 무기를 내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치명적인 실수였으며 적의 함대가 자신들의 퇴로를 차단하는 순간 자신들은 그물에 갇힌 사냥감이었다.
이때까지도 문제는 없었다. 비록 적들이 자신들을 방심시켜서 그물에 가뒀다지만 그깟 그물로 베네치아라는 괴물을 가두기에는 부족했으니까.
실제로 이쪽의 숫자가 더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아군은 분전했고 그물을 끊고 역으로 사냥꾼을 사냥하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라그나르 로드브로크라는 걸출한 사냥꾼이 등장하는 순간 모든 게 뒤바뀌었다. 그는 두 자루의 도끼로 아군의 함선을 안방처럼 종횡무진 뛰어다녔고 그가 걷는 발걸음마다 아군의 진득한 피가 흘러내렸다.
자신은 지금껏 살아오면서 전쟁에서 개인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건 불변의 진리이자 굳건한 신념이었다.
아무리 개인의 용맹이 뛰어난들 전쟁을 좌지우지하는 건 잘 훈련된 병사들과 압도적인 숫자의 우위, 뛰어난 지휘관, 넘치는 보급, 드높은 사기와 같은 요소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오늘 자신이 진리라 믿고 있던 일들이 전부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라그나르는 인간이 통제하는 게 불가능한 자연재해 그 자체였다.
그렇게 수많은 인명피해를 내며 아군의 목숨을 거둬간 그는, 자신의 도끼날은 모두에게 공평하다는 듯 악마와도 같이 웃으며 선포했다.
“이교도들이여. 마리노처럼 순교할 준비는 됐나?”
그 말이 끝나자 그는 번개처럼 달려들어서 도끼를 휘둘렀고 그를 막기 위해 나섰던 이들의 머리는 수확 시기의 수확물처럼 잘려서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렇게 그가 자신의 앞까지 다가오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저항? 그런 건 이미 포기했다. 애초에 인간이 자연재해를 피해서 도망친다고 한들 벗어날 수 있겠는가?
설사 신이 도와서 도망친다고 한들 그 순간 아군 함대는 무너질 게 틀림없었다. 비록 자신은 이곳에서 죽을지라도 남아있던 함선은 살려서 돌려보내야 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베네치아가 무너져야 한다는 건 너무 가혹한 처사가 아니던가? 그렇기에 즉각 다른 함대에 퇴각 나팔을 부는 동시에 자신의 무덤이 될 기함을 적들의 틈바구니로 진군시켰다.
그런 자신의 판단에 피로 범벅이 된 살인마는 재밌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 짧은 시간에 꽤 좋은 판단을 내렸군. 자네 이름이 뭔가?”
“티에폴로. 티에폴로 야코포다.”
“티에폴로라… 반드시 기억해두지. 내 이름은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일세. 혹여 죽은 뒤 오딘을 만나 뵌다면 내 이름을 얘기하게나. 분명 잘해주실 걸세.”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말을 내뱉은 사내는 도끼를 치켜들었고 티에폴로는 얌전히 두 눈을 감았다.
서걱!
무언가가 깔끔하게 잘리는 소리와 함께 비정상적으로 시야가 흔들렸고 흐려지는 광경 속에서 티에폴로가 마지막으로 본 건 도망치지 못해 불타며 가라앉고 있는 베네치아의 함선들이었다.
* * *
내가 죽인 적의 사령관… 그러니까 티에폴로라는 이름의 사내가 죽자 전세는 크게 기울었다. 베네치아의 함선들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다가 아군에게 함선을 점거당하거나 불에 타서 가라앉았다.
몇 척이 죽을힘을 다해 포위망을 뚫고 도망치긴 했지만, 반파당한 함선들이 태반이었고 대부분의 함선들은 포위망을 뚫지 못한 채 백기를 내걸어야 했다.
도망치는 함선들도 따라가면 붙잡을 수 있을 테지만 지금 급한 건 코르출라섬을 되돌아서 오는 적의 별동대였다.
거기를 맡고 있던 건 함대전에 능숙하지 못한 알 아딜과 아이유브의 병력들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제노바의 총독에게 뒷정리를 맡긴 뒤 속도가 빠른 중형 갤리들을 이끌고 남부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코르출라섬의 남부에선 내 예상대로 한창 해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알 아딜은 밀리는 와중에도 전열을 유지하며 적의 공격을 받아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지원군의 등장에 적들은 당황한 듯했지만 이내 내 뒤를 따르는 삼십여 척의 배들과 찢어진 베네치아의 깃발을 확인하더니 지체 없이 배를 돌려 퇴각했다.
굳이 그들을 쫓지는 않았다. 이미 적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고 저들을 막고 있던 알 아딜의 함대도 많이 상했기에 나는 일단 전열을 가다듬기로 했다.
어쨌건 여기는 적의 영토였고 괜히 무리하다가 기껏 잡은 승리를 놓칠 수 있었으니까.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이쪽이 대승을 거둔 건 명확했다.
이쪽은 23척 정도만 잃은 데에 비해 저쪽은 50척 이상을 잃어버렸다. 멀쩡히 살아 돌아간 함선도 거의 없던 걸 감안하면 거진 전멸이라고 봐도 무방하겠지.
그렇게 원래 계획대로 알 아딜의 함대까지 구원한 라그나르는 바로 함선의 선수를 돌렸다. 모든 걸 건 전투에서 승리했으니 이제 달콤한 과실을 챙길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