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오! 좋다고 달려오는군.”
본인들도 계속 자다르에 머물면 우리를 압박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을 테지만 마리노 단돌로의 시체를 내건 이상 저쪽에선 눈깔이 뒤집힐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적당히 거리 유지하면서 엉덩이를 살랑살랑 흔들어주게.”
나는 전 함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고 날 따라왔던 30여 척의 함대는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서 퇴각했다.
물론 적들도 우릴 조질 생각으로 이판사판으로 쫓아왔지만 어차피 유인용으로 데려온 함선들이라 무거운 것들을 전부 내리고 왔기에 덜미를 잡히는 함선은 없었다.
그렇게 쫓고 쫓기는 추격전 끝에 쿠르출라까지 퇴각한 나는 곧장 배를 반전시켰다. 해협이 넓은 게 아니다 보니 모든 함선이 한 번에 지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쿠르출라의 해협은 명량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일본군들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 엉켜서 함선 박살 나는 꼴 보기 싫으면 천천히 차례를 지켜 해협을 지나야 했다.
그리고 그를 위해선 누군가 뒤에서 남아 시간을 벌어줘야 했는데 내 기함인 궁니르는 그런 역할을 하기에 최적의 함선이었다.
일단 어그로는 돛대에 매달려있는 우리의 진정한 성인이자 예수의 재림께서 끌어주실 테니 두말할 것도 없고, 탱킹이야 배가 워낙 크기도 하고 내가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선장. 속도를 줄이고 아군 함선들이 해협을 건너 퇴각할 때까지 대기하게. 병력들 전투 준비시키고.”
“알겠습니다. 전원 전투 준비!!”
선장의 외침에 궁니르가 뱃머리를 돌리고 반전하자 쫓아오던 적들 역시 마찬가지로 속도를 줄이며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듯했다.
하긴, 잘 도망치던 놈이 갑자기 반전해서 전투태세를 갖추면 얘가 왜 이러나 싶겠지. 그렇게 잠깐 동안 유지되던 평화는 베네치아 측에서 날 향해 돌격하는 걸로 깨졌다.
하지만 그 와중에 적 함대 일부가 뒤로 빠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예상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적들의 행동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쩜 저렇게 생각대로 딱딱 움직여주는지… 하긴, 애초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게 설계를 하긴 했었지.
왜, 수학 문제에서도 잘 안 풀리던 문제를 어찌저찌해서 풀어낸 뒤 답을 봤을 때 원하던 답이, 그것도 깔끔하게 1이나 0과 같은 보기가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던가.
그리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무런 의심도 없이 그 답을 고른다. 이처럼 자신이 고른 답이 맞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 이가 본인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어느 정도 대가리가 굳어서 나름대로 지위를 쌓은 이들이라면 더더욱. 아마 저들은 내 의도를 간파해낸 것을 자화자찬하고 있겠지.
“이제 내가 버텨주기만 하면 되겠군.”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님의 기함 혼자서 왜적들을 상대로 3시간 이상을 버텨냈다고 했었지? 나는 이곳에서 저들을 상대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궁금하네.
* * *
“사령관님. 적선들이 쿠르출라 해협 안으로 퇴각하고 있습니다.”
부관의 보고에 티에폴로는 인상을 찌푸리며 지도를 꺼내 들었다.
레반트로 가며 몇 번이고 지나갔던 곳이기에 대략적인 지형은 알고 있었지만 전투에서 어중간한 지식은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만든다.
그 때문에 그는 이 근방이 상세히 그려진 지도를 면밀하게 살폈고 이내 상대가 뭘 노리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사실, 자신처럼 해상전에 잔뼈가 굵은 이에게 라그나르의 얕은수는 어린아이가 낸 꾀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도 뭐, 나름 봐줄 만하군.”
멍청한 잉글랜드 놈들과 병신같은 프랑스 놈들의 해안가를 털어대던 야만인치고는 그럴듯한 잔꾀였다. 장담컨대 자신이 아니라면 분노에 사로잡혀 적의 계책에 당했을 것이다.
‘그런 만큼 별다른 설명도 없이 내 독단으로 일을 처리하면 나중에 승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책임 소재를 두고 개지랄을 할 테니….’
티에폴로는 작게 혀를 차며 명령했다.
“부관. 초요기를 올려서 함장들을 소집하게.”
“예? 지금 초요기를 올리면 적들을 놓칠 텐데요?”
“그럴 일은 없을 테니 내 말대로 초요기나 올리게.”
자신의 명령에 부관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충실하게 명령을 따랐다. 어차피 명령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냥 시키는 대로 하자는 생각이겠지.
그렇게 초요기를 올렸음에도 앞장서서 적들을 추격하던 함선들은 못 본 건지, 아니면 보고도 무시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
자신이 사령관인지 빙다리 핫바지인지 모를 이 상황에 티에폴로는 모멸감을 느꼈지만 저들의 분노를 이해하기에 한번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렇게 퇴각을 명령하는 나팔까지 불자 그마저도 무시할 수는 없었는지 분노로 얼굴이 시뻘게진 가주들과 함장들이 티에폴로의 기함으로 모여들었다.
“이보시오 사령관! 왜 갑자기 우리를 불러 모은 것이오!?”
“당신 덕분에 쫓던 적들을 다 놓치게 생겼소.”
“당장 우리를 불러 모은 이유를 설명하시오!”
성질 급한 이들은 버럭 화를 냈고 안 그런 이들도 침묵을 유지하며 간접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하긴, 자신들의 근본 자체를 부정하는 편지와 시체로 능욕을 하는데 제정신을 유지하는 게 이상하지.
오히려 마리노의 죽음을 기뻐하고 있는 자신이기에 이렇게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보면 볼수록 야비하고 잔꾀를 부리는 야만인이었다.
“다들 진정하시고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큰 목소리로 모두의 시선을 모은 티에폴로는 좌중을 둘러보며 호소하듯 이야기했다.
“용담공은 자신의 명성과 명예가 떨어질 것을 감안하면서까지 무리하게 우리를 도발했습니다. 그 이유가 뭐라 생각하십니까?”
“하, 저 야만인에게 떨어질 명성과 명예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맞는 말씀입니다만 저런 행동은 분명 후일 말이 나올 겁니다. 그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저런 행동을 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티에폴로는 싱긋 웃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습니다. 저희를 도발해 자다르에서 끌어내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저희는 분노에 휩싸여 이곳까지 왔습니다. 헌데 뭔가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그 질문에 모여있는 이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면서 대답하지 않았고 티에폴로는 그런 그들을 향해 놀라운 사실이라도 폭로하듯 이야기했다.
“적들이 동원한 함선의 수가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제야 함장들은 자신들을 짓누르던 분노와 광기에서 벗어나 적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고 티에폴로의 말이 맞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해보니 그렇군. 많이 잡아도 30척 정도인데….”
“우리가 동원한 함선의 숫자를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이상하군.”
“그리고 이게 이 근방의 지도입니다. 보시면 아시다시피 이 해협을 벗어나면 작은 섬들과 함께 넓은 공간이 나옵니다. 대체적으로 이런 지형은….”
“배를 숨기기에 굉장히 좋은 지형이지. 적들의 노림수가 매복이었나.”
“바로 맞추셨습니다. 적들은 여기 이곳. 해협을 벗어나는 부분에 함대를 숨겨놨을 겁니다.”
여기까지 얘기해주자 그들도 느끼는 게 있는지 침음성을 흘리며 말을 아꼈고 티에폴로는 우쭐한 기분을 느끼며 설명을 이어갔다.
“만약 이대로 병력을 끌고 해협 안으로 들어갔다면 우리는 적 함대에게 매복 공격을 받아 전멸했을 겁니다.”
“확실히 저 좁은 해협에서 기습을 받으면 힘들겠군.”
“퇴각을 하려고 해도 여의치 않은 상황이지요.”
노장들이 자신의 말에 공감하며 지지를 표명해주자 티에폴로는 한층 높아진 목소리로 적의 함선, 그중에서도 최후미에 있는 라그나르의 기함을 가리켰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자신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향했고 그곳에는 돛대에 마리노 단돌로의 시체를 매단 라그나르의 기함이 둥실둥실 떠 있었다.
“제가 여러분들을 이렇게 모아서 공격을 중단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놈은 퇴각할 생각조차 안과 있습니다. 이것만 봐도 저들이 뭘 노리고 있는지 명백하지 않습니까?”
“그럼 그대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한다고 보는가?”
단돌로 가문의 가주가 저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판은 이미 자신에게 넘어왔다고 봐도 무방했다.
여기서 자신이 이 해전의 주역이 되어 제노바와 라그나르의 연합함대를 격파한다면 베네치아에서 자신의 입지는 그 누구보다 확고해질 것이다.
“적들의 계책에 걸려든 것처럼 행동하면 됩니다. 그렇게 상대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다가 상대의 계책을 역으로 이용해서 되돌려 주는 거죠.”
“좀 더 자세히 얘기해보게.”
“이쪽에서 적을 맹렬히 공격하되 적당히 적들이 퇴각하게 해주며 시간을 끄는 겁니다. 그 사이, 함대의 일부를 떼어내서 코르출라섬을 빙 돌아 적의 뒤를 잡는다면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을 겁니다.”
이쪽에서 역으로 포위를 하자는 티에폴로의 의견에 해상전에 잔뼈가 굵은 함장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병력이 나뉘게 되면 한쪽이 각개격파 당할 우려가 있네. 적들이 일점돌파를 하면 어떻게 막을 셈인가?”
“포위섬멸진은 그런 리스크를 가지고도 할 정도로 메리트가 있는 전술입니다. 거기에 역으로 뒤를 잡힌 이들이 그런 걸 생각할 틈이나 있겠습니까?”
일반적으로 포위는 적을 섬멸하기에 최적의 전술이었지만 포위로 인한 물리적인 효과를 기대하는 것보단 적의 퇴로를 막고 그로 인한 생기는 심리적 우위를 이용하는 전술이었다.
사실 포위라고 해도 결국 맞붙어 싸우는 건 최전선에 있는 이들뿐이다.
하지만 포위당한 적 입장에서 패배 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과 어디를 둘러봐도 적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시각적인 공포는 병력들의 사기와 전투력을 낮추는 요인이었다.
아군의 패배가 곧 죽음이라면 그 누가 겁을 집어먹지 않겠는가.
“좋아. 자네 말대로 하지. 외부로 돌아갈 함대는 내가 맡겠네.”
“적들도 많은 함대를 숨기고 있을 테니 50척 정도를 이끌고 돌아가면 될 것 같습니다. 시간은 어느 정도 드리면 되겠습니까?”
잠시 고민하던 단돌로 가문의 가주는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들었다.
“세 시간이면 충분하네.”
“알겠습니다. 그럼 세 시간 후에 만나시죠.”
작전이 정해지자 티에폴로는 바쁘게 움직였다. 이쪽에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며 어영부영 전투를 끌고 가는 게 들키면 적들이 이쪽의 계책을 알아채고 도망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만약 그렇게 되면 개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다. 자신 있게 함대를 끌고 나가서 자다르에 처박혀만 있다가 저런 정신 나간 도발을 받은 것도 모자라 적이 도망치는 걸 그대로 지켜만 봤다?
자신에 대한 지지는 바닥을 칠 것이며 비겁자라는 낙인이 자신에게 찍힐 것이다. 수년간 정치판에서 구르며 그걸 깨달았기에 티에폴로는 병력들을 다그치며 이전보다 공세를 강화했다.
물론 그 공세의 중심에는 라그나르의 기함이 있었다.
* * *
적들의 공격은 매서웠지만 버텨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수많은 배들이 도선을 시도하고 배를 불태우려 했지만 그때마다 자신은 버텨냈다.
물론 그를 위해서 다시 한번 오딘의 힘을 빌려야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신의 기적이라는 건 마약과 같아서 쓰면 쓸수록 중독되는 법이었으니까.
그래도 자신의 몸을 바친 대가는 확실했다. 적들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범의 아가리를 향해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지금, 머리를 넘어서 목 언저리까지 들이밀었기에 나는 지체하지 않고 전투 나팔을 불며 함대를 반전시켰다.
두 시간 전쯤에 힐데와 벨렌테가 이끄는 함선들이 오고 있다는 보고도 받았으니 지금쯤이면 적의 후미를 붙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얘기는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던 기나긴 모멸과 핍박의 시간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는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