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작전과 전술이 정해지자 나는 예정대로 미리 잠복시킬 함대를 북부로 올려보냈다.
함대는 중, 소형 갤리를 포함해 40척 정도 올려보냈는데 적 함대의 후방을 급습하고 퇴각로를 막아내는 게 최우선 과제였기에 버프 능력이 뛰어난 힐데와 이비를 묶어서 보냈다.
사실 위험성이 큰 임무였기에 둘은 계속 내 곁에 두려 했지만 힐데는 물론이요, 드물게 이비까지 스스로 지원을 했기에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둘을 올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제노바의 총독 역시 자신의 아들인 벨렌테와 제노바에서 내로라하는 함장들을 올려보냈고 이는 나나 제노바 입장에서 엄청난 도박이었다.
만약 그들이 베네치아의 공격에 전멸하는 순간 승패는 둘째 치고 더 이상 전쟁을 지속하는 게 불가능했기에 나는 주목을 끌고자 남아있는 본대도 빠르게 북상시켰다.
우리가 대놓고 어그로를 끌며 크레타에서 아드리아해로 진입하니 베네치아에서도 기다렸다는 듯이 함대를 끌고 나왔다.
그렇게 무사히 코르출라에 도착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자니 썩 달갑지 않은 소식이 전해져왔다.
“적 함대가 자다르에 정박 중이라고?”
“예. 그곳에서 최종보급을 마친 뒤 저희와 일전을 치를 생각인 것 같습니다.”
오토의 보고에 나는 돛대에 몸을 기대며 생각에 잠겼다. 자다르의 인근에 있는 코르나티 제도는 이곳 코르출라보다 해안선이 더 복잡하며 수많은 섬들이 얽혀있는 곳이다.
그 모양새가 마치 미로 같아서 함부로 들어갔다간 되려 우리가 그곳에 갇히고 말 것이다. 지형상 많은 함선을 투입하는 것도 불가능했기에 만약 저들이 저기서 나오지 않고 버틴다면 곤란해지는 건 우리였다.
해전도 결국 공성과 수성처럼 장단점이 분명했는데 우리처럼 원정을 온 입장에선 보급이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
일단 보급선이 저쪽이 훨씬 가까운 데다 우리는 저들의 영역권 안으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개새끼도 자기 집에서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하지 않던가.
이전처럼 해적질을 할 때는 내 것도 내 것, 네 것도 내 것이라는 날강도의 마인드로 보급이 가능했지만 덩치가 이렇게 커지게 되면 약탈도 불가능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이 근방의 땅을 약탈해 물자를 보급하고 싶었지만 애초에 여긴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영토니 그건 논외다.
사실 저들이 정박 중인 자다르도 베네치아의 영토라기보단 4차 십자군 당시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영토였던 자다르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강제로 점거한 것에 불과했다.
“거 생각할수록 양아치 새끼들이네?”
“예?”
“아니, 혼잣말이니 신경 끄게. 그나저나 자다르라… 그놈들이 거기 틀어박히면 곤란해지겠군.”
“크게 문제 될 게 있습니까? 이쪽도 보급이 까다로워지겠지만 반대로 저들도 무역이 봉쇄된 것 아닙니까?”
그 말은 맞지만 이런 건 결국 치킨게임이다. 시일이 끌릴수록 보급이 불안정해지는 우리와, 무역이 중단돼 손해가 막심해지는 베네치아.
사실 리스크는 엇비슷해 보이지만 제노바 역시 모든 손해를 감수하고 상선까지 끌고 왔기에 시간이 끌려봤자 아쉬운 건 우리였다.
괜히 적 상선들을 털어보겠다고 함대를 나누거나 펼쳤다가 적 함선에 뒤를 잡혀서 격파당할 수도 있었고.
“전쟁에서 공격자는 늘 힘든 법이지. 그리고 그건 해전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네. 차라리 이쪽의 함대가 숫자라도 많다면 베네치아를 위협해볼 테지만… 그건 또 아니거든.”
“허면 따로 생각해두신 방안이 있으십니까?”
“도발을 해줘야지. 저쪽에서 도저히 참지 못할 정도로.”
예로부터 시체 능욕은 엄청난 도발이었다. FPS에서 죽인 시체 위에서 티배깅을 하는 것도 결국은 상대를 도발하기 위해서가 아니던가?
그리고 우리에겐 그렇게 써먹기에 딱 좋은 시체가 있었다. 시체 보존? 신의라고 불리는 이비가 있는데 뭐가 걱정인가?
물론 이런 짓을 하면 기껏 쌓아 올린 명성이나 명예가 깎이는 것은 물론이요, 도덕적으로 지탄받을 테지만… 어쩌겠나. 일단은 살고 봐야지.
* * *
<베네치아령 자다르>
“이보시오 티에폴로 경! 대체 이곳에 처박혀있는 게 며칠째요!?”
“진정들 하십시오. 의원님들.”
이곳 자다르에 정박할 때부터 작전의 개요를 설명해줬지만, 저 늙은이들은 치매라도 걸린 건지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을 찾아와 적과 싸울 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걸 애써 설득하면서 시일을 보내고 있었지만 이렇게 뭉쳐서 자신에게 몰려온 것을 보니 오늘 확답을 받아가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소? 100척이 넘는 이런 대함대를 끌고 나와서 한다는 게 고작 여기 자다르에 처박혀서 노가리나 까고 있는 걸 보고도 진정할 수 있단 말이오?”
“의원님. 몇 번이고 말씀드린 것처럼 저희는 이곳에 있는 것만으로, 적들을 압박하는 게 가능합니다. 적과 맞서 싸워서 이기는 것도 좋지만 제일 좋은 건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입니다.”
“하, 혹시 그대가 싸우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오?”
도를 넘은 모욕이었지만 티에폴로는 애써 화를 눌러 담으며 사근사근하게 그들을 달랬다.
“여러 의원분들의 초조함과 분노를 제가 모르겠습니까? 저 역시 마리노 단돌로 경이 죽은 것에 대해 마음속 깊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글쎄… 티에폴로 그대가 과연 내 조카의 죽음을 슬퍼할지 모르겠군. 오히려 내 조카가 죽은 걸 기회로 삼고 있는 게 아닌가?”
뜬금없이 새롭게 취임한 단돌로 가문의 가주가 자신을 지목해 헛소리를 내뱉자 티에폴로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가주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기회라니요?”
“무슨 말이긴, 그대가 도제와 짜고 내 조카를 꼬드겨서 전쟁에 참전시킨 게 아니냐는 거지.”
그 말에 티에폴로는 어이가 없었다. 아니, 누가 누구한테 큰소리란 말인가. 애초에 마리노 그 개자식이 직접 전쟁에 참전하겠다며 병력을 내어달라고 하지 않았나?
오히려 그쪽에서 자기들 멋대로 병력을 끌고 카노사를 침공해 도발을 한 것도 모자라, 해전에서 개박살 나서 똥을 갈겨버린 채 죽어버린 게 누구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거기에 저 음흉한 숙부라는 놈은 조카인 마리노가 죽었기에 가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오히려 이쪽에 고맙다고 절을 하지는 못할망정 저렇게 시체팔이를 해 먹다니.
그 행태가 심히 역겨웠지만 그게 정치고 그게 현실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자신들의 대의명분은 복수였고 명분은 단돌로 가문에 있었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저들이 저렇게 강하게 출진을 강요하는 건 실제로 출진을 하자는 얘기가 아니라 자신을 압박하기 위함이었다.
어차피 단돌로가 죽은 이상 다음 도제는 자신에게 돌아올 테고 저쪽에서는 되지도 못할 도제를 욕심내느니 그를 빌미로 이것저것 얻어내겠다는 거겠지.
“가주님. 제 이름과 가문의 명예, 그리고 이 목을 걸고 단언하건대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비록 제가 마리노 단돌로 경과 정치적으로 부딪히긴 했지만 다 같은 베네치아의 자식들이 아닙니까? 부디 제 진심을 의심치 말아 주십시오.”
“흐음….”
“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단돌로 가문에 대한 애도의 의미로 획득한 전리품의 절반과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의 목, 그리고 의석의 일부를 드리겠습니다.”
티에폴로가 통 크게 양보하자 이곳에 모인 의원들이 눈이 휘둥그레졌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비록 이것들이 마리노 단돌로 경의 죽음을 위로하지는 못하겠지만 단돌로 가문의 일원과 나아가 베네치아 시민들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는 제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좋소! 그대가 그렇게까지 얘기한다면 내 그대가 내민 화해의 손길을 받아들이리다.”
단돌로 가문의 가주는 웃으며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고 티에폴로는 그 가증스러운 미소가 역겨웠지만, 같이 웃으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가증스러운 개새끼. 처음부터 의석을 늘리는 게 목적이었겠지. 이쯤 되면 마리노 단돌로가 불쌍할 지경이다.
아니,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본인이 살아있을 때보다 죽어서 그 쓸모가 더 많아졌으니 결과적으로 본인도 만족할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 모두가 내심 만족할만한 성과를 얻었지만, 라그나르는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의 만행을 온 천하에 드러냈다.
“사, 사령관님!!!”
아무도 들어오지 말라고 했지만 전령이 저렇게 허겁지겁 달려오는 걸 보면 급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무슨 일인가?”
“적들이 함대를 이끌고 코르나티 제도로 진입했습니다!”
전령의 보고에 티에폴로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며 쾌재를 불렀다. 솔직히 자신도 여기에 계속 정박하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결국 저기서 참지 못하고 먼저 튀어나온 모양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니 참다못해 뛰쳐나온 모양이군. 좋아. 우리도 출격 준비를….”
“저… 사령관님.”
자신의 말을 중간에 잘라먹는 전령의 모습에 티에폴로는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뭔가?”
자신의 물음에도 전령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자신과 이곳에 있는 의원들의 눈치를 보았고 호통을 치며 다그치자 전령은 더듬더듬 이야기했다.
“그게… 저들이 마리노 단돌로 경의 시체를… 그… 돛대에 매달아 놨습니다.”
“뭐… 뭐라고?”
“이, 이, 이런 천하에 죽일 놈이!!!!”
순식간에 방 안이 소란스러워졌고 그 와중에 전령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품속에서 편지를 꺼내 자신에게 바쳤다.
“그리고 이게 용담공이 보낸 편지입니다.”
전령이 내미는 편지를 보며 티에폴로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지만 이미 주사위는 자신의 손을 떠났다.
지금 이 편지를 펼치게 되면 도저히 감당이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는 편지를 받아들 수밖에 없었다. 이곳에 있는 게 자기 혼자라면 몰라도 재수 없게 각 가문의 가주나 전권을 위임받은 이들이 함께하고 있었으니까.
[안녕하시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뭐시기… 어… 음… 십자군? 뭐 그런 비슷한 친구들.
내가 누군지는 굳이 그대들에게 소개할 필요는 없을 거라 믿소. 이 악물고 모른척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날 모르는 게 더 웃긴 일이지.
아무튼, 내가 자칭 십자군인 그대들에게 편지를 보낸 건… 아니, 근데 그대들이 진짜 십자군은 맞소?
내가 이교도라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원래 신의 이름을 등에 업은 십자군이라는 자들은 같은 기독교도들의 도시를 공격해 약탈하고 도움을 요청한 이들의 뒤통수를 쳐야 한다는 규율이라도 있는 것이오?
아니면 그대들의 신이 가라사대 ‘그대들의 동포와 그대들의 구원을 바라는 이들을 공격하고 약탈하라’라고 가르치셨던가?
아, 딱히 그대들에게 시비를 걸거나 그 숭고한 대의를 조롱하려는 건 아니었소. 본 공작은 스스로가 오딘을 섬기고 있는 만큼 다른 종교에도 관대하니까.
잡설이 길어졌는데 본 공작이 이 편지를 보낸 건 얼마 전 그대들과 전투를 벌이며 그대들이 말하는 ‘기적’을 목도했기 때문이오.
그대들과 한창 전투를 할 무렵 ‘마리노 단돌로’라는 고귀한 이가 전쟁의 비참함과 사람들이 흘리는 피에 가슴이 아팠는지 그 모든 죄를 뒤집어쓰고 돛대에 못 박혀 스스로 죽음을 맞이했소.
그 숭고한 희생으로 인해 우리는 전쟁을 멈출 수 있었으니 어찌 그를 예수의 재림이자 성인이라고 시성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이오?
그러니 베네치아인들이여. 나는 비록 이교도라지만 ‘성인 마리노 단돌로’의 거룩함에 감동한바 그의 은총과 은혜를 널리 알리고자 그가 순교했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놨으니 그대들도 나와서 예수의 재림을 목격하도록 하시오.]
편지를 다 읽은 티에폴로는 헛웃음을 지었다. 라그나르 이 개자식은 이쪽의 사정을 꿰뚫어 보고 자신의 명예와 명성이 바닥 치는 걸 감안하고서라도 이런 짓을 한 것이었다.
이제 자신들은 어쩔 수 없이 함대를 이끌고 출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상태에서 분노하지 않는다면 자신들이 내건 명분 자체가 희박해지며 정치적으로 공격받을 테니까.
그 때문에 티에폴로는 불구덩이에 걸어가는 심정으로 전 함대에 동원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이런 상황을 만든 라그나르를 향해 저주를 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라그나르 이 비열한 자식. 내 반드시 네놈의 배를 갈라서 간이 얼마나 부어있는지 확인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