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니케아 제국 – 님페온(현 이즈미르)>
거대한 황궁의 거처. 그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집무실의 중앙에 앉아있던 사내는 흥미롭다는 얼굴로 자신에게 온 편지를 읽고 있었다.
[안녕하시오. 바실레우스(로마 황제에 대한 칭호). 진정한 로마 제국의 황제여.
본인은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인 라그나르 로드브로크요. 진정한 로마 제국의 황제 앞에서 신성 로마 제국의 이름을 칭하려니 부끄럽구려. 하지만 어쩌겠소? 내가 이 이름을 지은 게 아닌데.
아무튼, 내가 그동안 일면식도 없던 그대에게 이렇게 편지를 보낸 건 그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어서 그렇소.
그대에겐 치부를 들추는 일이 될지 모르겠지만, 동로마 제국은 엔리코 단돌로에 의해서 멸망했었지. 그리고 그대라는 걸출한 황제에 의해서 다시 부활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로마가 한 번 멸망했으며 로마 문화의 정수이자 살아있는 로마 그 자체인 콘스탄티노플을 날강도들에게 빼앗겼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소.
테오도로스. 로마 제국의 황제여. 베네치아에 대한 분노와 증오가 여전히 그대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소? 생존을 위해 그들과 타협하지 않을 거라는 굳건한 의지가 남아 있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대에게 원수를 갚을 기회를 주고자 하오.
물론 현재 로마가 많이 힘들고 해군력이 이전과 같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꼭 전장에서 무기를 들고 싸우는 것만 싸움은 아니잖소?
현재 본 공작과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제노바 공화국이 베네치아를 상대로 싸움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거라 믿소.
이제 곧 그들과의 결전이 머지않았소. 그때가 되면 그대들이 우리를 지원해주시오.
그리하면 그대들은 기나긴 모멸과 핍박 속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구원함은 물론이요, 과거의 찬란했던 영광의 편린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그대가 내 제안을 승낙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대와 그대의 국민들을 위해서 한 가지 선물을 줄까 하오. 구체적으로는 엔리코 단돌로의 손자인 마리노 단돌로의 시체를 보낼 생각이오.
그의 시체가 어떤 의미와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는 내가 더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거라 믿소.
말이 길어졌는데 부디 그대가 정의를 실행하고 땅에 떨어진 대의를 바로잡는 싸움에 동참하기를 빌고 있겠소. 로마를 다시 일으켜 세운 그대라면 분명 현명한 선택을 하지 않겠소?
로마의 황제여. 언젠가 그대의 로마가 다시 한번 우뚝 서서 그대의 두 발로 콘스탄티노플을 밟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빌고 있겠소.
로마 인빅타.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그 자리에서 편지를 다 읽은 테오도로스는 코웃음 치며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이를 향해 편지를 내밀었다.
“요안니스.”
“예. 폐하.”
“신성 제국의 라그나르 공작이 보낸 편지인데 한번 읽어보고 자네 생각을 들려주게나.”
자신의 장인이자 니케아 제국의 황제인 테오도로스 1세의 명령에 요안니스 바타치스는 조용히 편지를 펼쳐서 읽어내려갔다.
황제는 요안니스가 읽을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주었고 몇 번이고 편지를 읽으며 자신이 빠뜨린 부분이 없나 확인한 요안니스는 당황스러운 말투로 대답했다.
“이건… 저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것 같습니다.”
“자네가 봐도 그렇지? 표현이야 부드럽고 정중한 어투를 내비치고 있지만, 실상은 우리에게 베네치아와 제노바.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라고 겁박하고 있는 거지.”
“무시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베네치아가 저희의 원수는 맞지만, 그곳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일세. 우리 고귀한 야만인인 용담공께서는 태풍의 눈이 되어 전 세계에 그 용맹을 떨치고 있으니까.”
신성 로마 제국은 물론이요 타국의 귀족과 왕들조차 프리드리히가 칼리나와 라그나르에게 굴복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겉으로 드러나는 거야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사자공에게 아웃로라는 형벌을 내리며 그를 숙청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는데 바이에른을 받아내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 짓는다?
누가 봐도 칼리나와 라그나르의 입김이 들어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라그나르의 편지를 정중한 거절도 아니고 무시한다? 그거야말로 재앙을 불러들이는 길이었다.
“일단 우리가 용담공의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의 장단점을 얘기해보게.”
“장점이야 베네치아에 복수함으로써 우리가 로마 제국의 정당한 후계자임을 널리 알릴 수 있음은 물론 라그나르 공작과 제노바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지요.”
“단점은?”
“만약 라그나르가 패배할 시… 아국의 해안선은 더 이상 우린 것이 아니게 될 겁니다. 편지에 적혀있던 것처럼 아국의 해군력은 형편없으니까요.”
“그대의 말이 맞네. 베네치아에 대한 복수와 마리노 단돌로의 시체라… 탐나기는 하지만 우리가 손을 뻗었다간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걸세.”
비록 베네치아가 로마를 멸망시키긴 했지만 니케아는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몰려있었다.
서부의 라틴제국과 불가리아를 상대해야 함은 물론이요, 자신들의 봉신국이었던 룸 술탄국마저 반기를 들고 일어난 상황이었으니까.
그러니 베네치아를 공격하자는 라그나르의 제안은 독이 든 성배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용담공에게 우리는 그 누구도 택하지 않을 거라 답장을 보내게. 당분간 아나톨리아 지역의 수복에 힘을 쏟아야 하는데 서쪽에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나.”
“하지만 이 제안을 거절한 게 알려지면 비난은 물론이요 정치적인 공격을 피할 수 없을 겁니다.”
“그깟 명분에 얽매여 있을 수는 없네. 지금 니케아는 기반이 취약해. 내가 죽고 자네가 황제가 돼서 어느 정도 안정된 상황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네.”
“폐하. 만약, 제노바와 라그나르 공작이 베네치아를 상대로 승리한다면 저희는 오늘 이 선택을 후회할지도 모릅니다.”
“원래 모든 선택이 그렇다네. 지도자는 늘 선택의 기로에 설 수밖에 없고 자신의 결정이 100% 옳다는 확신을 가지지 못한 채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네. 그리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를 받아들이고 책임지는 게 지도자가 짊어져야 할 짐이라네.”
“…….”
“언젠가 자네도 지도자가 되면 내 말을 이해하게 될 걸세.”
테오도로스의 말에 요안니스는 천천히 라그나르에게 보낼 거절의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부디 테오도로스의 판단이 옳기를 바라면서.
* * *
<이피로스 친왕국 ― 아르타>
쾅!
“드디어! 기회가 왔군.”
이피로스 친왕국의 친왕 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는 신성 제국의 공작인 라그나르가 보낸 편지를 보며 엄청난 희열을 느꼈다.
4차 십자군에 의해 동로마가 멸망한 이후 자신은 제국을 부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해왔다. 그리고 그 노력에는 멸망의 원흉이라고 할 수 있는 베네치아에 대한 굴종도 있었다.
“제노바가 베네치아와의 전투에서 승리만 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씌워진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제노바가 새로운 야욕의 손을 뻗을 수도 있겠지만, 베네치아를 완전히 짓누르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그런 상황에서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신들에게 굴복을 강요할 수는 없겠지.
거기에 라그나르 공작은 칼리나 변경백의 심복이었고 그녀는 테살로니카 왕국과 전쟁을 벌인 전적도 있지 않던가.
그리고 동맹에 대한 대가로 라그나르 공작이 요구한 건 자신들의 해안선을 이용하게 해주고 침묵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제노바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 자체를 베네치아에 들키는 순간 왕국이 초토화되리라는 건 안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제국을 멸망시킨 이들에게 굴복하며 구차하게 삶을 연명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신은 죽는 그 순간까지 자랑스러운 로마 제국의 일원으로 살고 싶었다.
“악마는 가장 간절할 때 신의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고 하지. 라그나르. 그대가 악마일지 천사일지는 모르지만, 그대의 승리를 간절히 빌고 있겠네.”
* * *
<아이유브 왕조 ― 데르나>
“니케아는 룸 술탄국과의 전쟁에 여력을 집중하고 싶다며 완곡한 거절을 한 반면 이피로스는 쌍수를 들고 환영이라….”
“아무래도 니케아는 저희가 전쟁에서 질 거라 판단한 모양이오.”
분개한 듯한 제노바의 총독. 조반니 1세의 말에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법하지요. 이번에 승리를 거뒀다지만 가벼운 전초전에 불과했고 총대장도 그 마리오? 마리노? 하는 그런 애송이가 맡지 않았습니까?”
베네치아는 긴 시간 동안 자신들의 저력을 만천하에 증명했지만 제노바는 아니다. 뭐… 피사나 아말피에 비하면 끝까지 살아남기도 했지만 베네치아에 비하면 끗발이 밀리는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 이름을 떨치기는 했지만, 해전에서 활약한 적은 없었고. 그러니 섣불리 우리의 손을 들어주기 힘들었겠지.
“우리의 제의를 거절한 걸 두고두고 후회하게 해줘야겠구려.”
“하하하, 저와 총독 각하, 그리고 아이유브가 함께하는데 패배할 리가 있겠습니까?”
실제로 이번 승리에 고무된 것인지 제노바는 영혼까지 긁어모아서 함대를 끌고 왔는데 그 수가 무려 백 척이었다.
물론 전부 다 중대형 갤리는 아니고 소형갤리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시 국가에서 함선 백 척을 징집했다는 건 말 그대로 미래까지 걸었다는 얘기였다.
그것도 모자라 총독이 자신의 기함까지 끌고 왔으니 제노바가 이번 전쟁에 얼마나 진심인지는 더 말할 것도 없으리라.
“물론 나 역시 승리를 믿어 의심치 않소. 허나 어디를 전장으로 삼을지 고민이구려.”
“오, 그 부분은 제가 총독 각하의 근심을 덜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호오. 따로 생각해두신 장소라도 있는 거요?”
“예. 이번에 이피로스가 저희와 함께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을 이용할 생각입니다.”
사실 내가 이피로스나 니케아를 끌어들이려고 한 건 그들의 해안선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외는 솔직히 기대도 안 했다. 니케아의 해군이 개털인 것처럼 이피로스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자신감 넘치는 내 말에 총독은 어디 한번 이야기해보라는 듯 침묵한 채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지도를 펼쳐 설명을 시작했다.
“일단 전투는 아드리아해의 코르출라섬에서 벌일 생각입니다.”
“흠. 적을 맞이해서 싸우기에 괜찮은 지형이구려.”
“방금 지적하신 것처럼 반도와 코르출라섬 사이에 좁은 해협이 있는데 이곳이 전투의 분수령이 될 겁니다.”
“헌데 너무 깊숙이 들어가는 것 아니오? 이피로스에서 우리를 속이는 것일 수도 있지 않소?”
“그래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함선의 이동 날짜는 당일날 통보하기로 했습니다. 거기에 퇴각로 확보를 위해서 시판섬에 정박시킬 생각이고요.”
“흠… 계속해보시오.”
“예. 일단 전투 전에 미리 중소형 갤리 40척 정도를 이동시킬 생각입니다. 2차에 걸쳐 베네치아의 깃발을 달고 나눠 보내면 크게 의심받지는 않을 겁니다.”
“베네치아의 상단처럼 위장하자는 말이구려.”
“그렇습니다. 그리고 결전의 날에 아군 함선을 끌고 아드리아해로 진입할 겁니다. 적들도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으니 아군 함대가 진입하는 걸 확인하면 바로 튀어나올 겁니다. 그때 적들을 이곳 코르출라섬으로 유인해서 일거에 소멸할 생각입니다.”
코르출라섬 북쪽의 해협은 단적으로 얘기하면 한산도 대첩이 벌어졌던 곳과 비슷한 지형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1차로 적들을 유인한 뒤 적들이 쫓아오면 넓은 곳에서 한 번에 덮쳐서 분쇄할 생각이었다.
“작전 자체는 나쁘지 않소만 만약 적들이 쫓아오지 않는다면 어쩔 생각이오?”
“저희보다 아드리아해의 지형을 더 잘 알고 있는 만큼 당연히 매복을 알아차리겠지요. 만약 매복을 알아차린다면 역으로 이쪽의 함대를 쌈 싸 먹기 위해 함대를 나눌 겁니다. 그때 미리 숨겨뒀던 함대를 움직여 적의 퇴로를 막고 격파하는 겁니다.”
“퇴각 과정에서 이쪽의 진영이 흐트러지면 오히려 역으로 공격을 받을 염려도 있소.”
“퇴각하는 최후미에는 제가 있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가장 먼저 들어가서, 마지막에 나오는 게 제 기함의 신조니까요.”
내 호언장담에 총독은 호탕하게 웃으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그대의 용맹을 가장 잘 나타내는 문장이로군. 좋소. 그대의 작전대로 해 봅시다.”
총독은 나쁘지 않은 작전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얘기한 작전은 실제로 제노바가 베네치아를 상대로 써먹은 작전이었고 이 해전에서 대승을 거뒀다.
난 이미 역사 속에서 한번 증명된 전투를 그때보다 우월하고 압도적인 병력을 투입해서 다시 한번 진행하는 것뿐이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삽화
삽화
코르출라섬 해전의 작전 개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