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5화
베네치아와의 전투를 마무리 지은 나는 기본적인 정비를 위해 함대를 크레타 남부에 있는 크레도스섬에 정착시켰다.
“벨렌테. 전투 결과는 집계됐나?”
“예. 공작 전하. 일단 적의 함선 13척 중 6척을 나포했지만 2척은 침수가 진행되고 있어 총합 4척을 나포했으며, 4척은 전투 중에 침몰했고 3척은 저희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쳤습니다.”
“4척이라… 생각보다 적지만 그래도 대형 갤리를 2척이나 건진 게 다행이군.”
“예. 네 척 다 간단한 보수만 거치면 지금 당장이라도 운용할 수 있지만 일단은 제노바로 끌고 가서 수리를 받는 걸 추천드립니다. 가는 김에 아군 함선들도 정비를 받고요.”
하긴, 베네치아에서 이렇게 털리고 그냥 넘어갈 리 없으니 굳이 해적질을 더 하는 것보단 배들을 수리하고 전열을 가다듬는 게 낫겠지.
“좋아. 그건 자네 말대로 하지. 헌데 전리품의 분배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알 아딜 경과 의논해봐야겠지만 공작 전하께서 대형 갤리 1척, 저희가 대형 갤리 1척, 아이유브가 중형 갤리 2척을 가져가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얼핏 보면 공평해 보이지만 그래도 급의 차이는 넘을 수 없었다. 단적으로 아반떼가 아무리 잘 나와도 소나타를 넘어설 수는 없단 말이었다.
“아이유브 쪽에서 반발할 텐데?”
“그건 그렇겠지만 아이유브는 저런 대형 갤리를 만들어 낼 여력이 없습니다. 저희 제노바와 공작 각하의 동맹 관계야 이미 공공연히 알려졌지만, 아이유브와의 관계는 비밀이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
“헌데 아이유브에서 저런 대형 갤리를 운용한다면 타국에서 뭐라 판단하겠습니까?”
“흠, 그러니까 굳이 대형 갤리를 넘겨줘서 쓸데없는 의심을 받을 필요는 없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그렇게 생각처럼 딱딱 돌아가는 건 아니다.
“벨렌테. 그게 합리적일지라도 때론 감성이 이성을 넘어설 때가 있다네. 자네처럼 상인 출신은 모든 걸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할지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지 않다네.”
“….”
“아이유브는 엄연히 우리의 동맹이고 함께 싸우며 고귀한 피를 흘렸다네. 그런 그들에게 합리라는 검과 이성이라는 방패로 압박하며 분배를 제한한다면 그들이 뭐라 생각하겠는가?”
뭐,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하나하나 차곡차곡 쌓이게 되면 나중에 통수라는 이름으로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을 공평하게 나눌 수는 없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말이다.
“공작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아니, 그렇게 하나하나 배워나가면 된다네. 자네는 아직 젊지 않은가?”
풀죽은 표정의 벨렌테를 적당히 위로한 나는 전리품 목록을 훑어보며 얘기했다.
“내 몫으로 할당된 대형 갤리를 아이유브에게 넘겨주도록 하지. 다만 그냥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나는 보안을 위해 벨렌테에게 귓속말을 속삭였고 그는 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번에 베네치아와의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대형 갤리 하나쯤이야 우스울 정도로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굳이 사소한 것에 연연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실제로 이번 전투에서 내 지분이 제일 큰 만큼 생색은 최대한 내야겠지.
“좋아. 함선에 대한 분배는 이쯤하고 물자는… 적당히 나누면 되겠지. 포로들은 어쩔 셈인가?”
“아이유브에서 데려가기에는 부담이 되지 않겠습니까? 저희와 공작 전하께서 가져가는 대신 아이유브에는 물자와 은화로 보충해주면 될 겁니다.”
“하긴, 사람을 데려가는 건 더 위험하지. 베네치아를 조지고 난 뒤라면 모를까.”
괜히 베네치아에서 여론전을 벌이거나 교황을 이용해 압박하면 이쪽만 골치 아파진다.
그 과정에서 내 명성에 금이라도 가면 신성 제국에서 기껏 올려놓은 내 입지도 함께 격하될 것이다. 제발 교황이 내가 샤코 디 로마(로마 약탈)를 하지 않게 해줬으면 좋겠네.
“다만 저쪽도 함선 기술자를 원할 테니 후일 저희 쪽에서 기술자들을 파견해주는 게 좋을 듯합니다.”
“좋아. 자네가 그렇게 운을 트면 내가 지원사격을 해주겠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게 가장 큰 대어인데… 마리노 단돌로에 대한 처분이 남아있습니다.”
“그 뱃가죽에 구멍 뚫려서 죽은 친구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아시겠지만 그는 엔리코 단돌로의 손자이고 이는 어떻게 사용하냐에 따라 정치적으로 큰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엔리코 단돌로의 손자라는 건 꽤 쓸 만한 호칭이었으니까.
“물론 그를 죽이신 건 라그나르 전하이시기 때문에 시체에 대한 권한과 처분은 오직 용담공 전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자네 의견은 어떤가? 내가 그 시체를 어떻게 처분해야 한다고 보나?”
“저라면 당장 제노바로 보내서 아국의 울분을 풀겠습니다만… 이는 하책이고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선 동로마에 보내셔야 합니다.”
“동로마… 동로마라. 지금까지 우리와 동로마는 별다른 교류가 없었는데 굳이 그들에게 보내야 할 이유가 있나?”
“동로마의 잔당은 지금 4차 십자군으로 인해 아나톨리아로 쫓겨나있는 데다, 불가리아는 물론 룸 술탄국과도 싸우며 여러모로 상황이 열악한 상태입니다. 이때 동로마를 멸망시킨 장본인인 엔리코 단돌로의 손자의 시체는 제국민들의 사기를 돋울 장작이 되어줄 겁니다.”
“뭐, 정치적으로 그렇겠지. 하지만 나는 동로마에 시체를 보내야 할 이유를 물었네.”
“정확히는 동로마가 아닌 이피로스 친왕국에 보내는 겁니다.”
이피로스 친왕국. 사실 동로마가 4차 십자군에 의해서 멸망한 뒤로 여러 망명 제국들이 세워졌는데 크게 니케아 제국과 트라페준타 제국, 그리고 이피로스 친왕국 등이 세워졌다.
특이점은 니케아와 트라페준타는 지금의 터키 영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나톨리아 지역에 세워졌지만 이피로스 친왕국은 지금의 알바니아와 그리스 서부에 세워졌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이는 지정학적으로 아드리아해로 진입하는 입구 지역이었기에 이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손쉽게 베네치아를 압박할 수 있었다.
“흠… 베네치아와 일전을 벌일 때 그들에게 도움을 받거나 아니면 중립을 요청하자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현재 세 개의 제국은 서로가 적통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이피로스의 통치자인 미하일 콤니노스 두카스는 꽤 걸출한 인물입니다. 실제로 세 제국 중 콘스탄티노플을 가장 먼저 탈환할 인물이라 평 받고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니케아나 트라페준타와는 척을 져야 한다는 말이 아닌가?”
나는 원역사에서 결국은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다시 동로마 제국의 중흥기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니케아와 대립각을 세우는 게 썩 좋은 생각은 아니다.
“물론 그건 그렇겠습니다만 모든 걸 다 얻을 순 없는 법입니다. 저는 조언을 드렸고 판단은 공작 전하께서 내리시면 됩니다.”
벨렌테의 말에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 보면 손제리도 관우의 목을 벤 뒤 조조에게 보냈는데 이는 유비의 분노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일단 흑해에 있는 트라페준타는 제외하고… 이피로스와 니케아에 전령을 보내서 답변을 들어보도록 하세. 신성 제국 황제도 본인이 싫으면 안 하는 법인데 시체를 준다고 해도 싫다고 하면 별수 없는 것 아니겠나?”
사실, 이건 단순히 시체를 넘겨준다는 걸 떠나 두 제국에게 베네치아와 제노바. 둘 중에 어떤 해상도시를 택할 것인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차피 급한 건 베네치아니 우리는 느긋하게 그들의 선택을 보고 난 뒤에 행동을 결정하면 될 것이다.
* * *
“흐음. 그러니까 공작 전하께서는 저 대형 갤리를 저희에게 넘겨준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아이유브도 저희와 함께 싸운 혈맹인데 뭐라도 얻어가는 게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알 아딜은 난처한 표정으로 내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실제로 이번 전투에서 가장 큰 공적을 세운 건 용담공 전하가 아니십니까? 가장 큰 공을 세우셨는데 그에 비해 가져가는 전리품이 적으면 훗날 불화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말하는 걸 보니 본인도 욕심이 나기는 하지만 차마 달라고 할 용기는 없었나 보다. 원래 버스를 탔으면 나대지 않고 조용히 있는 게 국룰 아니던가.
“그럼 대신이라고 하기는 뭐하지만 포로들은 용담공 전하와 제노바에서 가져가도 되겠습니까? 물론 그에 해당하는 물자와 돈은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선박 기술자들을 원하신다면 이쪽에서 파견해드릴 용의도 있고요.
벨렌테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더 보탰다.
“그게 좋겠습니다. 거기에 알 아딜 경께서도 공적이 필요하시지 않습니까?”
이미 아이유브의 술탄인 살라딘에게 견제를 받고 있는 만큼 알 아딜은 살라딘도 어쩌지 못할 커다란 공적이 필요했다. 그런 그에게 대형 갤리의 입수와 기술자들의 수입은 그 입지를 크게 강화시켜 줄 터였다.
“으음… 알겠습니다.”
“다만 지금은 한 척이라도 아쉬운 상황이니 베네치아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에 인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아이유브는 대형 갤리를 몰 여력도 안 됐기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전리품 분배는 이 정도로 마무리 짓고 일단은 제노바로 귀환해서 한 번 정비를 마칠 생각인데 알 아딜 경께서는 어쩌시겠습니까?”
“으음… 저는 몰타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중소형 갤리는 몰타에서도 충분히 수리가 가능한 데다 본국에서 추가적으로 선원들을 지원받아야 할 것 같고요.”
“알겠습니다. 그럼 귀환하기 전에 늘 그랬듯 크레타에 물자를 뿌리고 돌아가겠습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해적질을 할 때마다 얻은 전리품의 일부를 크레타에 뿌렸다. 물론 돈과 물자가 남아돌아서 그런 건 아니었고 사람들의 호의를 얻기 위해서였다.
이곳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만큼 협력을 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적대적이지는 않아야 하니까. 그 때문에 크레타의 원주민들은 철저히 중립을 지켜왔다.
사실 이들이 베네치아에 적극적으로 협조한다고 해도 우리에게 큰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변수는 최대한 줄여놔야 하지 않겠는가.
아무튼, 의도치 않게 전쟁이 커졌지만, 오히려 바라던 바였다. 장기전으로 가면 나 역시 계속 여기에 붙들려 있어야 했지만, 베네치아에서도 총력전으로 나오면 회전 한 번으로 승패가 결정될 테니까.
안 그래도 북부로 올라가기 전에 이놈들이 마음에 걸렸는데 이렇게 알아서 판을 깔아주니 감사의 마음을 담아 확실히 짓밟아주도록 하자.
* * *
<해양도시 제노바>
벨렌테와 라그나르 공작이 베네치아를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소문이 제노바를 뒤흔들었고 시민들은 기쁨에 겨워서 축제를 벌였고 제노바의 총독이자 벨렌테의 아버지인 조반니 1세는 이 틈을 타서 베네치아를 찍어누르기로 다짐했다.
이는 제노바 최대의 라이벌인 베네치아를 짓누를 기회이기도 했지만 벨렌테가 자신의 뒤를 잇게 만들 기회이기도 했다.
다른 가문들이 자신의 가문을 경계하고 있긴 하지만 베네치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확고부동한 업적이 있다면 시민들의 지지가 어디로 향할지는 뻔한 일이었다.
거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노바에게 있어 철천지원수라고 할 수 있는 엔리코 단돌로의 손자가 죽었다. 이미 물리기엔 너무 많이 와버렸고 전쟁은 피할 수 없는 흐름이었다.
시민들 역시 전쟁을 바라고 있었고, 반대를 위한 반대를 일삼던 몇몇 가문마저도 쌍수를 들며 전쟁에 찬성했다. 정치적인 문제는 둘째 치고 베네치아를 조지는 건 모두의 숙원이었으니까.
이번 전쟁으로 베네치아를 몰락시키지는 못하더라도 크레타 정도만 얻어낼 수 있다면 제노바의 위상은 전 유럽을 진동시키리라. 물론 자신 역시 제노바의 절정기를 이끈 총독으로 남을 것이다.
그렇기에 총독에게 있어 이건 제노바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이자 구원의 동아줄이었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마주할 수 없다는 걸 알았기에 총독은 모두가 모인 회의에서 열성적으로 전쟁을 부르짖었다.
“라그나르 공작이 베네치아와의 전면전을 선언하고 우리에게 지원을 요청했소. 하여 나는 그 지원요청을 받아들여 우리 제노바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베네치아와 일전을 벌일 생각이오.”
“으음… 굳이 전쟁을 할 필요가 있습니까? 하이르 앗 딘과의 전쟁과 몰타의 요새 건설, 함선의 지원 등으로 제노바의 역량도 한계에 봉착했습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소. 엔리코 단돌로의 손자가 죽었는데 저기서 적당히 싸우다 휴전하고 묻으려고 하겠소? 물론 베네치아의 도제는 그러고 싶겠지만 콧대 높은 베네치아 놈들은 우리를 박살 내 버리고 싶어 하겠지.”
“….”
“약한 소리들 하지 마시오. 드디어 때가 온 것이오. 기나긴 암흑 속에서 벗어나 광명과 황금의 시기를 시작할 때가 왔소! 그리고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손으로 쟁취해야 하오.”
조반니 1세는 격정과 흥분으로 몸을 부르르 떨며 소리쳤다.
“신께서 우리를 보우하시는지 라그나르 공작은 물론이요, 이례적으로 아이유브까지 우리와 함께하고 있소.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우리는 땅을 치고 후회할 것이오!”
“허나 이교도들과 함께하는 건….”
“우리는 상인이오. 할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거래하는 자들이지. 또 다른 이교도라고 할 수 있는 라그나르 공작과는 거래를 했으면서 아이유브는 안된다고 할 게 뭐요? 거기에 자칭 기독교도이자 십자군이었던 베네치아도 이슬람의 영토인 레반트에서 거래를 하고 있지 않소?”
사실, 반대를 하는 이들조차도 이 전쟁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명분도 확실했고 모두가 전쟁을 바라고 있었기에 그들로서도 더 이상 반대를 할 수 없었다.
결국 만장일치로 제노바의 참전 안건이 통과됐고 총독은 엄숙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고귀한 제노바 공화국의 총독으로서 명하노니 모두 전쟁을 준비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