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내가 적의 함대를 만난 건 크레타섬과 가브도스섬의 사이였다. 적들이 저기서 대기를 하고 있던 건지, 아니면 크레타를 빙빙 돌며 순찰을 하던 와중에 우리와 마주친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십여 척의 전투함은 우리를 보자마자 바로 전투태세를 취했다.
“둘, 넷, 여섯, 여덟, 열, 열둘에… 어, 열세 척 정도인가? 생각보다 많은데?”
물론 전부 다 대형갤리는 아니었고 중소형 갤리도 섞여 있긴 했지만 부담스러운 전력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입수한 첩보에는 열 척 정도라고 하더니 새빨간 거짓말이었군. 물론 열 척이든 스무 척이든 내가 해야할 일이 바뀌는 건 아니다.
“알 아딜 경에게는 최대한 후방으로 빠지라고 연락하게. 괜히 설치다가 배 뺏기고 포로라도 되면 골치 아파지니까.”
“그대로 전할까요?”
피곤한 얼굴로 되묻는 오토를 보며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대꾸했다.
“이보게 오토. 외교적 수사 같은 거 있지 않나? 적당히 그럴싸한 이유를 붙여서 뒤로 빼라 이 말이네. 저 말을 그대로 전하면 싸우자는 얘기밖에 더 되나?”
“알겠습니다.”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면서 물러나는 오토를 보자니 괜스레 마음이 측은해졌다. 그동안 날 보좌한다고 고생했는데 나중에 휴가라도 몰아서 줘야겠군.
아무튼, 그건 승리한 뒤의 이야기고 지금은 눈앞의 적에게 집중해야 할 시기다. 이미 이쪽의 무장과 함선의 숫자, 즐겨 쓰는 작전 따위는 다 파악됐을 것이다.
물론 이쪽도 몸집을 불리기 위해 급하게 아이유브에서 선원을 차출해 배에 태웠지만 그래봤자 열 척이 한계였다.
그러니 쓸데없는 적을 상대로 탐색전을 벌일 것도 없다. 괜히 간 본다고 시간 끌다가 적의 지원군이 오면 그때는 발을 빼기도 힘들 테니까.
그런 점에서 보자면 이곳은 나쁘지 않은 전장이다. 어쨌거나 크레타 북부와 에게해, 아드리아해 인근은 적의 영역이니까.
특히 에게해는 대한민국의 남해안마냥 수많은 섬들이 군도를 이루고 있었기에 섣불리 들어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해적질을 하는 것도 크레타 인근으로 한정됐던 거고.
“그나저나 이곳에서 싸우자는 걸 보면 해전에 꽤 자신 있는 모양이군.”
사실 일반적인 해전의 경우 아무것도 없는 망망대해에서 싸우는 게 편하다. 이쪽이나 저쪽이나 뒤통수 걱정하지 않고 싸울 수 있으니까.
문제는 충각으로 배 위에서 바다에 떨어지거나 배가 불에 타서 전소되거나 반파돼서 침몰하기 직전일 때 발생한다.
이 경우 근처에 섬이 있다면 살아날 확률이 비약적으로 높아진다. 반면 망망대해는 바다에 떨어지는 순간 상대에게 자비를 구걸하거나 아군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빌어야 한다.
그것도 본인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기 전에.
그러니 저런 식으로 싸우자는 건 압도적으로 승리할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나 역시 자신 있었기에 긴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장에게 명령했다.
“선장. 본 기함을 기준으로 함대를 일자로 펼치게.”
내 명령에 초요기가 올라갔고 숙달된 선원들은 일사불란하게 함대를 펼쳤다. 이쪽에서 맞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자 상대측에서도 우리에 맞서 함대를 일자로 펼쳤다.
서로 진형을 펼치고 널 조져버리겠다는 의지를 천명했으니 이제 맞붙어서 싸우는 일만 남았다. 이럴 경우 통상 어느 쪽이 먼저 달려드느냐의 문제인데… 사실 우리는 급할 게 없다.
우리와 베네치아의 상황은 굳이 현대식으로 비유하자면 경찰과 도둑 같은 느낌인데 경찰이 도둑을 잡으려고 달려들지 도둑이 경찰과 싸우겠다고 달려들지는 않잖은가?
“갑판장. 노포나 한번 쏴주게.”
“예? 사거리가 안 될 텐데요?”
“나라고 그걸 모르겠나? 그냥 한 발 쏴주라는 얘기야.”
적과의 거리가 1km 이상 떨어져있으니 당연히 맞을 리가 없지만, 적을 향한 도발의 표현 정도는 될 것이다. 실제로 화살을 날리자 도발이 제대로 먹혔는지 적의 대장선이 이쪽을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벨렌테와 알 아딜 경은 날개의 끝에 있겠지?”
“예. 적의 날개를 꺾는 대로 중앙으로 합류하겠다고 했습니다.”
적들은 일점을 돌파할 생각인지 중앙에 함선들을 꾸역꾸역 끌어모았지만 나는 양 날개에 함선을 투자했다. 덕분에 중앙이 조금 빈약해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내가 커버할 수 있다.
괜히 욕심내다가 벨렌테나 알 아딜이 사망하면 골치 아파진다. 특히 벨렌테가 사망하면 앞으로 제노바와 동맹을 유지할 생각은 접어야 한다.
“라그나르. 이번에도 앞장서서 싸울 생각입니까?”
딱 봐도 힐데의 얼굴은 잔소리를 할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나는 얼른 말을 돌렸다.
“상황 봐서. 그보다 힐데, 내가 재밌는 거 보여줄까?”
재밌는 거라는 말에 힐데는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 경계 어린 눈초리를 보였다. 그동안 내가 재밌는 거라는 이름 아래 본인을 괴롭혔던 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별로 보고 싶지 않습니다만… 혹시 그 수염으로 문지르는 게 재밌는 거라면 그만두십시오.”
“에헤이. 언제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그런 게 아니라… 혹시 힐데 너 인간 발리스타라고 들어봤어?”
“그건 또 뭡니까?”
적의 함선에서 날아오는 화살을 가볍게 쳐낸 나는 5~6kg 정도 되는 발리스타의 대형 화살을 집어 들었다. 묵직하면서도 손맛에 착착 감기는 게 화살이라기보단 기다란 창 같은 느낌이다.
“잘 봐.”
한 손으로 대형 화살을 움켜쥐며 힘을 끌어모은 나는 요리조리 눈알을 굴리다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적의 소형 갤리를 향해서 있는 힘껏 집어 던졌다.
무시무시한 파공성을 내며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적의 함선에 내리꽂혔고 함선은 그대로 구멍이 뚫린 채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관통을 하는 모습에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힐데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나와 실시간으로 가라앉는 적의 함선을 번갈아 바라보며 헛웃음 지었다.
“…그게 어딜 봐서 ‘인간’입니까?”
“아직까지는 인간 맞을걸?”
그래. 아직까지는 말이다. 아무튼, 이런 내 행동으로 인해 아군의 사기는 순식간에 폭등했다.
물론 고작해야 열 명도 안 타고 있던 조각배를 부순 것에 불과하지만 싸움을 앞두고 거둔 작은 승리는 적당한 자극제가 됐을 것이다.
원래 일기토도 그렇고 황산벌에서 화랑들이 단기로 뛰쳐나가서 죽은 것도 본인이 상대에게 큰 피해를 입히기보단 목숨을 걸고 싸움으로써 아군의 사기와 투쟁심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어이쿠. 제법 화났나 본데?”
적들이 쏘아대는 화살이 제법 매서워졌고 나는 힐데의 등 뒤에 쪼그려 숨었다. 물론 그녀는 그런 내 모습에 한심하다는 얼굴 표정으로 화살을 쳐냈다.
“와. 역시 힐데 너무 든든하고~”
“전투를 앞두고 이렇게 긴장감 없는 건 당신이 유일할 겁니다.”
“글쎄, 솔직히 난 이걸 전투라기보단 학살이라고 생각하거든.”
긴장도 뭐 목숨을 건 전투에서나 하는 거지 밥을 먹거나 화장실을 갈 때 긴장하는 건 아니잖은가. 내게 이번 전투는 딱 그런 수준이었다.
생각해보면 바이킹이 본인의 압도적인 전투력을 떨칠 수 있는 전장은 야전도, 공성전도 아닌 이렇게 배 위에서 벌이는 함상 전투였다.
배라는 제한된 전투 공간에서 어떤 기교도 끼어들 수 없이 오직 자신의 능력 하나만을 가지고 전장을 헤쳐나가야 하는 곳. 그게 바로 이곳이었다.
쾅!!!!!
힐데와 이야기를 하는 사이 배의 선수끼리 서로 부딪히며 비명을 내질렀고 그 충격으로 배가 흔들렸다. 으저적 거리며 무언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갑판 일부가 우그러졌지만 난 개의치 않고 머리를 흔들어 충격을 털어낸 뒤 명령했다.
“배 우현으로 돌려!”
내 명령에 선장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고 노잡이들은 능숙하게 노를 저으며 배를 상대의 좌현에 가져다 붙였다.
배와 배가 서로의 좌현과 우현을 마주한 상태가 되자 나는 다시 한번 발리스타용 화살을 쥔 채 적의 함선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 본연의 의무대로 미사일처럼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적 3명을 꿰뚫고 마스트에 박혔고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일타쌍피도 아니고 일타삼피라니. 오늘 제법 손맛이 쏠쏠했다. 그렇게 인간지네가 된 3명을 감상하고 있자니 적의 함선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던지는 와중에 로또가 터졌는지 화려한 옷을 걸친 놈도 인간 지네가 되어 꼬챙이에 꿰뚫려 있었고 그놈이 고위급 인물인 모양이었다.
의도치 않은 행운이 터졌기에 나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마저 방패를 장비한 뒤 제노바 쇠뇌병들의 지원사격을 등에 업고 적의 함선에 뛰어들었다.
그런 내 뒤를 따라 선원들도 각자의 무기를 든 채 뛰어들었고 항상 내 뒤에는 중갑을 걸친 힐데가 든든하게 내 뒤를 지켜주고 있었다.
사실 처음에 선원들은 배에 힐데와 이비가 타는 걸 굉장히 고까워했다. 물론 내 지위가 지위인 만큼 뭐라 하지는 못했지만.
그나마 이비는 실력 있는 의사였고 몰타에서 훈련을 하며 도움을 받은 적이 많았기에 거부감이 덜했지만 힐데는 아니었다.
특히, 아이유브 왕조의 이슬람들에겐 거부감을 넘어서 적대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은 힐데의 능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20대 초반의 여자아이가 중갑을 껴입고 메이스로 적들의 골통을 박살 내고 다니는데 얼마나 든든하겠는가? 그 때문에 힐데는 사실상 승리의 여신 취급을 받고 있었다.
“힐데. 승리의 주문을 부탁해.”
“…그거 정말 해야 되는 겁니까?”
“빨리! 빨리! 정신 나갈 거 같으니까 빨리 해줘!”
“…알겠습니다.”
내 뗑깡에 한숨을 내쉬며 잠시 목을 가다듬은 힐데는 자신의 투구 가리개를 내리며 장엄하고 엄숙하면서도 카리스마가 깃든 목소리로 소리쳤다.
“승리의 여신인 내가 바라노니, 나의 형제들이여! 저 겁쟁이들을 무릎 꿇려라!!!”
그녀의 말이 울려 퍼짐과 함께 우리는 그에 호응해 괴성을 내지르며 적들에게 달려들었고 나를 비롯해 선원들의 발걸음에는 단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늘 그렇듯, 우리에겐 승리의 여신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 * *
[베네치아―도제의 집무실]
“…아군 함대가 박살 났다고? 그냥 깨진 것도 아니고 대패를 했다 이 말인가?”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듯 도제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 앞에 조아린 티에폴로는 도제의 분노를 감당할 생각에 죽을 맛이었지만, 일단은 침착하게 보고를 이어나갔다.
“예. 마리노가 끌고 간 13척의 함선 중 4척은 침몰했고 나머지 6척은 적들에게 나포되어 오직 3척만 귀환했습니다. 포로로 잡힌 숫자는 3백 명 정도로 추정되며 바닷속에 수장된 인원은 오백 명 정도로 예상됩니다. 그리고 사망자 명단에는… 마리노 단돌로도 있습니다.”
“이게 뭔… 하나님 아버지. 나의 신이시여. 나름 성실하게 살아왔는데 시발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도제는 대놓고 신을 능욕하며 신성 모독을 했지만 티에폴로는 차마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도제의 말대로 이건 말도 안 되는 시련이었으니까.
“확실히 라그나르 그 야만인이 마리노를 개박살 내주기를 바라긴 했네. 근데 시발 이런 결과를 바라진 않았단 말일세. 마리노 그놈이 병신같은 것인가? 아니면 라그나르 그 개자식이 천재란 말인가? 그도 아니면 신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 내 소원을 너무 과하게 들어주신 것인가?”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라그나르 공작이 혼자서 다 쓸고 다녔다고 합니다. 몇몇 선원들은 라그나르라는 이름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입니다.”
솔직히 보고를 하는 티에폴로 자신부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했지만 일단은 그의 기이한 행적들을 읊었다.
발리스타의 대형 화살을 맨손으로 집어 던지는 일이나, 단신으로 배 위에 뛰어들어 수십 명의 적들을 학살한 일 등등. 물론 듣는 도제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지만 모든 생존자들이 그렇게 증언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다.
“후우… 용담공이라더니 괜히 그 칭호를 받은 게 아니었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아군 함대의 패전 소식이 다 퍼졌을 겁니다.”
“일단은 이쪽에서 아군 함대의 정보를 흘렸다는 사실을 은폐하게.”
이게 새어 나가서 걸리는 순간 자신은 끝이었다.
“그리고 디에고를 만나서 포섭해보게. 패장인 데다 가주인 마리노도 지키지 못하고 자기만 살아서 돌아왔으니 입지가 많이 떨어졌을 거야.”
“알겠습니다.”
티에폴로가 서둘러 집무실을 나가자 도제는 한숨을 내쉬며 관자놀이를 매만졌다.
생각보다 너무 압도적으로 지고 말았으니 베네치아의 이름 자체가 웃음거리가 될 지경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이를 헤쳐나갈 수 있는 방법은 전면전밖에 없었다.
“전쟁을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지.”
원치 않은 전쟁이었지만 이왕 벌이는 전쟁이라면 이를 통해서 최대한 이득을 봐야 했다. 원래부터 내부의 혼란도 잠재우고 결속시키는 데는 전쟁만 한 게 없지 않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