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3화
예정된 기일에 돌아오지 않는 상단의 함선들. 해안가 인근으로 떠밀려오는 시체와 교역 물품들. 그리고 그와 함께 들려오는 해적들에 대한 뜬구름같은 소문.
이 모든 것들로 말미암아 베네치아의 도제는 뭔가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그 예상이 확신이 된 건 사흘 전이었다.
해적들의 습격으로부터 간신히 살아남은 선원이 모든 걸 고했고 도제는 해적들이 실존하며 그들이 제노바와 검은 용군단의 연합체임을 깨달았다.
즉각 칼리나가 머무는 밀라노와 제노바에 항의서한을 보냈지만 그들에게서 온 것은 위로를 빙자한 조롱뿐이었다.
[……하여 그대들에게 일어난 매우 불행한 일에 애도를 표하네. 하지만 나는 그대들이 내게 이런 서한을 보내는 게 내 뒤통수를 치기 위해서가 아닌지 의심이 드는군.
그도 그럴 게 이미 그대들은 내가 북부로 올라간 틈을 타서 내 도시를 공격하고 카노사 인근에 있던 마을들을 불태우지 않았던가?
거기에 상식적으로 지중해의 여왕을 자처하는 그대들이 고작 해적 따위를 진압하지 못해서 내게 징징거릴 리가 없지 않나?
아니면 혹시 나를 압박해서 뭔가를 도모하려 함인가? 그렇다면 그만두게. 용의 수염을 건드리는 그날 지도에서 베네치아라는 나라는 사라질 테니.
그러니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여. 여생을 편히 살고 싶다면 처신 잘하게.]
무례하고 기품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조롱으로 점철된 편지였지만 도제는 속으로 분노를 삭이며 편지를 구길 수밖에 없었다. 그녀에게 신경 쓰기에는 내부에서 받는 압박이 너무 거셌으니까.
“도제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 정신 나간 놈들이 감히 아국의 상선을 공격했습니다! 그런데 일단은 지켜보자니요!”
베네치아의 도제는 핏대를 세워가며 소리치는 마리노의 모습에 머리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도제의 권위로 상대를 찍어누르고 싶었지만, 그는 무려 동로마를 무너뜨린 엔리코 단돌로의 손자였다. 그 때문에 도제는 몇 번이나 했던 말을 반복하며 마리노를 설득했다.
“내가 그놈들을 그냥 놔두자고 하는 게 아니잖나. 정확한 정보 파악을 위해서 당분간 ‘보류’하자고 하는 거지.”
“보류라… 허면 그동안 아국의 함선이 공격을 받건, 동포들이 해적들의 손에 붙잡혀 노예가 되건 말건 도제께서는 상관이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 순간 도제는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살심이 솟구쳐올랐다. 단돌로 가문이고 뭐고 그냥 칼을 뽑아 들어서 저 혓바닥을 잘라버리고 싶었다.
확실히 그의 말대로 상황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계속 피해가 생기고 손해를 입을 테지만, 그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피해였다.
하지만 저 개자식은 이런 자신의 신중함을 나약함으로 둔갑시켜서 정치적으로 공격하고 있다. 원래 정치라는 게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직접 공격을 당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후우우우…… 이보게 마리노. 내가 그런 뜻으로 이야기하는 게 아닌 걸 누구보다 자네가 잘 알고 있지 않나? 내 말이 그렇게 이해하기 힘드나?”
“글쎄요. 이랬거나 저랬거나 도제께서는 보류라는 이름으로 해적들을 방치하자고 얘기하시는 게 아닙니까?”
뻔뻔하게 대꾸하는 그 모습에 도제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다시 한번 천천히, 굉장히 논리적으로, 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알아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설득을 시작했다.
“이보게 마리노. 함선을 움직이는 건 사람 대여섯 명을 움직이는 것과 똑같은 게 아니네. 바다 위에서 움직이는 만큼 보급도 철저히 해야 하고 날씨도 살펴야 하네. 그리고 전투를 위해 출정하는 만큼 배의 검수도 꼼꼼히 해야 하고 병력들의 무장도 철저히 시켜야 하네.”
“오, 물론 그건 저도 이해합니다. 준비를 철저히 하는 건 참 좋은 일이죠.”
“그래, 그러니까….”
“하지만 해적들이 날뛰기 시작한 게 벌써 일주일 전입니다. 그리고 제가 듣기로 도제께선 그 정보를 사흘 전에 입수하셨다고 하던데… 대체 그 시간동안 뭘 하신 겁니까?”
예기치 않은 마리노의 일침에 도제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그 말대로 해적들에 관한 정보를 사흘 전에 입수하긴 했다.
하지만 모든 일의 전말을 파악하기에 사흘은 너무 짧았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알리자니 뇌를 비운 채 복수를 하자고 날뛸 것 같아 일단은 정보를 은폐한 채 자체적으로 조사 후 발표할 생각이었다.
“만약 도제께서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정보를 입수하는 즉시 모두에게 알리고 복수를 천명하셨어야 합니다. 하지만 도제께선 그러지 않으셨지요. 그러니 그 진의를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빌어먹을. 입단속을 좀 더 철저히 했어야 했는데… 아무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를 빌미로 마리노 단돌로는 자신을 압박했고 그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베네치아의 시민들 역시 자신들의 함선이 공격받았다는 사실에 분노하고 있었고 그 대상에게 단죄를 하길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 신께 맹세코 결코 이를 숨길 생각은 없었다네. 다만 내가 정보를 입수했을 땐 뜬소문이 나돌고 있었고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기 위해 정보들을 취합할 시간이 필요했네.”
“흠… 뭐 좋습니다. 다 좋아요. 도제님의 말씀이 맞다고 하지요. 허면 이제 흉수도 명확해졌고 우리의 적이 누군지도 알게 됐으니 즉각 함대를 출전시키시지요.”
“물론일세. 하지만 생각해보게. 우리는 적의 함대가 얼마나 되는지 파악하지 못했네. 상선들의 목격을 들어보면 대여섯 척이라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열 척 이상이라고 하더군. 거기에 그들의 목적이 뭔지, 해전이 확대됐을 때 제노바가 전면전을 벌일 생각인지 등등 우리는 정보가 너무 부족하네.”
“하하하하하하하하.”
아직 출정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하나하나 꼽으며 얘기했지만 그 얘기를 들은 마리노는 재밌는 얘기라도 들은 것처럼 폭소했다.
그 모습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도제는 침착하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웃긴가?”
“아니, 그렇지 않습니까? 언제부터 우리 베네치아가 그런 것들의 눈치를 봤습니까? 엔리코 단돌로 도제께서는 남들이 뭐라 하건, 교황이 파문을 하건 말건 자신의 신념을 밀고 나가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베네치아가 이렇게 커지며 지중해의 여왕이라고 불리게 된 건 그 결단 때문입니다.”
“그걸 모르는 바는 아니네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네.”
“아니요. 똑같습니다. 상대가 제노바라고요? 그들이 전면전을 준비하면 어쩌냐고요? 그러건 말건 아국의 함대를 동원해서 쓸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제노바 놈들은 하이르 앗 딘조차 어쩌지 못해 빌빌대던 놈들인데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우신 겁니까?”
“하이르 앗 딘은 결코 능력 없는 이가 아니었네. 그리고 제노바가 그들을 토벌하지 못한 건 득보다 실이 더 컸기 때문이고.”
“호, 그렇습니까? 그런 하이르 앗 딘이 라그나르인지 뭔지 하는 야만인에게 제대로 반항도 못 하고 토벌된 건 알고 계십니까?”
“이런 젠장. 수만에 달하는 병력이 육지에서 진군하고 제노바가 해상을 봉쇄하고 있는데 하이르 앗 딘이 아니라 하이르 앗 딘의 할애비가 와도 토벌당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
“제 할아버지께서는 그 모든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셨지만요.”
개같은 새끼. 누가 보면 자기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줄 알겠군. 그리고 그 할애비가 영예며 영광은 다 누려놓고 뒤진 덕에 똥은 자신이 치우고 있었다.
파문을 취소하기 위해 교황청에 수많은 돈을 바치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조율하는 등 베네치아라는 이름이 주는 신뢰를 되찾기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기울였는지 눈앞의 애송이는 절대 모를 것이다.
“마리노. 따지고 보면 저들이 뜬금없이 해적질을 하며 우리를 도발하는 것도 자네가 제멋대로 병력을 움직여 카노사를 공격했기 때문이 아닌가!?”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그렇게 모른 척할 건가? 그대가 뭘 노리고 그따위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들은 우리를 향해 칼을 뽑아 들었고 그 대가로 우리는 수많은 상선들이 나포됐으며 우리의 동포들이 저들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바다에 수장됐네. 그대의 한 줌도 안 되는 그 욕심 때문에!”
하지만 도제의 말에도 마리노는 화내기는커녕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하지 않았다. 철저히 침묵으로 일관하는 상대에게 화내봐야 자신만 손해라는 걸 깨달은 도제는 힘 빠진 얼굴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어차피 더 따져봤자 소용이 없었다. 저 병신같은 놈 혼자서 저런 일을 벌일 리가 없을 테니 암암리에 그에게 동조하는 세력이 있었다는 뜻이고 지금 와서 그들과 대적해 내분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다람쥐 쳇바퀴 돌리는 짓은 그만하지. 자네가 원하는 게 뭔가?”
꿀이라도 처먹은 것마냥 입을 다물고 있던 마리노는 원하던 이야기가 나오자 입을 활짝 벌리며 대답했다.
“즉각 적들을 토벌하는 토벌대를 구성해주십시오. 물론 총지휘관은 절 임명해주시고 모든 명령권은 제가 가지고 있어야 할 겁니다.”
“하. 제대로 된 해전도 겪어보지 못한 자네가 함대를 통솔할 수 있다고? 자네가 차라리 제노바의 벨렌테처럼 경험이 많으면 상관없지만 뭘 믿고 병력을 준단 말인가?”
“오, 설마 제가 진짜로 병력을 운용하겠습니까? 지휘는 디에고에게 맡길 겁니다.”
그 말에 도제는 눈살을 찌푸렸다. 결국 함대의 지휘는 타인에게 맡기되, 적을 격파한 공적은 총사령관인 자신이 홀랑 삼키겠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래도 뭐… 디에고 정도면 나쁘지 않은 인선이었다. 괜히 저 멍청한 놈이 직접 지휘를 하겠다고 나대는 것보단 나으니 도제는 이쯤에서 양보하기로 했다.
“좋아. 적의 함대가 10척 이내라고 하니 사흘 안에 8대를 지원해주겠네. 추가적인 함대의 구성은 자네와 자네 가문이 알아서 하게.”
“고작 8척만 주시겠다는 겁니까?”
“자네 말마따나 애송이들을 상대하는데 배가 더 필요한가? 자신 없으면 그만두게.”
“사람을 험하게 부리시는군요. 좋습니다.”
원하는 대답을 얻은 마리노는 고개만 까닥한 채 집무실을 나섰고 혼자 남은 걸 확인한 도제는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티에폴로.”
놀랍게도 안쪽의 서재가 돌아가며 안에서 훤칠한 모습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고 도제는 머리가 아픈지 자신의 관자놀이를 꾹꾹 마사지하며 이야기했다.
“안에서 무슨 얘기를 했는지 다 들었겠지? 지금 즉시 적들에게 이쪽의 함대 규모와 편성, 출정 날짜, 편성 인원 등을 암암리에 흘리게.”
“…예? 진심이십니까?”
“뭘 그런 표정을 짓나? 마리노가 해적들을 상대로, 특히 라그나르 공작을 상대로 대승이라도 거두게 되면 도제의 자리는 그에게 돌아갈 걸세. 그 꼴을 보고 싶은 건 아니겠지?”
“…물론입니다.”
“내부를 단결시킬 수만 있다면 배 8척 정도야 싸게 먹히는 편이지. 혹여 포로로 잡혀주기라도 한다면 더 좋겠군. 그 틈을 타서 내부정리를 할 수 있을 테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했나?”
도제의 물음에 티에폴로는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도제는 손짓하며 그를 내보냈다. 그렇게 사전적인 의미 그대로 방 안에 혼자 남은 도제는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젠장. 애송이 하나 처리 못 해서 그 야만인을 응원해야 한다니… 자존심 상하는군.”
* * *
<아이유브 왕조 ― 데르나 항구>
“흐음, 해적질도 꽤 할만한데?”
나는 산처럼 쌓여있는 물자와 항구에 정박해있는 배들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고작 일주일 동안 해적질을 했을 뿐인데 니스 1년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금액을 벌 수 있었다.
거기에 얻게 된 이득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상태창.”
이름 : 라그나르 로드브로크
소속 : 니스의 정당한 지배자, 신성 로마 제국의 공작, 검은 용군단의 일원.
칭호 : 용담공(new!), 야만공(new!)
상태 : 활력, *신성 중독 – 신성력이 당신의 몸을 좀먹고 있습니다. 살고 싶다면 대책을 마련하십시오.
기벽 : 겨드랑이 애호
체력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스탯 : 난이도로 인한 열람 제한
<특성>
⟶ 기존의 특성은 펼쳐서 확인.
고귀한 야만인(new) : 야만인으로 공작위까지 오른 당신의 이야기는 전설적입니다. 자칭 문명인들에게 존경을 받을 것이며 야만인들에게 경외를 받을 것입니다.
바이킹의 계승자(new!) : 당신의 피 안에 흐르는 바이킹의 혼은 절대 짓누를 수 없습니다. 해상전에 돌입 시 본인 및 아군의 전투력 대폭 상승.
끓어오르는 피(new!) : 함상에서 백병전을 벌이며 달아오른 피는 쉽게 식지 않습니다. 전투 속행 및 전투 지속능력 대폭 상승.
“점점 괴물이 되어가는군.”
이 정도면 거진 1인 군단이라고 칭해도 되지 않을까? 뭐, 원래도 게임 후반까지 가면 플레이어 혼자서 다 쓸고 다니긴 하지만 이건 진짜 인간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오버스펙이었다.
그렇게 찬란한 내 상태창을 보며 흡족해하고 있자니 오토가 미묘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용담공 전하. 수상한 첩보가 입수됐습니다. 제가 판단할 수 있는 범주가 아니라 전하의 의견을 여쭙고 싶습니다.”
오토는 뜬금없이 자신들을 토벌하기 위한 함대의 정보가 확인됐다며 본인이 파악한 정보를 전부 이야기했고 나는 역으로 그에게 되물었다.
“흠… 자네 생각은 어떤가?”
“함정일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정보가 지나치게 구체적인 데다 항로까지 알려주며 대놓고 이쪽에게 공격해달라고 꼬리를 흔들고 있지 않습니까?”
“내 생각도 그렇네. 다만 마냥 무시하기에도 마음에 걸리니 확인이나 해보게.”
상식적으로 적에게 아군의 정보를 흘리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이곳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다. 사실 조선만 해도 선조가 잘 싸우던 이순신 장군님을 잡아들이지 않았던가.
그리고 놀랍게도 우리가 며칠 동안 집중적으로 정찰선을 띄워서 확인해본 결과 우리가 입수한 정보는 사실이었다. 참, 어이가 없었지만 어쨌건 저들은 베네치아에서 버림받은 패라고 봐도 무방했다.
“자아, 다들 충분히 쉬었겠지? 손님이 오신다니까 서둘러 준비해라!”
요즘처럼 손님을 맞이하기 힘든 시기에 돈 많은 손님이 직접 와준다는데 가만히 자리에 앉아있을 순 없었다. 더군다나 베네치아에서 삼켜도 뒤탈이 없을 거라고 넌지시 묵인했다면 더더욱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