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궁니르는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함선이었다.
제대로 꽂히기만 하면 용왕과 면담할 수 있게 프리패스 통행증을 끊어주는 발리스타, 투척 및 궁수들을 위해 만들어진 거대한 탑, 백병전을 위해 배의 전미와 후미에 고정된 못 박힌 거대한 다리.
일반적인 함선들이 상선의 역할을 겸하는 것과는 다르게 궁니르는 한눈에 봐도 오직 전투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함선이었다.
“완벽해.”
사실 이 시대 해전이라고 해봤자 화살로 견제 좀 하다가 배로 들이받아 정신 못 차리는 적의 함선 위에 올라타서 백병전을 벌이는 게 전부다.
근데 이런 배를 상대로 백병전을 할 엄두가 날까? 글쎄… 나라면 아마 보자마자 꼬리 말고 도망치지 않을까?
오랜만에 만족할 만한 선물을 받은 나는 몰타에 요새 건설이 완료되고 선원들과 노잡이들의 기술이 어느 정도 숙련되자 곧장 함대를 이끌고 트리폴리로 남하했다.
바람도 쾌적하게 불고 있기에 굳이 노잡이들을 닦달하지 않고 느긋하게 항해를 지속했다.
“이비, 뱃멀미는 어때? 상태를 보니 괜찮아 보이는데.”
“어… 딱히 어지럽거나 구토감이 느껴지진 않습니다. 아무래도 배가 커서 그런지 파도에 영향을 덜 받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실제로 그녀의 가면을 쓰고 있음에도 별다른 이상징후를 보이지 않았다. 뱃멀미가 정말 심할 때는 흉터고 뭐고 가면을 내던진 채 난간에 매달려서 배 속에 있는 걸 게워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장기간 배를 탄다고 하면 차라리 며칠 동안 굶는 편이었다. 굶으면 몸에 안 좋다는 걸 의사인 본인이 누구보다 더 잘 알 테지만, 뱃속을 게워내는 것보단 훨씬 나을 테니까.
뭐, 이해하지 못할 건 아니다. 알다시피 한번 먹은 음식물을 뱉어내는 게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잖은가.
그리고 원래 식도는 음식물이 들어가는 구멍이지 뱉어내는 구멍이 아니다. 음, 이렇게 적어놓고 보니 뭔가 야한데?
“뭘 그렇게 실실 쪼개고 있습니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당신이 웃으니까 머리가 흔들리지 않습니까.”
힐데의 투정에 나는 슬쩍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금 나와 힐데, 이비의 상태는 기묘한 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는데 일단 내가 이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는 상태다.
그리고 그렇게 드러누워 천국… 아니, 난 바이킹이니까 발할라던가? 오딘께서 아시면 이단이라고 울부짖을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이비의 허벅지에서 행복과 여유를 만끽하고 있는 내 허벅지를 힐데가 베고 누워있는 상황이었다. 이런걸 뭐라 하더라? 인간지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은데.
“뭐가 그렇게 웃긴지는 모르겠지만 멀미 나니까 가만히 누워 있으십시오.”
물론 나는 청개구리였기에 심술궂게 웃으며 의도적으로 다리를 달달 떨었고 힐데는 벌떡 일어나 내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 않습니까!”
“왜 화를 내고 그래. 마사지 해주는 거잖아 마사지. 그 뭐라더라? 경락 마사지?”
물론 내 말을 들은 힐데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마 전에 내게 마사지를 받았던 경험을 떠올리는 거겠지.
“이참에 마사지나 한 번 해줄까?”
“…하면 죽여버릴 겁니다.”
물론 말은 저렇게 하지만 정작 마사지를 해주면 떽떽거리면서도 거부하지는 않는다. 안마나 마사지를 받아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게 또 묘하게 중독성이 있잖은가.
그렇게 나는 느긋하게 힐데, 이비와 함께 여행의 여유로움을 즐기는 한편 때로는 알 아딜과 만나 그와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그가 이곳까지 온 이유는 본인이 얘기한 것처럼 해군 양성을 위함이기도 했지만, 나와 친목을 다지기 위해서이기도 할 테니까.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알 아딜은 능력이 워낙 좋아서 살라딘에게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위험한 해적질에 투입될 리가 없다.
거기에 말이 좋아 해군 양성이지 우리가 하는 건 해적질이다. 그리고 이런 해적질은 늘 전투를 동반하기에 자칫 잘못하면 전투 중에 사망할 수도 있다.
특히 한창 전투 중에 바다에 빠지면 구하기도 힘든 데다 골든 타임에 구출하지 못하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거나 상어에게 습격당해 죽는다.
리스크는 이뿐만이 아닌데 우선 이 은밀한 관계를 들키게 되면 살라딘은 기독교도와 손을 잡았다는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이는 이슬람의 통합을 외치는 살라딘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현대식으로 풀이해보면 멸공을 외치는 미국 정치인이 러시아나 중국과 손을 잡은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러니 만일을 대비해 바지사장으로 알 아딜을 내세운 것이다. 들킨다고 해도 책임회피는 물론이고 야심만만한 동생까지 합법적으로 숙청할 수 있을 테니까.
이건 내 뇌피셜에 불과하지만 대부분 맞을 것이다. 게임 속에서도 원역사에서도 살라딘은 자신의 동생을 극도로 경계했으니까.
물론 나는 아이유브의 내부알력과 정치에는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다. 살라딘이든, 알 아딜이든 둘 다 능력 있는 술탄이고 내게 적대하지만 않으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솔직히 나는 지금 남의 집에 신경을 쓸 틈이 없었다. 내 집이 불타고 있는데 남의 집이 눈에 들어오겠는가?
벌써 작센에서는 사자공의 권위가 무너져내리고 있었고 중부는 황제와 선제후들과의 마찰로 인해 분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면 원래부터 신성로마제국은 그래왔다. 아니, 어쩌면 이런 내부분열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원래 내전은 로마의 근본 그 자체였으니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신성 로마 제국은 신성하지도 않고 제국도 아니지만, 로마일지는 모르겠네. 그런 실없는 상념에 빠져있는 나를 깨운 건 알 아딜의 목소리였다.
“용담공 전하. 전하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번 일은 굉장히 은밀하게 치러질 겁니다.”
“그러겠지요. 교역까지야 아미르들도 이득을 보고 받아먹는 게 있으니 적당히 눈 감고 넘어갔다지만 합작해서 일하는 거랑은 별개니까. 아랍의 시선으로 보자면 신성로마제국 역시 지하드를 벌여야 할 대상이 아니오?”
“송구스럽지만 그렇습니다.”
“그럼 트리폴리에 들어가지는 못하겠구려. 헌데 그러면 물자는 어떻게 실을 생각이오?”
“정박이야 할 테지만 하선은 공작 전하만 하셔야 합니다. 혹시 시비가 붙어서 문제가 생기면 서로 간에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뭐, 우리는 아이유브의 지원이 사라지면 작전에 차질이 생길 테고, 살라딘은 자신이 내건 기치인 지하드의 명분이 훼손됨은 물론 그의 권위가 하락할 것이다.
“알겠소. 내가 내려서 뭘 해주면 되겠소?”
“저와 함께 가셔서 받는 물자를 확인해주시면 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르라고 했던가? 병력들의 사기가 떨어질 걸 알면서도 나는 얌전히 알 아딜이 하자는 대로 했다.
그렇게 우리는 트리폴리에 정박했고 들어오는 물자들을 확인한 뒤 곧장 해안선을 따라서 서쪽으로 이동했다.
그렇게 해안가를 따라 항해하길 어느덧 1달. 우리는 2차 목적지인 데르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행히 데르나는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항구면서도 거주하는 이들이 많지 않았기에 우리는 곧장 배를 정박시킨 뒤 상륙해서 휴식을 취했다.
배를 타보면 알겠지만 몇 날 며칠이고 배를 타고 있으면 정신병에 걸릴 수밖에 없다.
어디를 봐도 보이는 건 바다뿐이요 놀 수 있는 것도 한정되어 있고 편의 시설이 좋은 것도 아니다. 현대도 그러할진대 중세시대의 선상 생활은 어떻겠는가?
거기에 음식의 종류도 한정적이었고 맛이 가기 시작한 재료부터 사용하기 때문에 식사는 단순히 생존을 위해 배를 채우는 행위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한마디로 삶의 질이 엄청나게 내려간다는 얘기다. 괜히 병사 부려먹기로 유명한 대한민국 군대가 배 타면 위로와 보상이라는 이름으로 휴가를 며칠 더 붙여주는 게 아니다.
그 때문에 아군의 사기는 거진 바닥을 찍은 상태였고 나는 사기를 상승시키기 위해 내 사비까지 풀어가며 병력들을 독려해주었다. 선상 반란 이벤트 맞기 싫으면 선원들 사기 관리는 필수였으니까.
나 역시 컨디션 관리를 위해 휴식을 취했는데 틈틈이 벨렌테와 알 아딜을 만나며 작전을 논의했다.
물론 작전이라고 해봤자 별거 없었는데 원래 해상전이라는 게 함포나 총 같은 화포류가 없을 때 쓸 수 있는 원거리 무기는 활이나 돌, 기름병 정도가 전부였다.
그리스의 불? 그건 예외다. 게임 내에도 구현되어있긴 하지만 그건 동로마의 고유무기였고 원역사에서도 보안이 철통같아서 결국 실전되고 마는 무기였으니까.
아무튼, 원거리 무기들로 큰 타격을 입히는 건 불가능했고 그마저도 흔들리는 배 위였기에 명중률을 기대할 수 없었다.
거기에 배라는 게 사람 생각처럼 딱딱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바람, 노잡이들의 상태, 배의 상태 등등 고려해야 할 변수가 너무 많았다.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근접해서 상대 배를 탈취하는 백병전이 주를 이루게 된 것이다. 베네치아와 제노바가 해군력이 강력한 건 배 위에서의 전투상황에 익숙해서 그런거고.
“음, 그러니까 공작 전하께서는 몰이 사냥을 하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네. 우리 함대를 객관적으로 봤을 때 전투력의 절반은 궁니르에서 나오지 않겠나?”
“실제 전투를 해본 건 아니지만 일단 이론상 스펙으로는 그렇지요.”
“그런 만큼 궁니르가 최대한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줘야 별다른 피해 없이 승리할 수 있을 걸세. 적선 탈취는 덤이고.”
여기까지 얘기한 나는 눈알을 굴리며 벨렌테와 알 아딜을 바라보았다. 둘 다 팔짱을 낀 채 내 말을 경청했기에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그런 점에서 이곳 크레타는 최적의 매복 장소일세. 섬의 남서쪽은 암벽이 높아서 궁니르도 몸을 숨기기에 용이하지. 습격의 효과도 극대화될 테고.”
사실 과거에도 그랬고 현대에도 그렇지만 해적들에게 중요한 건 빠른 기동성이었다. 바다 위에 언덕이나 산 같은 굴곡이 있어서 몸을 숨길 수 있는 것도 아니잖은가.
물론 섬에 몸을 숨길 수는 있지만 섬이 흔한 건 아니잖은가. 그 때문에 해적들은 상선처럼 위장한 채 목표를 따라가다가 거리가 어느 정도 가까워지면 미친 듯이 쫓아가서 급습하는 전법을 즐겨 썼다.
하지만 이곳 지중해에는 크레타라는 크고 아름다운 은신처가 있었고 나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이었다.
“내 의견은 이런데 벨렌테 자네 의견은 어떤가?”
“저는 찬성합니다. 궁니르를 제외한 나머지 함선들은 중소형 갤리니 화물을 잔뜩 실어 무거워진 상선 정도는 손쉽게 몰아갈 수 있을 겁니다.”
“알 아딜 경, 혹시 따로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완벽해 보이는 작전이군요. 그나저나 육지도 아닌 바다에서 망치와 모루를 실행할 줄은 몰랐군요.”
“실전에서 통하는지는 또 봐야겠지요. 알 아딜 경께선 이번 전투에서 아랍의 병사를 통솔해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렇게 쉬는 사이사이 작전을 보완한 우리는 화창한 날을 골라잡아 크레타로 함수를 돌렸다.
어차피 데르나에서 북상하다 보면 바로 옆에 크레타가 보일 테니 길을 잃을 염려도 없었기에 우리는 빠른 속도로 북상했다.
매복 지점에 도착하자 벨렌테와 알 아딜은 제물이 될 상선을 찾기 위해 섬의 해안가를 따라 서쪽으로 갔고 우리는 닻을 내린 채 대기했다.
전투를 앞두고 힐데는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점검하며 내게 한마디 툭 던졌다.
“라그나르.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당신이랑 함께 있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 일반적인 용병이랑 별로 다를 게 없지 않아?”
“산적들 사냥하고 하이르 앗 딘을 무너뜨리며 영주 암살에 해적질에 황제를 겁박하는 걸 다른 용병들도 한다는 말입니까?”
“그렇게 얘기하니 할 말이 없기는 한데… 그래도 뭐 좋은 추억이었잖아?”
“글쎄요. 그걸 좋은 추억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군요.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당신과의 기억이 계속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몸조심하라는 말을 직접 얘기하기에는 부끄러웠는지 힐데는 얼굴을 반쯤 돌린 채 툴툴거리며 이야기했다.
그런 힐데의 모습이 너무 귀여웠기에 나는 손질하던 도끼를 내팽개치고 바로 그녀에게 달려가 번쩍 들어서 꽉 껴안아 주었다.
“힐데!!!”
당연히 힐데는 미쳤냐는 욕설과 함께 내게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난 그녀를 꼭 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하지만 힐데에 대한 나의 애정표현은 적이 오고 있다는 견시수의 외침 덕에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한 나는 바닥에 떨어진 도끼를 허리춤에 차며 소리쳤다.
“닻을 올려라!”
내 명령에 쇠사슬과 연결된 거대한 크기의 닻이 천천히 배 위로 인양됐고, 그걸 확인한 나는 배를 이동시켰다.
섬으로 인해 시야를 차단해주던 사각지대를 벗어나자 아군 함대를 피해 도망치고 있는 상선이 모습을 드러냈고 나는 미소 지었다.
마침내 쇠사슬에서 풀려나 자유를 되찾은 용이 날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