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0화
“여긴 정말 지형이 지랄 맞군.”
나는 간신히 몰타에 상륙해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게임상에서 몇 번 보기는 했지만 사진이나 컴퓨터 그래픽으로 보는 것과 내 눈으로 직접 보는 건 천지 차이였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바위는 정박은커녕 가까이 가는 것조차 위험했기에 우리는 빙 돌아서 현 몰타섬의 수도인 발레타 지역에 상륙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덕분에 사람이 살기는 힘들지라도 요새의 역할은 충분히 해줄 겁니다.”
벨렌테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얘기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긍정했다. 이렇게 악명이 높으니 오스만이 병력을 쏟아부으면서도 함락시키지 못했겠지.
“그래도 아예 아무것도 없는 건 아니군.”
“동지중해로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르는 거점이니까요. 배가 난파했을 때 며칠 정도는 버틸만한 시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몰타는 명목상으로 시칠리 왕국의 영토이기는 했지만, 제노바가 두들겨 패서 쫓아낸 뒤 무단으로 점거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만, 요충지로서의 역할은 충분했지만 사람이 살기에 썩 좋은 지형이 아니다 보니 벨렌테의 말대로 중간중간 제노바를 오가며 들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렇긴 하지. 그래서 여기에만 요새를 짓고 지키면 되나? 오다 보니 저 위에도 배가 상륙할만한 거점이 있던데.”
“아, 부지바 근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던 곳 말일세.”
“그럼 아마 맞을 텐데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상륙이야 거기에 할 수 있겠지만 상륙한 병력을 끌고 이곳 발레타까지 오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요.”
하긴, 상식적으로 병력들이 무기 하나 덜렁 들고 행군한다고 뭘 할 수 있겠는가. 가는 건 어찌 간다 쳐도 퇴각할 때는 다시 산을 타야 되는데 그건 미친 짓이었다.
이런 가망 없는 짓은 등산 전문가인 한니발이나 마속, 등애도 안 할 짓이었다.
“좋아. 그럼 거긴 신경 쓸 필요 없고… 일단 임시 도크와 병력들이 머물 숙소부터 만들어야겠군. 숙소야 기존에 있던 걸 보수하면 될 테고 도크가 문제군.”
도크라는 게 그냥 뚝딱뚝딱 만들면 될 정도로 간단한 공사가 아니다. 당연히 자재가 많이 들어가는 건 물론이요 짓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건조가 아닌 수리의 용도로 도크를 만드는 거니 각 잡고 만들 필요는 없다는 점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크를 만드는 건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했다.
“그 부분은 저희 제노바에서 책임지고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제노바는 의외로 이번 사업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사실 그들 입장에서도 몰타가 요충지인 건 알고 있었다.
다만 지금까지 하이르 앗 딘과 베네치아에게 쌍으로 눌려서 억압받다 보니 이곳에 신경 쓸 틈이 없었을 뿐이었다.
“제노바의 기술력은 믿을 수 있지. 허면 요새 건설에 필요한 비용의 절반은 이쪽에서 부담하겠네.”
짓는 건 제노바에서 짓는데 왜 자금의 절반만 부담하냐고? 그야 완공되면 여기에 있는 시설들은 제노바에 반납해야 되거든.
간단히 말하자면 제노바와 검은 용군단이 합작해서 몰타에 요새를 만드는 것이었다. 완공된 요새는 일정 기간 동안 검은 용군단에서 대여해 사용한 뒤 다시 제노바에 반납하는 형태였고.
그리고 거기에 필요한 물자들을 아이유브에서 구매하는 것이다. 굳이 이슬람인 아이유브와 거래를 하는 건 그들을 통해 구매 시 인건비와 구매 비용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제노바에서 몰타까지는 최소 2주 이상이 걸리는데 트리폴리에서는 아무리 길어봤자 일주일이면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 * *
그렇게 몰타에 틀어박혀 요새의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있자니 아이유브에서 귀한 손님이 찾아왔다.
“용담공 전하. 술탄 살라딘의 동생. 알 아딜 사이프 앗 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외부에서 공적인 손님이 와서 그런지 힐데는 평상시와는 다르게 정중한 어조로 날 부르며 손님을 데려왔다.
살라딘의 동생이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 알 아딜은 한눈에 봐도 귀티가 나는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에 반해 나는 땀에 절은 무명옷을 입고 있었기에 난처한 듯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만나서 반갑소. 그러니까….”
“알 아딜이라고 불러주시면 됩니다.”
“그래. 알 아딜 경. 본 공작은 그대의 방문을 두 팔 벌려 환영해주고 싶지만 보다시피 내 처지가 이래서 잠깐 의관을 정제할 시간을 주실 수 있겠소?”
옆에 있던 통역이 내 말을 그대로 전했고 진중하게 듣던 알 아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용담공 전하. 천천히 하시지요.”
“고맙소. 힐데! 알 아딜 경을 응접실로 모시게.”
“알겠습니다.”
알 아딜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자 나는 한숨을 내쉬며 함께 일하고 있던 일꾼들을 바라보았다.
“흐음, 안타깝게 됐군. 오늘 일이 끝나면 그대들과 함께 술과 고기를 마시기로 했는데 말이야. 천생 이래서야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그 말에 직접 얘기를 하진 않아도 눈에 띄게 실망하는 기색이 다분했기에 나는 웃으며 그들이 듣고 싶은 얘기를 해주기로 했다.
“오토.”
“예… 전하.”
작센에서 귀하게 자랐을 오토는 팔자에도 없는 중노동을 하고 있어서 그런지 다 죽어가는 얼굴로 대답했다.
그는 자신이 노예나 일꾼들이 할 법한 일을 한다는 것에 대해서 굉장한 거부감을 드러냈지만, 공작인 내가 두 팔을 걷어붙이고 하자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가 책임지고 오늘 일을 마무리… 아니 됐다. 오늘은 이쯤하고 다들 쉬라고 하게. 벨렌테에게 얘기해서 술과 고기를 달라 하게.”
“알겠습니다.”
“술과 고기를 즐기는 것은 좋지만 너무 과해서 내일 일에 지장을 줘선 안 되네. 내 말. 무슨 뜻인지 이해했겠지?”
“적당히 취하지 않을 정도로 배분하겠습니다.”
“믿고 있겠네. 자네도 고생했으니 좀 쉬게나.”
말을 마친 나는 서둘러 내 방으로 가서 간단하게 몸을 씻은 뒤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마음 같아선 몸을 푹 담그며 때를 빼고 싶었지만 상대를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무례한 행동이다.
그렇게 응접실로 가자 힐데는 알 아딜과의 대화를 이끌어가며 부드럽게 그를 응대하고 있었다. 평상시에 툴툴거리는 모습과 굉장한 괴리감이 느껴졌지만 힐데는 이래 봬도 한 교단의 성녀 후보다.
당연히 지식도 어지간한 교수들 뺨칠 정도로 풍부했고 아랍 출신인 이비와 함께 다니며 아랍어도 익혔는지 통역도 없이 자유분방하게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제가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한 건 아닐지 모르겠군요.”
“아닙니다. 정화 교단의 사제분께서 입담이 좋아서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하하, 그렇다니 다행이군요. 해서 무슨 일로 이곳을 방문하셨습니까?”
나는 굳이 탐색전을 거치지 않고 바로 본론을 들이밀었다. 나와 직접 말이 통하는 게 아니고 통역을 한 번 거치면 말을 돌려봤자 역효과만 난다.
말 그대로 ‘아’ 다르고 ‘어’ 다른 일이 생길 수 있기에 이런 때일수록 난 직설적으로 묻는 편이다. 그게 서로 간에 오해가 생기지 않으니까.
물론 힐데는 그런 내 모습에 한숨을 내쉬더니 몇 마디 더 부연설명을 덧붙였고 그제야 알 아딜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끈하시군요. 좋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면 저희 아이유브도 공작 전하의 성전에 한 팔 보태고 싶습니다.”
“성전? 아니 그보다 아이유브도 함께 음… 해적질을 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술탄께서는 장기 왕조를 끝장내기 위해선 육군과 해군이 병행해서 진군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다. 그 때문에 함선 운용기술이 뛰어난 제노바와 공작 전하와 함께하며 많은 것을 배워오라 하셨습니다.”
“흠… 혹시 그 지원군의 총대장이 알 아딜 경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그의 대답에 나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아이유브가 발을 걸치게 되면 장단점이 명확해진다. 우선 물자든 병력이든 지원이 빵빵해지겠지. 해적질에 성공할 확률도 올라갈 테고.
반대로 단점은 얻은 것들을 1/3로 나눠야 하며 혹여 우리가 아이유브와 결탁한 게 들키면 별로 좋은 소리는 못 들을 것이다.
재수 없어서 교황에게 파문빔이라도 맞으면 진짜 개지랄 날 테고.
하지만 그런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살라딘의 제안은 달콤했다. 우선 내 눈앞에 있는 사내. 알 아딜 사이프 앗 딘. 신앙의 검이라 불리며 서양에는 사파딘이라 알려진 인물.
살라딘의 뒤를 이어 술탄에 자리에 오르는 인물이니 친해져서 나쁠 건 없을 것이다. 물론 그가 4대 술탄이고 그 자리에 오르는 과정에서 조금 유혈사태가 있긴 했지만… 그것까진 내가 알 바 아니다.
어차피 능력 자체는 살라딘과 비견될 정도로 위대한 술탄에, 그의 뒤를 잇는 술탄이자 아들인 알 카밀도 똘똘하니 미리 그와 좋은 관계를 맺어둬서 나쁠 건 없겠지.
문제는 우리가 계속 아이유브와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느냐는 건데… 사실 이건 고민해도 별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우리 손으로 호랑이 새끼를 키우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쩔 수 없다. 너무 먼 미래를 위해 코앞에 닥친 현재를 잃어버릴 수는 없으니까.
* * *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변경백인 칼리나와 제노바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얘기했고 알 아딜은 수긍했다.
시급한 일이었기에 나는 즉각 배를 띄워 칼리나와 제노바로 전령을 보냈고 답장이 올 때까지 아이유브에서 기다리겠냐고 물었지만, 그는 이곳에 머물겠다고 했다.
뭐, 본인이 머문다는데 꺼지라고 할 수도 없었기에 나는 그에게 숙소를 배정해주었고 그는 다음 날부터 나와 벨렌테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해전에 대해서 배웠다.
그러는 사이 칼리나와 제노바에서 답장이 왔는데 칼리나는 내 판단에 맡기겠다며 쿨한 답변을 보냈고 제노바는 쌍수를 들고 아이유브의 합류를 환영했다.
베네치아에게 복수를 할 수 있다면 제노바는 상대가 이교도건 뭐건 상관없는 모양이었다. 아마 악마가 계약을 하자고 제안해도 좋다고 덥석 수락하지 않을까?
제노바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내게 자신들의 진심과 성의를 보여줬는데 그 진심 중 하나가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여러 함선들이었다.
“각 가문의 수장들께서 한 척씩 내어주셨습니다. 이걸로 양 날개에서 화력을 담당할 갤리도 보충됐으니 정규 함대를 구성할 수 있을 겁니다.”
“감사히 쓰겠다고 꼭 전해주게.”
“예. 그리고 혹여 이 해적질로 인해 베네치아와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제노바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고 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선 공작 전하의 뒤에 언제나 제노바가 함께함을 잊지 말아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 내 절대 제노바의 의지를 잊지 않겠네.”
감사 인사를 하는 내 말투는 어딘지 모르게 공허했지만 벨렌테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게 벨렌테가 앞서 말한 두 개의 선물도 놀랄 만했지만 가장 압권은 내 눈앞에 떠 있는 거대한 갤리선이었으니까.
“이게 내 기함이라고?”
“그렇습니다. 공작 전하.”
내가 놀라는 표정이 만족스러웠는지 벨렌테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거대한 갤리선을 보며 제원을 읊어주었다.
“이 배는 동로마제국의 드로몬을 개조한 대형 갤리선입니다. 라틴 세일(삼각돛)을 채용했기에 사각돛에 비해 더 빠른 항속을 낼 수 있으며 역풍에도 앞으로 나아가는 게 가능합니다.”
“내가 배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삼각돛이 사각돛보다 운용하는 게 어렵지 않나?”
“숙련된 선원들이 함께할 테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흠, 다른 건 모르겠고 충각 하나는 끝내주겠군.”
“저 배에 옆구리를 들이받히고도 멀쩡한 함선은 없을 겁니다.”
그 이외에도 벨렌테는 신나서 설명을 이어나갔고 나는 내 새로운 기함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보면 볼수록 마음에 드는 자태였다.
“기함의 이름은 뭘로 하시겠습니까?”
벨렌테의 물음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궁니르로 하지.”
이 배는 가장 최선두에 서서 가로막는 적선을 전부 박살 내버릴 테니 그것처럼 어울리는 이름이 또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