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9화
“정말 고생했네. 내 자네가 날 위해 힘써준 일은 절대 잊지 않겠네.”
내 격려에 미켈란젤로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아마 내가 평소에 선심성 발언을 남발하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겠지.
“라파엘로 자네는 어떤가? 공장은 문제없이 잘 돌아가고 있나?”
“그렇습니다. 완성품을 계속 녹이고 만들고를 반복시키며 숙달시키다 보니 이젠 웬만한 수제품 못지않은 품질을 자랑합니다.”
하긴, 일그러지거나 엉성한 물건은 다시 녹이면 그만이긴 하지. 물론 공장에서 일하는 노예들에게는 악몽과도 같은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살라딘과 거래를 할 정도는 된다는 얘기군.”
“예. 사이즈도 다양하게 준비해뒀으니 분명 만족할 겁니다.”
“좋아, 그건 내가 나중에 직접 공장에 들러서 확인해보겠네.”
나는 그 자리에서 라파엘로까지 위무한 뒤 오토와 함께 연병장으로 향했다.
걷는 동안 잠깐의 짬이 났기에 나는 오토를 교육시키기로 했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오토를 황제로 만들 거라면 그래도 사람 구실은 하게 만들어야 하니까.
“내가 자네의 아버지와 맺은 밀약에 대해선 들었겠지?”
“예. 벨프가에 날개를 달아주신다고 약속하셨다지요.”
날개는 독수리를 의미했고 이를 달아준다는 건 벨프가에서 황제가 나오게 해준다는 은유적인 표현이었다.
“맞아. 그러기 위해 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네. 나는 5년이라는 시간 안에 자네에게 내가 알고 있는걸 다 가르쳐야 하니까.”
“가르침을 주신다면 열과 성을 다해 배우겠습니다.”
“좋아. 타국의 정치에 개입할 생각하지 말고 자네의 세력부터 챙기게. 자네는 이것 하나만 명심하면 되네.”
“예?”
“말 그대로의 의미일세. 산토끼 잡으려다가 집토끼 잃지 말라는 말일세.”
오토의 일생을 생각해볼 때 그는 썩 좋은 황제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사실 본인이 잘나서 황제가 됐다기보단 타이밍을 잘 맞춘 것뿐이니까.
거기에 교황의 지지를 얻기 위해 자신을 독일 왕으로 만들어줬던 쾰른의 대주교를 배신하는데, 그렇게 교황의 지지를 얻어내고서는 고작 땅 조금에 욕심을 부리다가 파문까지 당한다.
그래도 여기까지면 어떻게든 수습을 할 수 있을 텐데 분위기를 반전시켜보겠다고 프리드리히 2세를 지지하던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에 끼어들었다.
그렇게 남의 전쟁에 끼어들었으면 이겨야 하는데 부뱅 전투에서 영혼까지 탈탈 털리고 이 패배의 여파로 황제 자리에서 폐위당하고 만다.
참 여러모로 안타까운 황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 억울한 일도 있을 테고 몇몇 일은 그럴 수 있다며 쉴드를 칠 수도 있겠지만, 모든 일은 결과로 말하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지도자는 철인이 아닐세. 자네가 못하는 일은 잘하는 이에게 시키면 돼. 수하를 믿어주는 것도 지도자의 덕목이야.”
“하지만 공작 전하께서는 그 모든 일을 직접 관리감독 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능력이 되니까 그런 거고.”
다소 뻔뻔하기까지 한 내 말에 오토는 미묘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나는 능력이 되고 스스로 자신의 가치를 몇 번이나 증명해냈으니까.
“그리고 나도 잘 모르는 일은 방향성만 잡아주고 관리감독만 하는 편이잖나.”
“그건 그렇지요.”
“내가 말한 것들 명심하게. 지금은 이해가 안 가도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니까.”
“알겠습니다.”
물론 전혀 알아들은 표정이 아니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조약 때문에 오토는 내게 5년 동안 묶여있을 수밖에 없었고 그동안 열심히 세뇌를 시키면 그만이니까.
“수행은 여기까지면 충분하네. 난 항만으로 가볼 테니 자네는 경비대들이 머무는 관사로 가서 필리프에게 인수인계를 마무리하게. 그들과 회포도 풀고.”
말을 마친 나는 품속에서 은화 더미를 꺼내 오토에게 건네주었다.
생각해보면 경비대는 지금껏 오토의 명령을 받아왔다. 그런데 자신의 상관이 북부로 간다고 몇 달간 얼굴도 비치지 않다가 갑자기 뉴페이스가 상관이라고 오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러니 이렇게 정식으로 인수인계를 시키는 게 서로 간에 편할 것이다. 겸사겸사 둘 사이에 묵은 앙금도 풀고 말이다.
그렇게 오토를 보낸 나는 곧장 항만으로 이동했다. 항만은 당연히 바다에 있었기에 말을 타고 이동했는데 바다 냄새가 진해질수록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상전벽해라고 하던가? 니스의 항구는 작은 배들이 정박을 하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크게 바뀌어 있었다.
거대한 조선소와 화물을 보관하는 창고,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을 위한 수많은 제반 시설 등등. 규모만 작다 뿐이지 제국 내의 어지간한 항만들과 비교해도 꿀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렇게 내가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하고 있자니 벨렌테가 나를 맞이하기 위해 허겁지겁 달려오고 있었다. 옆에 고드프리가 없는 걸 제외하면 왠지 데자뷰가 느껴지는 상황이다.
“허억… 헉… 오셨습니까. 공작 전하.”
“그래. 혹시 내가 바쁠 때 왔나?”
“아닙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오늘은 시찰을 하러 온 게 아니었지만 벨렌테의 성의를 무시하기도 그랬기에 나는 뒷짐을 진 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보시다시피 조선소와 내부에 있는 도크는 다 완공됐습니다. 현재 배를 건조 중이고 일주일 안에 진수될 겁니다.”
“이곳에서 중형 갤리를 찍어낸다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한 번에 2척씩 찍어내는 게 가능합니다.”
“배는 그렇다 치고 선원과 노잡이들은 어떻게 구할 생각인가?”
“선원들은 지원자가 넘치는 상황이고 노잡이들은 일단 노예들로 충당할 생각입니다.”
막힘없이 대답하는 벨렌테의 모습에 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행동과 말에도 점차 관록과 연륜이 묻어나고 있구만.”
“하하, 그래도 전 여전히 부족합니다. 아직 배울 것도 많고요.”
“그래. 그 초심을 늘 가슴속에 새기도록 하게.”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딱딱한 얘기는 이쯤 하고… 오랜만에 자네와 저녁이나 함께 하고 싶은데 괜찮겠나?”
“물론입니다. 제 자택에서 대접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내가 진짜 저녁이나 먹자고 한 얘기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는지 벨렌테는 나를 자신의 저택에 초대했고 난 기꺼이 그 초대에 응했다.
때마침 저녁 식사 시간이었기에 빠르게 음식들이 올라왔고 역시 바다가 코앞이라 그런지 육류보다는 싱싱한 해산물들이 잔뜩 올라와 있었다.
“다른 건 모르겠는데 북부에 올라가니 이곳에서 먹었던 해산물들이 아른거리더군.”
“하하하, 싱싱한 해산물에 한번 맛을 들이면 쉽사리 잊기가 힘들지요.”
나는 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이런저런 신변잡기들을 늘어놓으며 우선 식사를 마쳤다.
빈 접시가 나가고 난 뒤, 간단히 와인으로 입가심을 하며 입을 열었다.
“벨렌테. 배가 진수되는 시점에 맞춰서 바로 배를 운용할 수 있게 선원들을 훈련시켜주게.”
“따로 함대가 필요한 일이 있으십니까?”
그간 먹은 짬밥과 눈칫밥이 허사가 아니라는 듯 벨렌테는 요점을 잘 추려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도 알겠지만, 베네치아와 테살로니카 왕국이 카노사를 급습하며 우리를 도발했네. 용의 수염을 건드렸으면 당연히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나?”
“으음… 공작 전하. 전하께서 용담공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용맹하신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해전과 육상전은 그 궤가 다릅니다.”
“내가 그걸 모르겠는가? 실제로 베네치아 함대와 맞서 싸우겠다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의 것을 털어먹겠다는 말이네.”
“…해적질을 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묻는 벨렌테에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전하. 해적질이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닙니다. 자칫 잘못하면 이쪽이 역으로 당할 수도 있습니다.”
뭐, 벨렌테의 걱정은 이해한다. 아마 지금의 내 모습을 보면 물가에서 놀고 있는 어린아이를 보는 심정이겠지.
“벨렌테.”
“예. 공작 전하.”
“내가 누군가?”
뜬금없는 내 물음에 벨렌테는 멍청한 얼굴로 날 바라보다 더듬더듬 대답했다.
“예? 어… 니스의 정당한 지배자이시자 신성 제국의 용담공이시며 바이킹… 아….”
“더 말이 필요한가?”
내가 해전을 썩 좋아하는 건 아니었지만 바이킹의 특성상 해상 전투에서 여러 가지 어드밴티지를 받는다. 특히 해적질을 할 때는 더더욱.
“제가 실언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계획도 있다네.”
나는 몰타에 자리를 잡는 것과 그 과정에서 아이유브의 도움을 받는 것을 이야기했다. 처음에는 뭔가 하고 듣던 벨렌테도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눈이 점점 커졌다.
“공작 전하께선 다 계획이 있으셨군요.”
“아무렴 내가 밑도 끝도 없이 함대를 끌고 꼬라박겠는가?”
사실 몰타에 자리를 잡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힘든 일이다. 일단 충분한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의 지원이 있어야 하며, 동시에 북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국가의 지원도 필요했다.
문제는 해군력을 보유한 국가의 대부분은 기독교 국가였으며 북아프리카에 자리 잡은 국가는 높은 확률로 이슬람이라는 점이었다.
만약 내가 기독교도의 휘광을 등에 업고 몰타를 점령하면 이슬람에서 게거품을 물면서 몰타를 탈환하려 할 것이다.
반대로 이슬람교도가 되어 몰타를 점령하면 턱밑에 있는 시칠리아는 물론이고 해양도시들도 게거품을 물며 몰타를 박살 내려 하겠지.
그 때문에 위에서 얘기한 조건들을 달성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많은 걸 투자해서 점령한다고 해도 득보다 실이 많기도 했고.
하지만 단순히 외교만으로 몰타에 알박기를 성공하는 순간 몰타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변모하게 된다. 지정학적으로 몰타는 동지중해와 서지중해의 중간에 있는 관문과도 같은 섬이었으니까.
“아이유브의 지원까지 받을 수 있다면 충분히 해볼 만한 이야기 같습니다.”
“그렇겠지. 여기 데르나 항구에서 물자를 보급받고 쉬다가 크레타와 펠로폰네소스반도 사이에 있는 물길을 틀어막으면 딱 아니겠나?”
뭐, 제일 좋은 건 아드리아해를 틀어막는 거지만 그건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이탈리아반도 남부에 자리 잡은 시칠리아 왕국이 우리에게 마냥 우호적인 건 아니니까.
“허면 제가 즉시 제노바로 가서 아버님과 다른 귀족 가문의 수장들을 설득하겠습니다.”
“그래 주겠나?”
내 물음에 벨렌테는 가슴을 탕탕 치며 호언장담했다.
“맡겨만 주십시오. 다들 베네치아라면 이를 갈고 있으니 허가해주실 겁니다.”
하긴, 베네치아가 하이르 앗 딘을 통해서 제노바를 끈덕지게 괴롭혔었지. 뿌린 대로 거둔다고 반대로 자기들이 해적질에 당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긴 하네.
“믿고 있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