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화
제국 남부로 내려오는 길은 순탄했다. 어차피 협정이 맺어졌기에 우리는 개선하는 군대마냥 당당히 슈바벤을 관통해서 내려왔고 황제파 귀족들은 이를 갈면서도 길을 열어줘야 했다.
그렇게 남부에 입성한 우리가 이 승리로 얻어낸 것들을 나누며 연회를 즐기던 와중에 생각지도 못한 급보가 전해졌다.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전령이 가져온 편지를 읽던 칼리나는 똥 씹은 표정을 지으며 탁자를 내려쳤고 그 순간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가라앉았다.
분위기를 띄우던 악단과 광대들은 물론이요 귀족들까지 칼리나의 눈치를 살폈고 그녀 역시 자신 때문에 분위기가 깨진 걸 알았는지 한숨을 쉬며 얘기했다.
“다들 미안합니다. 별일 아니니 마저 즐겨주십시오. 라그나르. 잠깐 나 좀 봐.”
갑작스러운 호명에도 나는 당황하지 않고 마시던 맥주를 마저 입에 털어내 입가심을 한 뒤 그녀를 뒤쫓았다.
그렇게 칼리나는 조용한 방으로 나를 이끌었고 나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연회 한중간에 사람이 없을 법한 방으로 날 꼬시다니… 대담한데?”
하지만 칼리나는 내 말에 그 어떤 반응도 없이 한숨을 내쉬며 내게 편지를 내밀었다. 그제서야 나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반쯤 구겨진 종이를 펴서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일련의 무리가 카노사와 근방의 마을을 습격. 수비병력들의 끈질긴 저항과 근처의 지원병력들로 인해 적의 공격을 격퇴하였음.―
―정확한 흉수를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적들을 추적하고 생존자들의 진술을 통해 확인한 결과 베네치아와 테살로니카 왕국의 소행일 확률이 높음. 라틴 제국의 개입 여부는 확실치 않음.―
“미쳤군.”
이 세 마디가 내가 할 수 있는 감상의 전부였다.
우리가 하이르 앗 딘을 토벌하고 제노바와 연대함으로써 베네치아에 빅엿을 먹였다는 건 인정한다. 그 때문에 그들이 언젠가는 우리를 향해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리라는 건 자명한 사실이었고.
하지만 이건 도를 넘은 행동이었다. 칼리나의 영지, 개중에서도 직할지가 카노사와 밀라노, 투스카니 이렇게 세 곳이나 되는데 카노사만 콕 집어서 건드린 건 적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도발이었다.
비록 그녀가 밀라노에 자리를 잡고 있고 도시의 규모도 밀라노가 카노사를 압도하지만, ‘칼리나 디 카노사’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근본은 카노사였으니까.
실제 게임 속에서도 그녀는 카노사에 대한 자부심이 충만했으며 집착도 남달랐다.
밀라노와 카노사가 동시에 공격받는다면 카노사를 구원하러 갈 정도로 카노사는 그녀 최후의 보루였으며 갈망의 도시였으니까.
물론 그 이유는 정확히 모른다. 아마 그녀라는 인격 자체가 그렇게 설계된 게 아닐까?
하지만 그런 내 예상과 다르게 그녀가 카노사에 집착하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그놈들이 나와 당신의 추억이 담겨있는 도시를 공격했어. 나와 당신의 모든게 담겨 있는 그 도시를! 그 더러운 발로 짓밟았다고!”
발작하듯 소리치는 칼리나를 보며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원인이 라그나르였나? 대체 라그나르는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칼리나를 흐물흐물하게 만든 걸까?
“라그나르. 이 미친놈들을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당장이라도 병력을 몰아쳐서 저 개새끼들을 다 쓸어버릴까?”
“진정해 칼리나. 너의 분노는 정당하고 복수를 하고 싶은 네 마음도 다 이해해. 하지만 지금은 냉정해져야 해.”
내 말에 그녀는 씨근덕거리는 걸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주저앉으며 대꾸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순 없어. 내 영지가 공격받았고 나는 변경백으로서 거기에 맞는 대응을 해야 해. 이대로 넘어가면 내가 얼마나 얕보이겠어.”
“칼리나. 너도 알겠지만 우리는 저 먼 북부까지 원정을 다녀왔어. 물론 실질적인 전투를 벌인 건 아니지만, 행군 자체가 전투력을 깎아 먹는 행위에 돈 낭비인 거 알잖아.”
별들의 전쟁이라는 게임을 해보면 알겠지만, 먹을 것도 필요 없고 지치지도 않는 병력들로 전투를 벌여도 재정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하물며 모든 게 필요한 인간은 어떻겠는가? 만약 이대로 병력을 해산시키지 않고 베네치아나 테살로니카로 진군시킨다고 하면 병력들의 전투력과 사기가 바닥을 찍을 것이다.
깎여나가는 영주들의 지지도는 덤이겠지. 이번에 북부 원정 자체는 내부 정치와 맞물려 그들의 생존과 연관된 문제였지만 베네치아와 테살로니카는 그게 아니었으니까.
뭐, 길게 보면 검은 용군단에 위협이 되기는 할 테지만 원정을 다녀와 제대로 휴식도 취하지 못했는데 병력을 재동원해서 싸울 정도는 아니라는 거다.
물론 카노사와 투스카니가 함락당하고 밀라노가 공격받았다면 얘기가 달라지겠지만 격퇴했다고 하지 않는가.
“흠, 그럼 용담공인 당신이 해결해 볼 테야?”
용담공(勇膽公).
이 어이없는 칭호는 황제가 내게 선물해준 빅엿이었다.
그는 뭐 한 것도 없는 내게 공작의 작위와 함께 내 용맹을 치하한다며 용담공이라는 칭호를 함께 내려주었다. 물론 영지 따위는 없는 말 그대로 허울뿐인 칭호였지만.
황제가 이런 어울리지도 않는 짓거리를 하며 내 작위를 높여준 의도는 칼리나와 내 사이를 갈라놓기 위함이었다.
칼리나에게 선제후를 내려주는 대신 내게도 공작이라는 지위를 내려 불화를 유도하려 한 것이다. 원래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공작이 직위상 꽤 높은 자리인 건 맞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건 아니었다.
군대마냥 계급체계가 딱딱 나눠져서 무조건 복종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힘 없으면 백작에게도 두들겨 맞는 게 공작이었으니까.
아무튼 난 황제의 변덕으로 인해 생각지도 못하게 공작이라는 작위와 용담공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것이다. 물론 내 정적들은 경멸의 의미를 담아 야만공(野蠻公)이라고 부르지만.
“그런 어울리지도 않는 호칭은 그만둬.”
“왜. 당신에게 딱 어울리는 호칭인데. 아니면 야만공이 더 나을려나?”
“그깟 호칭이 뭐가 중요하겠어. 아무튼 내 나름대로 괜찮은 해결책이 있는데 들어보겠어?”
사실 베네치아에 대한 해결책은 오래전부터 구상하고 있었다. 굳이 이번이 아니더라도 내가 북부에 올라가기 전에 한 번쯤 조지고 가야 뒤가 평화로울 테니까.
칼리나와 검은 용군단이 남부에서 든든하게 내 뒤를 받쳐줘야 내가 북부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 때문에 나는 늘 베네치아를 조질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고 고인물인 내게 그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얼마든지. 그러려고 당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거니까.”
칼리나의 허락에 나는 품속에서 나름 정교하게 그려진 지도를 꺼내 탁자에 펼치며 대응 방안을 이야기했다.
“자, 일단 전면전은 안 돼. 설사 펼친다고 해도 이쪽이 먼저 선전포고를 해선 안 돼.”
“이유는?”
“명분이 애매하니까. 저기서 먼저 지랄해서 이쪽에서 맞대응 하는 건 상관없지만 어중간한 명분으로 싸움을 걸면 집결이 제대로 안 되거든.”
그런 면에서 지하드나 성전은 최고의 명분이었다. 그냥 이슬람과 기독교를 줘패고 난 뒤 이건 성전이야! 라고 외치면 그만이었으니까.
“저들도 그걸 알기에 딱 이 정도 선에서 마무리 지은 거겠지. 가벼운 분쟁에 죽자 살자 대응할 수는 없잖아? 강행하면 당연히 반발도 일어날 테고.”
왜 그런 거 있잖은가. 가볍게 한 대 툭툭 치는 거. 화내기에는 쪼잔해 보이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은근히 아픈 것들.
상인들이라 그런지 몰라도 베네치아 놈들은 아슬아슬 선을 지키며 밀당을 하고 있었다.
“전면전이 안 되면 다른 방안이 있나? 우리가 돈으로 압박해서 조질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베네치아한테 돈으로 개기면 곧바로 K.O패를 당해서 떡실신할 거다. 그 때문에 나는 철저히 저들이 사용했던 방법을 쓸 생각이다.
“해적질을 하면 되지.”
“뭐?”
“해적 말이야 해적. 바다의 무법자 몰라?”
“아니, 그걸 내가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진짜 하이르 앗 딘처럼 해적질을 하자고?”
“안될 게 어딨어?”
이 시기에 해적질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 해적과 상인을 구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상인들이 칼 들면 그게 해적이었으니까.
“한번 얘기나 해봐.”
칼리나는 눈을 찡그리면서도 내 말을 끊지 않았고 나는 천천히 내가 생각하고 있던 바를 얘기했다.
“일단 우리 해군력은 형편없으니 제노바의 도움을 받아야겠지. 전면전은 무리라도 해적질 정도는 제노바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거야.”
“그래서?”
“여기 이탈리아 남부에 있는 섬인 몰타에 전초기지를 만들고 펠로폰네소스반도와 크레타를 털어먹을 거야. 중간중간 무역선들도 털어먹으면 더할 나위가 없지.”
내 말에 그녀는 탐탁지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렇게 보니 몰타가 요충지이긴 한데 너무 허무맹랑한 거 아니야?”
“아니. 할 수 있어.”
내가 이렇게 자신하는 건 실제로 게임에서 이 방법을 자주 써먹었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은 마우스로 클릭만 하면 되는 게임과는 다르지만 몰타는 원역사에서 구호 기사단의 요충지이자 최후의 거점으로 사용된 곳이었다.
구호 기사단은 삼별초마냥 오스만에 대항해 싸워왔는데 본거지였던 로도스섬이 점령당한 뒤 그들은 신성 로마 제국의 보호 아래 몰타에서 성전을 지속했다.
로도스에서도 그랬지만 그들은 몰타에 자리 잡은 뒤에도 끊임없이 오스만을 괴롭히며 해적질을 했고 오스만은 결국 최후까지 몰타를 함락시키지 못했다.
몰타가 오스만에게 점령되지 않았던 건 일단 몰타가 면적이 서울의 절반만 한 건 둘째 치고서라도 바위가 엄청나게 많아 대함대가 상륙할만한 공간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근방에 보급기지로 삼을만한 곳도 없어서 보급도 여의치 않았고 섬이 좁아서 많은 병력이 상륙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즉, 이런 것들을 종합해볼 때 몰타는 방어에 최적화된 섬이었으며 동지중해로 뻗어 나가기 위한 요충지라고 볼 수 있었다.
“흐음, 그럴듯하긴 한데 물자는 어쩌게? 당신 말대로 적들이 상륙하기 힘들다는 건 이쪽에도 적용되는 얘기잖아.”
내 설명을 들은 칼리나는 흥미가 동한다는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그녀를 설득하기에는 모자란 모양이었다.
“네 말대로 제노바에서 직선거리를 잡아도 1,000km나 되니까 물자 운반이 힘들겠지. 그래서 아이유브의 도움을 받기로 했어.”
“아이유브? 살라흐 앗 딘을 얘기하는 거야?”
“맞아. 이쪽에서 값을 지원해주면 살라딘이 물자를 지원해주기로 했어. 덤으로 아이유브의 해안선도 개방해주고.”
“지난번에 아이유브랑 교역을 한다고 하더니 설마 이걸 염두에 두고 한 거였어?”
“뭐, 그런 셈이지. 아무튼,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기는 힘들겠지만 원래 해적질이라는 게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한 게 아니잖아?”
왜 영국이 드레이크를 이용해 사략질을 하고 오스만이 바르바리를 이용해 해적질을 했겠는가? 들이는 비용에 비해 얻게 되는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유브를 끌어들여도 되겠어? 자칫 잘못하면 장기 왕조의 누르 앗 딘과 대적하게 될지도 모르는데?”
“그건 걱정할 거 없어. 어차피 그 양반 지금 오늘내일하고 있거든.”
그의 사후 장기 왕조는 저절로 무너질 테니 신경 쓸 것 없다. 실제로 누르 앗 딘이 죽은 뒤로 살라딘이 크게 성장하며 아랍 전역을 통일하기도 하고.
“좋아. 어디 한번 화끈하게 해보자고.”